식민과 분단을 넘어 하나 된 겨레말

일본 제국주의에 나라를 빼앗겼던 시절 벽초 홍명희 선생은 유명한 장편소설 『임꺽정』을 써서 독자들에게 큰 감명을 주었습니다.
그 소설에서 무엇보다 감동적이었던 것은 작가가 등장인물들로 하여금 이 땅의 구석구석을 돌아다니게 하면서 그곳의 아름다운 경치를 구경하고 그곳 사람들의 인정과 풍물을 경험하게 한 것입니다. 그리하여 독자는 소설을 읽어나가는 동안 저절로 우리 민족의 전통을 상기하고 주권의 상실을 뼈아프게 느끼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오늘날 이 소설을 읽는 사람들이 하는 불만 중의 하나는 등장인물들이 모두 점잖은 서울말을 쓴다는 것입니다.
주인공 꺽정이는 천민 출신이고 갖바치는 함경도 출신이며 그 밖의 주요 인물들도 낮은 신분이 많은 데다 대부분 전국 각지에서 모여든 사람들인데, 한결같이 점잖은 서울말을 한다는 거지요. 엄밀히 말하면 이것은 소설로서 확실히 중대한 결함이라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벽초 선생이 『임꺽정』을 쓰기 시작할 무렵은 일제의 억압 밑에 있던 식민지 시대였을 뿐만 아니라 우리말을 어떻게 써야 올바로 쓰는 것인지에 관한 통일된 규범도 마련되지 않았을 때였습니다. 당시에는 수많은 지역어(방언)들이 혼재하는 데다 일본어가 공용어로서 학교와 언론을 통해 우리의 언어생활을 억압하고 있었습니다. 『임꺽정』에 사용된 언어는 이러한 시대에 민족어의 단일성을 지키기 위한 불가피한 선택이었다고 나는 생각합니다.

『임꺽정』이 신문에 연재로 발표되던 시대는 또한 한글운동이 활발하게 전개되던 시대이기도 했습니다.
일찍이 주시경 선생이 시작했고 뒤를 이어 장지영, 김윤경, 이윤재, 이극로, 최현배, 이병기, 이희승 등 선구적 어학자들이 조선어연구회를 설립하고 조선어사전 편찬사업에 착수했으니, 이것은 우리말을 갈고 닦고 연구하는 사업이자 바로 민족독립운동의 일환이었습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은 남북이 분단된 오늘의 조건에서 일제강점기의 조선어사전 편찬사업 정신을 계승하는 작업입니다.
알다시피 이 사업의 씨앗이 뿌려진 것은 1989년 평양을 방문한 문익환 목사와 김일성 주석 사이에 통일국어사전을 편찬하기로 합의한 데서입니다. 그 후 15년이 지난 2004년 3월 남측의 (사)통일맞이와 북측의 민족화해협의회가 의향서를 체결하고, 2005년 2월 남과 북의 편찬위원들이 금강산에서 ‘겨레말큰사전 공동편찬 위원회’ 결성식을 가짐으로써 사업은 본격화됐습니다.

그동안 많은 진전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2015년 12월 제25차 공동편찬위원회 회의 이후 남북 학자들 간의 만남은 더 이상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습니다.
참으로 안타까운 일입니다.
내년 2021년에는 계획대로 《겨레말큰사전》이 발간되고 《전자겨레말큰사전》 편찬의 기반이 구축되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그리고 이 사업이 남과 북의 활발한 접촉과 교류를 위한 계기가 되기를 빌어 마지않습니다.
겨레말의 하나 됨이 겨레의 통일을 앞당길 것입니다.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염무웅
이사장 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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