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측면에서든 역사에 대해 남북이 가지고 있는 입장의 차이는 적지 않다. 국어사 연구에서도 이와 같은 입장 차이는 역력하다. 국어사 연구에서 드러나는 모든 차이가 역사 자체에 대한 남북의 입장 차이에서 기인하는 것만은 아니다. 여느 분야에서처럼 남북 연구자가 따로 떨어져 있었던 50여 년의 세월에서 오는 차이라 할 만한 것도 있기 때문이다. 차이에서 확인되는 남북 국어사 연구의 관점을 몇 가지 살펴보기로 한다.
  고대사에 대한 남북의 입장 차이는 ‘사실임'에 대한 차이인 것이 많다. 단군릉의 존재 여부라든지 평양에 한사군의 하나인 현도가 존재했는가 하는 관점의 차이가 그와 같다. 앞엣 것이 실존했지만 뒤엣 것은 이름으로만 존재했다는 것이 북의 주장이라면, 남은 그와 반대인 것이 주된 흐름이다. 역사가 흔적으로부터 사실을 추리해 가는 합리적인 과정이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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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환단고기≫에 포함된, <단기고사>, <규원사화>, <태백일사>는 남측에서도 공히 확인 가능한 자료지만 20세기 자료로만 전한다. 그 이전 문헌으로 북에서는 ≪평양지(平壤誌)≫, ≪영변지(寧邊誌)≫의 기록을 들고 있으나 출간 당시에도 존재하지 않던 옛이야기에 대한 기록일 뿐이고, ≪훈민정음운해≫의 ‘민간에서 쓰던 글자'가 ‘신대문자', 곧 ‘가림토'라 주장하기도 한다.

  1990년대부터 제작된 다부작 영화 『민족과 운명』은 영화에 식상해있던 북한사람들을 다시 영화관으로 모을 정도로 큰 반향을 일으켰다. 다양한 영화적 기법으로 새로운 장면이 연출되었을 뿐 아니라, 남한사회의 자본주의 문화를 사실적으로 장면화한 점도 인기요인으로 작용했다고 한다. 자본주의 문화로 인해 생겨난 화려한 볼거리는 1990년대 세계정세에 맞추어 북한사회의 변화의 욕망을 어느 정도 충족시키는 역할을 했다는 점에서 1990년대적 변화로 자주 거론된다. 이는 개방의 징후라기보다는 자본주의 문명의 폐해를 부각시킴으로써 1990년대적 변화에 따른 새로운 문화의 유입과 자본주의적 욕망을 통제하고 관리하려는 기획의도의 적극적 반영이라고 한다.
  그러나 자본주의 문명을 비판하기 위해 자본주의 문화의 폐해를 강조한다는 당초의 목적은 자본주의 문명에 대한 욕망을 자극하는 역효과를 낼 수도 있다. 예컨대, 남한에서 소설과 영화로 제작되어 세간의 화제가 되었던 『자유부인』은 이

  사회주의 계획경제를 표방하는 북한은 건국 초기인 1950년대부터 ‘중공업이 먼저냐 경공업이 먼저냐'를 놓고 격론을 벌이며 경제정책을 입안해왔다. 중공업 우선정책을 채택함으로써 중공업 노동자의 입지는 더욱 강화되었고, 중공업 중에서도 기간산업의 핵심분야인 제철소는 가장 관심있게 키운 분야이다. 1950년대 ‘강선 제철소'의 전후복구사업은 중공업 분야 육성책의 한 시발점으로서 이후 혁신적 작업방식을 유도하는 기폭제로 역할한다. 윤세중의 『시련속에서』는 전후복구사업을 미학적으로 뒷받침하는 방식으로서 제철소의 주력 노동자인 용해공을 내세운 대표적 소설이다. 가장 고되고 어려운 노동을 하는 용해공을 미적으로 이상화함으로써 노동자 계급, 그 중에서도 용해공 중심으로 사회통합의 기제를 마련하려는 의도가 강하게 투영된 작품이다.
  영화 초반부에 1950년대 작가 윤세중이 소설을 쓰기 위해 강선제철소에 와서 취재를 할 무렵을 회고하는 모습은 1990년대 대표 노동자인 용해공이 어디에서부터 시작되었는가를 전해주는 상징적 장면이다. 『시련 속에서』가 1950년대 용해공을 중심으로 노동자 계급의 정통성을 미적으로 표상하고 있다면,『민족과 운명』 노동계급 편은 이 전통을 이어받아 1990년대 노동자 계급의 사회통합력을 재구성함으로써 천리마의 정체성을 1990년대에도 되살리려는 북한사회의 정치이념을 구체화하고 있다.
   그러나 1990년대 되살려진 용해공은 강도 높은 노동력과 전문성을 지닌 노동자의 이미지에 또 다른 의미가 덧붙여져 대표 노동자의 이상적 이미지를 가질 수 있게 된다. 『민족과 운명』 로동계급 편의 주인공인 강태관은 ‘쇳물철학'의 주체가 됨으로써 1990년대의 진정한 용해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쇳물철학!
  그 어떤 형태의 파철이라도 일단 전기로에 들어가면 하나의 붉은 쇳물이 되는 것과 마찬가지로 민족의 그 어떤 성원도 노동계급의 품 속에 들면, 그 모양 외에 달리 될 수 없다는 것이 노인의 소위 인생철학인 것이다.

  “상대해보니 시시해요. 주대도 없구 신념도 없어요. 아버지 덕분으로 대학은 졸업했지만 제 손으로 제 운명을 개척할 사람이 못돼요. 미모에 반해가지고 살겠다는 그런 사람과는 억만금을 준대도 싫어요. 참말 시시해서… 글쎄 자기와 결혼하면 아버지를 통해서 나를 가열공을 안 시키고 외화벌이 기관이나 다른 데로 옮겨주겠다지 않아요. 그래서 다시는 찾지 말라고 탁 쏘아주고 돌아섰어요… 아버지 어머니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내 이제 진짜 훌륭한 남자를 골라넬테니 두고보세요.”

  일과가 끝난 현장 안은 그지없이 을씨년스러웠다. 벌건 쇳덩어리들을 파헤쳐내고 남은 흑연과 탄가루만이 그득하게 현장바닥을 메웠다. 침침한 형광등 불빛 아래로 회색의 분진들이 빈 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었다. 그리고 현장 한 귀퉁이 용광로 근처에서는 퇴근을 서두르는 사람들이 목욕을 끝내고 머리를 말리고 있었다.
  천씨는 머리를 솎아주다 말고 필시 오늘 대포 한잔 걸게 해야할 사람들 너머로 침침한 공간을 응시했다. 하루종일 사람들의 코와 입속으로 들락날락했던 탄가루들, 저것들을 들이마실 때마다 침냄새 가래냄새가 나지 않는 게 이상하지. 천씨는 얼른 고개를 돌렸다.

- 아시아 아프리카는 서구중심이 가져온 한계에 대한 대안이 될 수 있을 것
- 작가에게 제1의 조국은 언어. 작가들이 문화적 종(언어)의 소멸을 막는 일에 적극 나서야

  아시아 아프리카 작가들이 25년 가까운 시공간을 넘어 다시 만났다. 2007년 11월 8일~11일 전주에서 개최된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페스티벌(AALF)에는 아시아 아프리카 41개국 80여명과 한국 250여 명 등 300여 명의 작가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1980년대 중반까지 아시아.아프리카.라틴아메리카작가회의라는 틀로 제3세계 문학운동을 벌였던 전통을 새롭게 복원한 작가들은 11월 9일부터 11일까지 사흘 동안 전북대 진수당에서 디아스포라, 언어, 여성, 평화, 분쟁지역의 작가들이란 주제별 심층토론을 전개했다. 그중 2분과 <소멸위기의 언어를 위하여>라는 주제토론은 국립국어원과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가 후원한 행사로 문학(작가)과 언어의 관계를 통해 현재의 세계현실과 인류의 내면을 응시하는 깊이 있는 논의가 전개되었다는 평가를 받았다.
  총론발제를 한 고인환(문학평론가)은 <언어는 작가의 집이다>라는 주

  밤뒤를 보며 쪼그리고 앉았으려면, 앞집 감나무 위에 까치 둥우리가 무섭고, 제 그림자가 움직여도 무서웠다. 퍽 추운 밤이었다. 할머니만 자꾸 부르고, 할머니가 자꾸 대답하셔야 하였고, 할머니가 딴 데를 보지나 아니하시나 하고, 걱정이었다.
  아이들 밤뒤 보는 데는 닭 보고 묵은세배를 하면 낫는다고, 닭 보고 절을 하라고 하셨다. 그렇게 괴로운 일도 아니었고, 부끄러워 참기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둥우리 안에 닭도 절을 받고, 꼬르르 꼬르르 소리를 하였다.
  별똥을 먹으면 오래 오래 산다는 것이었다. 별똥을 주워 왔다는 사람이 있었다. 그날 밤에도 별똥이 찌익 화살처럼 떨어졌다. 아저씨가 한 번 메추라기를 산 채로 훔켜잡아 온, 뒷산 솔포대기 속으로 분명 바로 떨어졌었다.

-정지용의 산문 「별똥이 떨어진 곳」

  짧은 글 절반을 얻어다가 메우니 면목이 없습니다. 평소 제가 옆에 두고 즐겨 감상하는 산문입니다. 이 글이 영어로 옮겨진다 하니 앞자리에 앉힌 글이 어떻게 옮겨질지, 외국 손님들에게는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자못 궁금해집니다. 제가 저 산문을 외국 손님들과 나눌 생각이라고 하였더니 친구가 손사래를 쳤습니다. 그이들이 당신을 되게 글 못 쓰는 사람으로 여기리라는 거였습니다.
  제가 저 산문을 좋아하는 까닭은 우리말을 참 잘 빼입은 문장을 가지고 있어서입니다. 이 산문은 밤에 똥을 누는 습관이 있는 아이에 얽힌 이야기입니다. 옛사람들은 아침 배변을 권장하고 밤 배면을 금기시했습니다. 아침 배변이 건강에 이롭다는 근거에서 그랬을까요? 아니면 전깃불 없는 시절에 바깥출입을 삼가느라 그랬을까요? 뒤쪽에 장수(長壽)에 대한 대목이 나오는 걸 보면 자연생리를 좇는 금기였으리라 여겨집니다. 제가 어린 시절에도 어른들은 밤뒤 보는 일을 경계하였습니다. 이 금기 모티브는 방영웅의 유명한 소설 『분례기』에서 파국의 실마리로 작용하였습니다.
   할머니를 대동한 아이가 마당 한 편에 있는 화장실에서 무서워하는 풍경이 눈에 선합니다. 밤뒤 보는 습관도 병이어서 닭에게 절을 하면 낫는다고 할머니가 일렀던 모양입니다. 실제로 그런 방책이 있었는지, 손자가 귀찮아서 할머니가 지어낸 이야기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닭에게 세배를 하는 모습이 우스꽝스러우면서도 그 공간에서는 그럴듯해 보입니다. 별똥을 주워다 먹으면 장수한다는 허황된 말도 그지없이 신선합니다. 마치 별똥을 누는 아이의 이야기인 양 신비롭기까지 합니다.
   이 소박한 산문은 근대화 이전의 우리네 삶의 풍경을 고즈넉하게 그려내고 있습니다. 자연의 일부로 살아가는 사람들의 성정도 잘 드러나 있습니다. 몇 문장이 끌어다 놓은 세계는 풍요롭습니다.
  그 세계를 불러오는 문장에 감탄을 금할 수 없습니다. 이 문장이야말로 우리말을 잘 부린 문장이라 생각합니다. 한 문장에 세 개의 문장이 포개지기도 하고, 주어가 뒤섞인 문장이 나란히 오기도 합니다. 그러면서도 더없이 자연스럽고 유장하고 음악성마저 출중합니다. 편안한 옷을 입은 듯, 입맛에 길든 음식을 먹은 듯합니다. 미의식이 충만한 문장들입니다. 요새는 이런 문장을 부릴 줄 아는 사람이 드뭅니다. 외래어가 없는 순우리말을 쓴다고 하여 우리말 문장이 되는 건 아닙니다. 우리말 문장은 체계가 다르고, 리듬이 다르고, 무엇보다도 말이 거느린 세계가 다릅니다.
  작가에게 미의식은 언어에서 나옵니다. 언어에서 발현되고 언어로 표현됩니다. 작가는 언어의 바다에 외바늘 낚시를 드리우고 바다를 감지하는 존재입니다. 문학의 언어는 의사를 전달하는 도구적 기능에만 머무르지 않습니다. 작가에게 언어란 인간 존재의 일부분으로 격상됩니다. 모국어를 가진 작가는 단지 혈연적 친밀성만으로 말을 다루지 않습니다. 그들은 모국어가 갖는 색깔과 맛, 그리고 그 언어의 사회적 환기력까지도 예민하게 감지하여 사용하려고 애쓰는 존재들입니다.

* 이 원고는 지난 11월 8일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 행사 중 겨레말큰사전이 주관한 세미나 <소멸 위기의 언어를 위하여>에서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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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정지용(1902 ~ 1950?) 일제시대 시인. 1950년 한국전쟁 당시 북한으로 납치되어 그의 작품은 1987년 말까지 한국에서는 출판될 수 없었다. 시집으로 『지용시집』(1935)과 『지용시선』(1946) 두 권의 시집이 있었다.

* 이 원고는 지난 11월 8일 <아시아 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 행사 중 겨레말큰사전이 주관한 세미나 <소멸 위기의 언어를 위하여>에서 발표되었던 것입니다.

  지난해 북녘 땅을 처음으로 밟았다. 취재차 금강산에 간 것이었다. 그때가 11월 24일이었으니, 딱 1년 전이다. 버스를 타고 7시간을 가면서 쿵쾅거렸던 심장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그렇게 부푼 기대를 안고 찾은 금강산에서 북녘 해설원(안내원)에게 들은 저 말을 생각하면 피식 웃음이 절로 난다.

  물론 들을 당시에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었다. 주변에 사람이 많기도 했었지만 비슷한 나이 또래의 남성에게 그렇게 심한(?) 말을 들으니 마음이 언짢은 정도가 아니라 심하게 상했던 것이다. ‘성질'이 ‘나쁘다' 정도도 아니고 그보다 훨씬 어감이 강한 ‘고약하다'니 그렇지 않겠는.

  그 해설원을 만난 곳은 금강산에서 구룡연 코스로 가는 초입, 금강문에서였다. 금강산 돌대문 중 가장 크다는 그 문 앞에서 그는 금강문과 함께 금강문을 등지고 멀리 산봉우리를 바라보면 보이는 ‘처벌 받는 토끼' 바위에 대한 전설을 일행들에게 열심히 설명하고 있었다.

  금강문에서 구룡연에 이르는 길에 대해 잠시 설명한 해설원은 산등성의 바위를 가리키며 “저기 저 바위 보이십니까? 뭐 같이 생겼습니까?”라고 평양말로 물었다. 그러자 사람들은 그 북녘 해설원이 신기한지 해설원과 산등성 바위를 번갈아 쳐다보며 ‘토끼'에서부터 ‘거북이', ‘자라', ‘사자'까지 갖가지 동물 이름을 대며 즐거워했다. 답은 ‘토끼'였다.

  그가 “저것은 자랑등을 한 토끼임네다” 하자 사람들은 바위를 다시 한 번 올려다보며 동감의 표시로 ‘아'하고 입을 벌렸다. 그 틈을 이용해 해설자는 “제가 저 바위에 걸친 재미난 이야기 하나 해드릴까요?”하는데, 일행은 물론 지나가선 관광객까지 발길을 멈추고 해설원 앞으로 몰려왔다. 젊은 청년이 사람을 다루는 솜씨가 예사가 아니었다.

  그가 들려준 ‘처벌 받은 토끼'에 대한 전설은 이러했다. 달에서 사는 토기가 하늘에서 내려다 본 금강산이 너무 아름다워 옥황상제에게 금강산에 한번만 다녀오게 해달라고 간청을 했던 것이다. 토끼의 청이 하도 간곡해 옥황상제가 토끼를 보내주는데 대신 보름달이 뜰 때까지 돌아오라고 명을 했다.

   토끼가 금강산에 내려와 보니 과연 절경이었다. 그 절경에 빠져 토끼는 돌아가는 것을 잊고 여기 저기 뛰어다녔는데, 보름달이 뜰 때까지도 토끼가 돌아오지 않자 옥황상제가 토끼에게 자라의 등껍질을 벌로 내리고 하늘길을 막아버렸다. 그래서 하늘로 가지 못한 토끼가 저렇게 산등성에서 바위가 됐다는 것이다.

   바위에 얽힌 전설이라는 게 대게 알고 보면 누군가의 말을 듣지 않아 바위로 변한 경우가 많은데, 그렇게 보면 그렇게 특이한 이야기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무엇이 그리 신나는지 배꼽을 잡고 웃었다. 아마 그 북녘 해설원의 말솜씨가 제법 좋았던 모양이다.

   그때였다. 나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기 위해 기자정신을 발휘해 카메라를 들었다. 그런데 대뜸 그 해설원이 굳은 표정으로 “사진 찍지 마시라요”하는 것이었다. 사진 구도상 그가 나왔기 때문이었는데, 그런 모습을 담으려면 어쩔 수 없는 각도였다. 그런데도 계속 “아니 사진 찍지 말라는데 거 왜 말을 안 듣습네까?”하며 언성을 높이는 것이었다.

   그의 언성이 높아지자 사람들은 나를 주목했고, 그래서 명색이 기자신분에 지고는 싶지 않아 “저는 기자인데, 취재하고 있는 겁네다”하고 평양말을 흉내 내며 받아 쳤다. 그러자 그가 지금까지도 잊어지지 않고 가슴에 콕 맺혀있는 저 말을 툭 던졌던 것이다. “남녘 기자들은 다 그렇게 예의가 없습네까?”하는 말과 함께 말이다.

   순간 어찌나 당황했는지 폭포가 얼어 얼음줄기를 만들 정도로 추운 날씨였는데도 볼이 화끈 달아올랐다. 사람들이 일제히 주목하고 있는 데야 어쩔 수 없었다. 사진에 담기기 싫다는 사람을 기자랍시고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나는 카메라를 내려놨고 일은 그렇게 정리됐다. 일행들은 재미난 해프닝쯤으로 생각하고 금강문을 통과해 구룡연을 올랐고 나는 잠시 그 자리에 얼어 있었다.

   사실 얼어 있었다기보다는 뭔가 따질 것이 있다고 생각하고 남아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실재로 일행들이 저만치 사라지자 그 해설원에게 “아니 무슨 말을 그렇게 합니까. 고약하다니요”하고 따져 물었다. 그랬더니 좀 전에 일행들 앞에서 면박을 주던 그 당당함은 사라지고 쑥스러운 듯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거 미안하게 됐습네다”하는 것이었다.

   싸움을 걸어놓고 상대가 일어서자 피하는 격이었다. 내가 황당한 표정을 짓자 그는 자신의 태도에 대해 사과하면서 그렇게 된 상황을 설명했다. 해설원들은 관광객들과 사진을 찍는 것이 좀 힘들다는 것이었다. 원칙적으로 금지돼 있는 것은 아니지만 많은 북녘 인민들이 굶주리고 힘들게 살고 있는데 관광 온 남녘 사람들과 웃으며 사진을 찍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의 듣고 보니 이해가 안 되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해설원의 깊은 마음도 모르고 내 기분만 생각했던 것이 미안해 고개가 수그러졌다. 취재차 금강산을 온 것이었지만 나 역시 관광객의 일부였던 것이다. 말로만 듣던 북녘 사람들의 어려운 삶이 눈앞을 스치고 지나가면서 관광객의 하나로 서 있는 나 자신이 초라하게 느껴졌다.

   물론 좀 다른 문제이기는 하지만, 북녘 사람들을 우리와 같은 민족이라고, 분단의 역사를 극복하고 꼭 만나야 한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면서 그들의 삶의 문제에 대해서는 크게 고민하지도, 마음 쓰지도 않았던 내 자신에 대한 회의였던 것이다.

  그 해설원의 이름을 기억하고 있다. 명치 앞에 걸려 있던 명찰에 씌어있던 이름 세 글자, 박춘국. 그렇게 나는 그와 화해를 하고 구룡연에 올랐고, 내려오는 길에 다시 그를 만났다. 그는 환하게 웃으며 “다시 만납시다”하고 큰 소리로 말했다. 가슴이 뭉글뭉글해져 바로 답하지 못했던 나는 뒤돌아보며 큰 소리로 답했다. “그래요, 꼭 다시 만나요”

  스무 살에 어버이 품으로부터 해방되었던 나는, 대학에 다니고 군대를 갔다 오고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1년여 한 뒤에, 다시금 어버이 품으로 기어드는 꼬락서니가 되었다. 나는 어머니가 아버지 모르게 마련해준 이백만 원으로-어머니가 당신의 치아를 심으려고 수년간 모았던 돈이었다-서울에 자취방을 잡았었는데, 어찌하다가 보증금까지 다 날리고, 친구 전셋집에 얹혀살고 있었다.
  아무리 아이엠에프라지만 까짓 아르바이트 자리 하나 못 구하겠어, 정 안 되면 대학교 때처럼 노가다라도 하지 뭐, 자신 만만했으나, 아르바이트 자리는 하늘에 별따기였고, 노가다 자리는 나 같은 육체노동 젬병에까지 차례가 오지 않았다. 아이엠에프를 너무 우습게 생각하고 있던 나는, 마지막 승부수를 띄었다. 신춘문예에 소설을 투고한 것이다. 상금이 삼백만원. 당선만 된다면 방도 다시 잡을 수 있고, 작가로 먹고살 수 있다! 그러나 대학 다닐 때 5천 매의 습작을 하고도 등단하지 못했던 나는, 그해 겨울의 투고에서도 당연히 실패했다.
  나는 비참한 심경으로 귀향하여, 농사짓고 소 키우는 아버지에게 의탁하였다. 그렇게 농촌 백수로 살아가던 나에게, 어느 날 두툼한 편지 한 통이 왔다. ‘너구리'라는 별명을 가진 후배에게서. 그녀에게 왜 너구리라는 별명이 붙은 것일까? 너구리 라면을 좋아해서? 성격이 너구리 같아서? 그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녀는 한 보름 동안, 저녁 늦게 와서 새벽이 될 때까지 내 방에서 머물렀다. 내가 특별히 놀아준 건 아니어서, 자기 혼자 책보면서 뒹굴뒹굴했다. 책상에서 열나게 자판을 두드리다가 돌아다보면 새근새근 잠들어 있고는 했다. 나는 그녀가 나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달뜨고는 했다. 내 친구 하나가 그녀에게 “네가 그러면 누군들 오해하지 않겠냐? 걔를 좋아하는 게 아니라면 그러지 마라! 걔가 잘못 생각해서 어떻게 하기라도 하면 어쩌려고 그러냐?”라고 했던 모양이다. 이후로 너구리는 내 방에 오지 않았다. 나는 친구에게 미안한 얘기지만, 그 이유로 친구를 좀 원망했다. 그녀가 나를 좋아하든 하지 않든 나이 어린 후배와 밤을 지새우는 일이 무척이나 달콤했던 것인데, 양치기 목동과 아가씨 나오는 동화 같은 ‘별'의 세계가 가뭇없이 날아가버린 것이다.
  암튼 그 이후로 너구리와 소원해질 수밖에 없었다. 여럿 있는데서 마주치기만 했을 뿐이다. 그런 너구리에게서 편지가 온 것이다. 느닷없이. 사실 편지 내용이 지금은 기억나질 않는다. 다만 확실한 것은 너구리는 자기가 쓴 시 열 편인가를 동봉했었다는 것이다. 시를 보고 평해달라는 부탁말도 적혀 있었던 것 같다. 나는 스물여섯 살까지 시집 꽤나 읽고 오백 편의 시를 쓴 바가 있기는 한데 어느 날인가 다 불태워버리고는 시하고는 담쌓고 살고 있었다.
  나는 다시 시를 열심히 공부하던 시절로 돌아가, 너구리의 시를 꼼꼼히 읽었다. 그런데 너구리 시에는 특징이 하나 있었다. 의식적으로 찾아 쓴 순우리말이 유난히 많았다. 나는 어휘량을 늘려보려고 국어사전의 순우리말을 하루에 열 개씩 찾아 외운다든가, 이문구 선생의 소설처럼 순우리말 천지인 텍스트를 작정하고 공부한다든가 하는 식으로 노력해본 바가 있었던 터라, 너구리의 시에 산재한 순우리말들이 공부에 의한 말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래서 너구리가 사용한 순우리말 시어들이 낯설지는 않았는데, 그래도 내가 전혀 모르겠는 말도 더러 있었다. 특히 ‘비릊은'이라는 시어는 진짜 처음 보는 말이었다. 뭐, 이런 이상한 단어가 다 있나, 이거 오타 아냐, 궁싯대면서 사전을 찾아보니, ‘비릊다'는 ‘임부가 진통(陣痛)을 일으키며 아이를 낳으려는 기미를 보이다'라고 되어 있었다. 그 ‘비릊다'라는 말이 나에게 엄청난 의미로 다가왔다. 왜 그랬을까? 마침 해산 예정일을 넘긴 외양간의 암소가 비명을 내지르고 있었기 때문에? 만약에 내가 나중에 작가가 되는데 성공할 수만 있다면, 스물여덟 나이게 농사짓는 아버지에게 빌붙어서 사는 지금의 상황이 ‘비릊는' 시간이었다고 말할 수 있지 않겠나 하는 생각 때문에? 아무튼 그날 새벽에, 그러니까 내가 감상평을 빙자해서 너구리에게 편지를 쓰고 있던 새벽에, 암소는 두어 시간을 비릊은 끝에 새끼를 낳았다. 내가 외양간에 갔을 때 아버지는 막 태어난 송아지를 마른 헝겊으로 닦아내고 있었다.
  일주일에 걸쳐 쓴 답장편지는, 점점 편지라고 할 수 없는 것이 되어갔다. 너구리가 보내 준 시 열 편에 대해 조목조목 감상평을 적고, 우리의 다정했던 밤에 대한 회고를 곁들이고, 나의 시골 생활을 적고, 나의 문학적 오기에 대해서 토로하고, 너구리 너도 꼭 좋은 시를 비릊으라고 조언하고, 그랬더니 시나브로 길어졌고, 장장 3백 매에 달하는, 소설이 되고 말았다. 나는 그 소설의 제목을 ‘시를 비릊는 너구리에게'라고 정했다. 물론 그 소설이 되고 만 편지를 나는 너구리에게 붙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 소설의 운명이 기구했다. 얼마 뒤 컴퓨터를 포맷하게 되었는데, 다른 습작원고 파일들은 다 백업을 했건만, 엉뚱한 폴더에 저장이 되어 있었는지 그 소설은 백업을 하지 못했다. 깨끗이 사라져 버린 것이다. 하여간 ‘비릊다'라는 말은, 내가 그 말을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의 오기를 표상하는, 내 인생에서 가장 중대한 낱말이 되었다. 나는 소설가가 되기 위해서 이렇게 비릊는 세월을 보내고 있는 것이다. 소설가가 된 다음에는 좋은 책을 내기 위해서 비릊는 것이고, 첫 책을 낸 뒤부터는 정말로 좋은 소설을 쓰기 위해서 비릊는 것이고, 소설가 생활 5년차에는 소설가로 산다는 자체가 비릊는 것이고, 소설가 10년차인 지금에는 소설가로서 좀 더 오래도록 살아남기 위해서 비릊는 것이라는 식으로, 끝없이 비릊다는 말로 나의 비루한 나날을 꾸미려고 했다.
   나아가 남에게도 마구 사용하고 있다. 연장자들에게는 사용할 수 없는 말이겠지만, 후배나 학생들에게는 “좋은 시(소설) 비릊기를!”, “두 사람이 아름다운 인연 비릊기를!”, “소원하는 바 꼭 비릊기를!” 하는 식으로 덕담을 해주는 것이다. 그런데 내게 ‘비릊다'를 전해준 너구리는 어디에서 어떻게 살고 있을까. 그녀의 너구리 닮은 얼굴이 떠오른다. 그녀가 어디서 무엇을 하든 뜻하는 바대로 넉넉히 비릊기를 바래본다

제11차 공동편찬위원회 회의가 중국 심양에서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는 집필에 대한 세부 지침 논의, 새 어휘 500개 교환 및 새
어휘 조사 관련 세부 지침을 논의, 단일어문규범 논의와 함께 전자 사전 개발 방식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졌다.

사업회는 전주에서 개최된 아시아아프리카 문학 페스티벌의 한 행사로 국내외 작가들을 대상으로 언어 관련 세미나 “소멸 위기의
언어를 위하여”를 개최하였다. 이 세미나에는 루이스 응코시(남아공)와 아킴 라씨시(나이지리아)등과 이상규(국립국어원장), 권재
일(겨레말큰사전 단일어문규범위원장), 최두석(시인), 전성태(소설가) 등이 발표자로 참가하였다.

11월 16일 신라대학교 국어국문학과 학생 42명이 김인균 교수의 인솔로 겨레말큰사전 사업회를 방문하였다. 사업회에 도착한 학생
들은 사업회 운영과 겨레말큰사전 편찬 과정과 방법에 대한 설명을 들었다.

제22차 남측편찬위원회 회의가 공덕동 사업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에서는 12차 공동편찬위원회 회의(금강산) 주제인 뜻
풀이 속구조와 단일어문규범 논의, 새 어휘 선정 지침, 1차 올림말 선별 완료 결과에 대해서 편찬위원들과 논의를 가졌다.

· 일시 : 2007년 12월 7일(금)~10일(월)
· 장소 : 금강산

금강산에서 제12차 공동편찬위원회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번 회의는 1차 올림말 선별 결과와 관용구, 속담 선정 및 계열어휘 처리 방식에 대해 논의 되었으며, 집필 세부 지침과 새 어휘 7차분(500개) 교환 및 새 어휘 조사 과정에서 ‘검토'로 처리한 새 어휘 1,000 개에 대해 논의하였다. 또한 ‘형태 표기', ‘사이시옷', ‘외래어 표기'와 전자 사전 및 집필 프로그램, 폰트 개발에 대한 논의 등이 이루어졌다.

2007년 한글학회 전국 국어학 학술 발표 대회가 경북대학교 우당교육관에서 개최되었다. 이번 학술 발표 대회에서는 이돈주(전남대
명예교수) ‘한국 한자음의 몇 가지 특성에 대하여’라는 주제의 특강과 임지룡(경북대)의 ‘시점의 역전 현상’, 권재일(서울대)
‘현대 국어와 중앙아시아 고려말의 격조사 대조 분석’이란 주제의 발표가 이어졌다. 또한 고동호(전북대)의 ‘고려말의 몇가지
음운 현상’과 송창선(대구한의대)의 ‘이다’와 ‘아니다’의 관련성을 주제로 한 발표가 이어졌다.

한겨레말글연구소는 '남북 어문규범 단일화와 말글 통합' 주제로 학술발표회를 열었다.
권재일(서울대 교수)의 ‘남북 어문규범 단일화 현황과 과제’를 발표하고, 이승재(국어원 연구관)이 토론을 진행했다. 특히 이번
학술발표회에서 남북 학자들은 “자모 차례, 사이시옷, 품사 이름, 띄어쓰기, 형태표기 등 여덟 가지 주요 분야에서 폭넓은 의논 끝
에 대체적인 얼개를 잡았다”고 밝혔다. 이밖에도 ‘남북 외래어 표기 차이와 단일화 모색’이란 주제로 최호철(고려대 교수), 한용
운(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김정수(한양대 교수) 등의 발표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