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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고 은

모국어는 겨레의 영혼입니다.

지상에서 단 하나밖에 없는 언어, 우리의 일생과 함께 하는 언어, 상처받았으나 언제나 겨레의 영혼을 담아주었던 우리들의 모국어로 여러분을 환영합니다. 반갑고 반갑습니다. 북의 벗들 그리고 남의 벗들. 겨레말의 영광을 위하여 우리는 여기에 와 있습니다. 이제 죽어도 된다. 라는 몇 년 뒤의 궁극적 감회를 예감하면서 나 역시《겨레말큰사전》공동편찬위원회의 이 위대한 첫 만남에 달려왔습니다. 겨레의 유구한 생존 가운데 한 개 생명으로 태어난 이래 겨레말에 의탁하여 살아온 지난 역정을 바쳐 이 겨레말 대 결집에 동참한 여러분과 더불어 나는 새삼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습니다.

오늘날 지구상에는 육천 몇 백의 언어들이 존재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2주에 하나씩 언어가 소멸되고 있습니다. 이것은 지구 생태계의 멸종에 비례하는 재앙입니다. 작은 부족들이 자기들의 언어를 잃고 다른 부족의 언어를 사용하는 경우가 너무나 많습니다. 이런 현실에서 인류의 오랜 기억과 꿈을 가능케 하는 약소민족의 언어는 심각한 위기에 직면할 수밖에 없습니다.

우리 겨레말이 이런 소멸의 대상은 분명히 아닙니다. 하지만 더 이상 겨레말을 이대로 방치해서는 안 될 이유가 우리에게 절실합니다. 겨레말은 나날이 오염되고 있으며 때로는 우리의 영혼을 온전하게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변질되고 있기도 합니다. 게다가 남과 북의 분단으로 인해 겨레말의 흐름도 차단되었고, 동일한 사물과 세계에 대해 다른 표현을 사용하는 경우가 늘어나고 있습니다. 어찌 긴급하지 않다 하겠습니까?

겨레말이 우리의 혈통 그 자체이고 우리 넋의 끝없는 표현이므로 우리가 이루어온 말의 공동체가 없어지지 않는 한 우리 겨레는 자손 만대의 미래에까지 닿아 있을 것입니다. 이 같은 겨레말에의 사명이 우리를 만나게 했으며 기어이 우리 겨레말의 편찬사업을 함께 출범시키기에 이르렀습니다.

우리는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말을 통해서 우리가 누구인가를 깨달을 수 있고 우리가 어떻게 살아내야 하는가를 열렬히 추구할 수 있습니다.

이 고귀한 우리의 의의를 겨레의 전범으로 물려줄 겨레말의 순결성과 통합성 앞에서 이 자리는 어떤 분열도 끼어들 수 없습니다.

과연 하나의 사전에 겨레말을 올리는 일은 바로 겨레를 하나로 재청구하는 일의 시작이기도 합니다. 겨레말 하나하나의 생명을 지키는 일이 바로 겨레의 생명을 옹호하기 때문입니다.

우리에게는 말을 빼앗긴 치욕의 시대가 있었습니다. 그 시대 뒤에 살아난 말의 자유는 얼마나 벅찬 것이었습니까. 그 뒤 조국분단으로 인해서 서로 각각으로 쓰게 된 말의 분단시대를 벗어나지 못 하였습니다. 바로 이러한 민족사적 고행을 거치는 동안 오늘의 겨레말 공존 공조의 지혜에 도달하게 되었습니다.

여기 떠오르는 광경 하나가 있습니다.
해방 2년째의 1947년 봄 이극로선생 일행이 서울 을유문화사에 나타나셨습니다. 그 회사는 해방된 해 을유년을 기념해서 생긴 출판사였습니다.

일제강점기에 주시경 김두봉 권덕규 선생 등이 편찬한 바 있는 겨레말 사전 원고는 극심한 물자난으로 용지를 확보하지 못한 채 세 번이나 출판이 거절당했습니다. 그때 이극로 선생이 원고 뭉치로 편집실 책상을 내리치며 분노를 터뜨렸습니다. "누구 하나 우리 말 우리 얼 큰사전에 관심조차 보이지 않으니 도대체 해방된 의의가 어디 있단 말이오? 그래 이 원고를 가지고 일본놈들한테나 가서 내달라고 사정해야 옳단 말이오?"

이 분노로 출판사측은 감동을 받아 큰사전 제1권만이라도 우선 내고 다음 대책을 강구하겠다고 다짐함으로써 그해 가을 "조선말 큰사전" 전 6권 중 제 1권이 나왔습니다.

이 광경과 함께 1942년 조선어학회사건의 고난도 떠오릅니다. 그 당시 편찬위원들은 사전 원고를 자신의 목숨보다 더 소중히 여기다가 옥사하기도 했습니다.

우리 겨레의 말 하나하나는 우리의 과거와 미래 그리고 현재의 생명 그 자체입니다. 우리의 오랜 음운으로 된 말의 영감과 진실을 담고 있는 겨레말의 공동이야말로 온전한 겨레의 공동이겠습니다. 그곳에서 우리는 식민지 잔재를 청산하고 분단의 상처가 치유된 행복을 기약할 것입니다.

오늘 나의 감격 속에는 이 같은 우리 겨레의 말뿐 아니라 겨레와 함께 살아온 조국의 산하를 비롯한 새소리와 물소리 그리고 천년의 바람소리도 우리가 만드는《겨레말큰사전》의 올림말이 되게 하고 싶습니다.

그리하여 큰사전에 수록된 말들은 그 안의 질서 속에 잠들어 있다가 우리와 우리 자손이 불러낼 때마다 조국과 세계의 눈부신 빛으로 넘쳐나는 생명의 소리가 될 것입니다. 지난 날 척박한 세상 오고가던 보부상들이 동료를 만난 삼거리 봉놋방에서 헤어질 때 서로 저고리를 바꿔 입었습니다. 그 동지, 그 동무의 동료애가 우리 공동편찬위원들 사이에도 처연하게 넘쳐나기를 바랍니다.

부디 사전이 남과 북, 북과 남의 공동편찬위원 모두의 명예로운 결실물로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우리의 낮과 밤을 이 사업에 바치고자 합니다. 남과 북 해외의 모든 동포 여러분들의 관심과 채찍이 있기를 소망합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회 이사장 고 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