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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 내가 만난 북의 말, 북의 음식
글쓴이 이경희 작성일 2012.11.21
내가 만난 북의 말, 북의 음식
                                             _이경희 / 중앙일보 기자
 
'6.15 민족문학인협회 결성식' 기념 연회장. 옆자리에 앉은 북측 사람(행사요원 혹은 안내원)에게 이름을 물었다.
"김종수입니다."
"무슨 종자를 쓰십니까?"
"바를 종자입니다."
"아…. 바를 정(正자)를 쓰시는군요."
표정관리를 하지 못하고 그만 웃음을 터뜨렸다.
"저희는 '정'이 아니라 '종'자를 쓰시는 줄 알았네요. 북측에서는 '어'를 '오'에 가깝게 발음하시니까요."
그가 반론을 편다.
▲ 이경희(중앙일보 기자)
"남측에서는 '오'를 '오'라고 발음하고, '오'를 '오'라고 발음하지 않으십니까. 거 참 이상합니다."
다시 한번 웃음보가 터졌다. '어'를 말하든, '오'를 말하든 남측 사람들 귀엔 모두 '오'로 들리니 말이다.
이렇게 같은 언어를 쓰는 남과 북이 만날 때에도 머릿속에서 자동번역기를 돌려야 한다. 금강산이건 평양이건, 군사분계선을 넘어 북으로 들어가는 순간 낯선 단어 및 발음과 툭툭 마주치기 때문이다.
자, 글을 지금까지 읽으면서 어색한 단어를 발견하셨는가. '북측'과 '남측'이란 단어, 익숙하신가. 우리는 흔히 '북한' '남한'이란 말로 저들과 우리를 나타낸다. 그러나 북과 만나는 자리에서는 '북한'이나 '북조선'이란 말은 잘 쓰지 않는다. '북한'이라기엔 '한국'을 기준으로 두니 너무 남에 치우치고, '북조선'이라기엔 반대로 북에 너무 치우친다. 게다가 남과 북은 결코 두 나라가 아니므로 '북측'과 '남측' 혹은 '북쪽'과 '남쪽'이라 지칭해야 한다는 게 저들과 우리가 만나는 지점에서 탄생한 화법이다. 북쪽 땅을 밟은 뒤 금강산으로 향하는 버스에서 '관광조장(가이드)'이 "북한이 아닌 북측"이라며 신신당부했다(관광조장은 현대아산에서 파견한 남측 사람이었다).
방북 이튿날, 등산로 입구의 음식점에서 몇몇 사람들이 쇠고기 꼬치 안주에다 막걸리 한잔을 걸쳤다. 고기 맛이 좋아 '접대원(종업원)'에게 물었다.
"한우인가요, 수입 소인가요?"
"북측 소입니다."
구룡폭포로 향하는 등산길. 남측 기업인 현대 아산이 관리하는 관광지답게 '위생실(화장실, W.C)'이란 친절한 안내판이 설치돼 있다. 그 아래에 작은 글씨로 '소변 1$, 대변 2$'란 요금 안내도 적혀 있다.
하산한 뒤 본격적인 행사가 시작되고, 연회 자리에서 비로소 북측 문인들과 대화할 기회가 생겼다. '금강산 문학의 밤' 행사 때 '우리의 항로'란 시를 낭송한 김성칠 시인과 합석했다.
"처음엔 한라산을 갖고 슬픈 시를 썼는데, '동무, 좋은 날 좋은 이야기만 해야지 눈물을 흘리면 쓰나'라고들 해서 급하게 새로 썼단 말입니다. 그래서 시를 다 외우지 못해 보고 읽었는데, 막상 무대에서 읽으려고 하니 숨 고르기가 쉽지 않더란 말입니다."
우리 표현으로는 '호흡 조절'쯤에 해당할까. 북측 시인은 '숨 고르기'란 표현을 자연스럽게 썼다.
대화를 나누다 보면 식탁에 놓인 각종 음식에 눈길이 간다. 사실 이번 금강산 방문에서보다 지난해 조용필 평양 공연을 취재하면서 순수한 북측 음식과 언어를 더 많이 접했다. 그 기억을 더듬어 본다.
우선 음료수들. '맥주' '소주' 등의 술 이름은 남측과 크게 다를 바 없다. 다만 소주는 우리의 안동소주처럼 높은 도수의 술을 가리킨다. 음료수 이름은 완전히 다르다. 달짝지근한 음료수에는 '단물'이란 이름이 붙는다. '배 주스'는 '배 단물'이라고 쓰는 식이다. 다만 남측의 100% 과일 주스를 상상해선 안 된다. 배 향기가 나는 설탕물맛이랄까. '딸기 단물'은 추억의 '딸기 쭈쭈바'를 녹인 듯한 맛이다. 북측에도 콜라와 사이다가 있다. 사이다는 무어라 부를까. 정답은 '탄산 단물'이다. 그렇다면 콜라의 북측 이름? 바로 '코코아 탄산 단물'이다.
평양 고려호텔 만찬장의 차림표(메뉴)에는 다음과 같은 음식 이름이 나열돼 있었다.
'방울쉬움떡과 개피떡, 빠다과일단설기, 생선장과, 청포종합랭채, 칠색송어은지구이, 오리찜튀기장즙, 버섯곱돌장, 가두배추말이졸임, 에스키모….'
'칠색송어은지구이'의 '은지(銀紙)'는 '호일', 차림표 마지막의 '에스키모'는 하얀 아이스크림이었다. 북에서 만든 과자의 주원료 표시를 보면 빠다(버터)·사탕가루(설탕)·닭알(달걀)·졸인젖(분유) 등이 눈에 띈다. 북측에서도 '버터'를 대체할 우리말은 고안하지 못한 모양이다. 남측에도 1979년 출시된 '빠다코코낫'이란 과자가 아직도 나오고 있으니, 남북의 접점을 '빠다'에서 찾을 수 있을까. '포장을 뺀 다음 인차(이내, 즉시) 소비해주십시오'란 안내문도 이색적이다.
음식 이야기 하나 더. 이북 대표 음식으로 손꼽히는 '냉면'. 흔히 냉면을 북에서 무어라 부를까를 물어보면 '랭면'이라고 답한다. 그런데 평양랭면의 본고장인 평양에 랭면집은 안 보이고 국수집만 즐비하다. 평양 옥류관에서 접대원이 식사 주문을 받았다.
"물국수로 하시겠습니까, 비빔국수로 하시겠습니까?"
"냉면은 없나요?"
"물국수와 비빔국수가 있습니까. 100그람, 200그람과 300그람짜리가 있습니다."
사람들은 그제야 국수가 냉면임을 알아차렸다.
기념품 가게로 발길을 돌려보자. 북한 상점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제품이 있었으니, 바로 '항비만제-뽕잎싸락'이었다. 판매원(점원)에게 제품의 효능을 물어봤다.
"살이 많아서 숨쉬기 곤란한 분들 계시잖습니까? 그런 분들 살을 까게 하여준다 말입니다."
'다이어트'의 북측 표현은 '살까기'다. 북도 우리말 표현만 고수하지는 않는다. 지난해 평양의 매대에선 북한이 새로 개발한 노화방지 장수약품 '네오비아그라'가 떡하니 놓여 있었다. 우리로 치면 '누에그라'쯤 될까. 다만 식약청 시험결과 네오비아그라를 비롯한 북한산 건강보조식품에서 중금속이 검출됐기 때문인지, 네오비아그라는 금강산의 매대에선 찾아볼 수 없었다.
우리말을 할 줄 아는 조선족도 남한 사회에 적응하려면 한참 동안 말을 배워야 한단다. 하다못해 '계란 프라이'부터 '때 타올'에 '캐시백 포인트'까지, 온갖 한국식 외래어를 소화해야하기 때문이란다. 외래어의 홍수에 젖은 터라 '코코아 탄산 단물'이니 '숨 고르기' 같은 말이 어색하고 촌스럽게 느껴진 게 사실이다. 그러나 북에 며칠 머물다보니 북한식 표현이 귀엽고 친근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북한이 우리말을 지키고 가꿔온 노력을 인정하고 상당부분 본받아야 하리라는 생각도 품어본다.

 
* 이글은 남북의 말에 관련된 이야기로 <겨레말 누리판> 2006 12월호에 연재되었던 글을 ‘남녘말 북녘말’로 옮겨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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