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큰사전 2005-2008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을 시작한지 3주년이 되었다. 지난 3년 동안 사업회 출범 및 법안통과, 사무실 개소식 등 많은 일들이 있었다. 올해는 본집필에 착수하기로 북측과 합의함에 따라 편찬실 직제를
6개 부에서 3개팀으로 조정하였다. 3개팀으로는 ‘올림말팀’, ‘집필팀’, ‘새어휘팀’으로 운영하며 원활한 편찬 작업을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다.


    1. 2005년-2007년 사업 내역

■ 2005년 주요 사업 내역 (*편찬사업회 출범 이전)
* 2005년은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준비 기간이었다. 남북공동편찬위원회 결성식(2005. 02. 19) 이후 우선적으로 사전편찬을 위한 ‘남북공동편찬위원회’와 ‘단일어문규범작성위원회’를 조직하였다. 4차례의 남북 회의를 통하여 ‘남북공동편찬위원회’와 ‘단일어문규범작성위원회’에서는 ‘남북공동편찬요강’ 과 ‘단일어문규범 작성요강’을 마련하여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토대를 마련하였다. 아울러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편찬 일정’을 남과 북이 각각 작성하여 교환하였다.

- 남북공동편찬위원회 회의 개최(1차-4차)
-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결성식 개최(2005. 02. 19)
-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남북공동편찬요강’ 작성(2005. 07. 10)
-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사업 보고대회 개최(2005. 08.15)
- 남북 어문 규범 단일화를 위한 ‘단일어문규범작성위원회’ 조직(2005. 11. 11)
-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위한 ‘단일어문규범작성요강’ 작성(2005. 11. 24)

■ 2006년 주요 사업 내역
* 2006년 3월에 ‘겨레말큰사전남측편찬사업회’가 출범하면서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이 본궤도에 오르게 되었다. 2005년에 남과 북이 합의한 ‘남북공동편찬요강’과 ‘단일어문규범작성요강’을 바탕으로 ≪겨레말큰사전≫에 수록할 올림말 선별 작업을 진행하였고, 이 올림말을 집필하기 위한 집필 지침을 작성하였다. 아울러 남과 북의 현행 사전에 수록되지 못한 새 어휘를 조사하기 위한 지침을 작성하여 새 어휘 조사 사업도 진행하였다. 새 어휘는 지금까지의 대사전에 수록되지 않은 것으로, 겨레말을 풍성하게 하는 데에 이바지할 것이다.

- 남북공동편찬위원회 회의 개최(5차-8차)
- 국내 학술 회의 개최(2006. 7. 5)
- 전문가 초청 회의 개최(2006. 11. 30)
- 지역어조사 설명회 개최(2006. 6. 10)
- ≪겨레말큰사전≫의 올림말 선정을 위한 어휘 구분 기준 작성
-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의‘ㄱ~ㅅ’부분 올림말 선별(410,000여 어휘)
- 기존 사전의 뜻풀이 지침 분석 및 집필 지침 작성
- 문헌어 및 지역어 조사 지침 작성
- 문헌 어휘 조사(용역) 및 정리 : 10,303개 어휘를 조사하여 3,970개 어휘 확정
- 말뭉치 구축(용역): 45,607,624자 입력 완료
- 지역어 및 현장 어휘 조사(용역) 및 정리 : 16,931개 어휘를 조사하여 7,526개 어휘
  확정
- 해외 지역어 조사(용역) 및 정리 : 1,682 개 어휘를 조사하여 800개 어휘 확정
- 세밀화 작성(용역) : 510점
-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의 통합 파일 구성
- 올림말 선별 작업을 전산 처리하기 위한 작업 매뉴얼 작성
- 사전카드 검색 프로그램 개발
- 구축된 말뭉치의 정리 및 검색 프로그램 개발
- 단일 어문 규범 작성을 위한 논의 진행(‘자모의 배열순서/사이시옷/띄어쓰기/외래어   표기/언어학 용어/형태 표기/두음법칙’ 관련 논의)

■ 2007년 주요 사업 내역
* 2007년에는 그동안 남과 북이 합의한 편찬 일정에 따라 기존 사전의 올림말을 선별하는 작업을 완료하였고, 2008년부터 시작될 본집필을 위한 집필 지침을 합의하는 데 주력하였다. 또한 남과 북에서 새 어휘 조사 작업도 계속 진행하여 그동안 사전에 수록되지 못했던 1만여 개의 새 어휘를 확보하였다.

- 남북공동편찬위원회 회의 개최(9차-12차)
-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의‘ㅈ~ㅎ’부분 올림말 선별(390,000여 어휘)
- 어휘 구분 기준(Ⅱ) 및 기타 지침 작성
- 집필 지침 작성
- 1차(100개 항목) 및 2차(200개 항목) 시범 집필
- 문헌 어휘 조사(용역) 및 정리 : 14,420개 어휘를 조사하여 4,268개 어휘 확정
- 말뭉치 구축 : 24,568,742자 입력 완료
- 지역어 및 현장 어휘 조사(용역) 및 정리 : 9,872개 어휘를 조사하여 5,341개 어휘
  확정
- 해외 지역어 조사(용역) 및 정리 : 834 개 어휘를 조사하여 700개 어휘 확정
- 세밀화 작성(용역) : 300점
- 원고 입력기의 항목 규정 및 자료 교환 형식 결정
- 올림말 선정을 위한 사전DB검색기 개발
- 문헌어휘 및 현장어휘 조사를 위한 새 어휘 입력 시스템 개발
- 문헌어휘 조사를 위한 용례 색인 프로그램 개발
- 단일 어문 규범 작성을 위한 논의 진행(‘자모의 배열순서/띄어쓰기/외래어 표기/언어
  학 용어/형태 표기/두음법칙’ 관련 논의)

 

    2. 2008년 사업 계획

■ 올림말 관련 작업 계획
- 올림말 목록 정비
- 계열어휘 목록 정리 및 처리 기준 수립
- 남과 북의 선별 결과에 차이가 나는 어휘 정리와 처리 기준 수립
- 올림말 심사 방식과 일정에 대한 남측안 및 합의안 작성
- 관용구와 속담 목록의 심사 및 확정
- 미등재 관용구와 속담의 조사
- 집필 과정에서 생겨난 문제 어휘 심사
- 단일어문 규범에 따라 달라지는 올림말 처리
- 미등재어 및 신조어 심사

■ 집필 관련 작업 계획
가) 올림말 집필 작업
- ≪겨레말큰사전≫의 집필 지침 완성
- 남과 북이 합의하여 선별한 올림말에 대한 집필 : 분기당 14,400 개 올림말 집필 예정
- 북측 원고 교정ㆍ교열

나) 단일어문규범작성
- ‘단일어문규범작성위원회’의 회의 자료 정리 및 회의록 작성
- 단일어문규범 작성을 위한 자료·수집 정리 및 연구 활동
- 합의하지 못한 사항(특히 ‘두음법칙, 사이시옷’)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논의 및 단일
  화 작업
- 사전 뜻풀이와 관련한 세부 문법 용어 단일안 작성
- ‘형태 표기’ 관련 새 논의 자료(제4차분~) 발굴·정리 및 단일안 작성
- ‘외래어 표기’에 대한 단일한 작성
- ‘문장 부호’의 기능(용법)에 대한 단일안 작성
- 띄어쓰기 단일안에 따른 실례 자료 작성
- 어문규범 관련 남북 논의 사항 정리

■ 새어휘 조사 관련 작업 계획
가) 문헌 어휘 조사
- 새 어휘 조사(용역 사업)
- 조사된 남북의 새 어휘를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어휘 체계에 맞도록 정비
- 새 어휘 집필
- 사전 편찬용 말뭉치 확보 및 관리
- 뜻풀이 된 새 어휘의 교정 및 교열

나) 지역어 및 현장어휘 조사
- 새 어휘 조사 사업(용역 사업)
- 용례 조사: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 수록된 방언형의 용례 조사
- 분포 지역 조사: 조사된 새 어휘의 정확한 지리적 분포를 확인하기 위한 조사
- 새 어휘 집필
- 뜻풀이 된 새 어휘의 교정 및 교열

      ※ 자료정리: 겨레말큰사전 편찬부실장 한용운
 
겨레말살이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면서

조재수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편찬실장 )

조재수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편찬실장 )   ‘겨레말큰사전 남북 공동 편찬 위원회’가 결성된 지 올해로 3년이다. 2005년 2월 20일 금강산에서 결성하여, 2006년 1월에 ‘겨레말큰사전 남북 공동 편찬 사업회’가 출범하고, 2007년 4월에 ‘겨레말큰사전 남북 공동 편찬 사업회법’이 공포되었다.
  <겨레말큰사전>은 남과 북의 사전 편찬학자들이 분단 60년의 우리말을 정리하여 엮고자 하는 큰 사전이다. 돌이켜보면 이 편찬 사업은 일제 강점기였던 1930년대에 선배 학자들이 힘 모아 일구었던 우리말의 연구와 통일의 대업을 잇는 일이기도 하다. 이 일을 하게 된 남과 북의 편찬 요원들은 오랜 세월 거두지 못한 우리말의 수집과 정리로 겨레의 화합과 통일에 이바지하려고 한다. 흩어진 남과 북의 언어를 현실적이고 개별적인 바탕과 이론적이고 체계적인 바탕을 함께 헤아려 겨레말의 새 틀을 마련하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의 지혜와 도움이 필요한 일이다.
  이 사전은 편찬 기간 7년에 올림말 30만 이상의 뜻풀이 사전으로 계획되었다. 지난 2년 동안은 주로 편찬을 위한 준비를 하였다. 사전에 실을 말(‘올림말’)을 모으고, 편찬 지침을 마련하며, 남북 단일 어문 규범에 관한 논의를 해왔다.
  올림말은 우선 기존 사전에서 선정할 어휘와 새로 거두어 올릴 어휘(‘새 어휘’)로 구성된다. 새 어휘는 남과 북의 기존 사전에 실리지 않은 지역어와 현장 어휘, 그리고 문헌 속의 어휘들을 말한다. 지역어는 나라 안 지역어와 나라 밖에서 동포들이 써오는 우리말을 조사하고, 문헌 어휘는 20세기를 전후하여 출간된 문예 작품 등에서 거두어 올리기로 하였다. 일차로 기존 사전에서 30만이 넘는 말을 선정하였다. 여기에 새 어휘를 더하면 전체 올림말의 목표량 30만보다 훨씬 많아진다. 이를 다시 검토하여 토박이말은 늘려 싣되, 묵은 한자어와 지나친 전문 용어는 줄여 싣는 방침으로 수량을 조정하는 것이 좋을 듯싶다.
  사전의 속구조를 이룰 편찬 지침은 큰 줄거리가 정하여졌고, 세부 사항은 각각의 시범 집필 원고를 서로 번갈아 점검하면서 보충해 갈 것이다. 오는 2월 19일의 13차 남북 편찬회의에는 지난해의 1차 시범 집필 원고에 관해 의견을 나누고, 또한 2차 시범 집필 원고를 교환할 예정이다.
  남북 단일 어문 규범에 관한 논의는 ‘자모 배열 순서와 이름’, 띄어쓰기’, ‘사이시옷, ‘두음법칙’, ‘문법 형태와 개별 단어의 적기’, ‘문법 용어’, ‘외래어 적기’, ‘문장 부호’ 등에 합의를 쌓아 가고 있다. 지난 60년간 서로 달리 익혀 온 어문 규정을 단꺼번에 단일화하기란 어려운 일이다 ('단꺼번에’는 북녘에서 잘 쓰는 단어). 그래서 이 단일 어문 규범의 성격을 남북 단일 어문 규범 작성 요강에서 다음과 같이 밝혔다. 이 규범은,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목적으로 작성되는 단일 규범이며, 그러면서 단계적인 수정, 보충, 완성 과정을 거쳐 민족어 통일 규범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만큼 잠정적인 규범 초안의 성격을 지닌다고 하였다. 1930년대 조선어 학회가 <큰사전> 편찬을 위해 필요했던 일도 ‘한글 맞춤법 통일’, ‘표준말 사정’ 등이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우리 말과 글의 첫 규범이 되었던 것을 되돌아보면, 이 남북 단일 어문 규범 작성은 우리 말과 글의 재통일을 준비하는 첫걸음이라 하겠다.

  사전을 편찬하는 일은 나무를 보되 아울러 숲도 봐야 하는 일이다. 사전 편찬인은 말의 가장 작은 단위인 형태소에서부터 낱말, 말마디, 문장에 이르는 말의 짜임새와 표현을 두루 살필 줄 알아야 한다. 낱낱의 말은 저마다 독특한 형태와 뜻을 지니고 있다. 또, 말과 말은 복잡한 관계의 그물을 맺고 있기도 하다. 낱말끼리의 관련성에서, 또는 문장 속의 기능 등에서 그러하다.
  새로운 사전 편찬이란, 이미 나온 사전의 잘못과 모자라는 점을 살피어 그 잘못을 바로잡고, 또 모자라는 어휘와 풀이를 더하는 일이다. 우선 기존 사전의 올림말과 풀이 체계, 철자법, 말밑(한자, 외국어), 문법 형태 등에 바로잡아야 할 것이 없는지 꼼꼼히 살펴봐야 한다.
  한 마디로 우리말/국어 사전은 풍요 속의 빈곤이었다. 지나치게 많은 말이 실려 있는가 하면 정작 찾고자 하는 말이 없는 것도 많다. ‘국제’에 이어진 올림말은 수백 개나 된다. ‘(여느) 편지’를 가리키는 한자어로 간독, 간서, 서간, 서독, 서소, 서신, 서자, 서장, 서찰, 서척, 서통, 서한, 서함, 신서, 쌍어, 엽서, 우서, 우신, 이소, 찰한, 척간, 척독, 척서, 척소, 척소서, 척저, 척지, 척한, 편저, 필지, 필찰. 한찰 등이 실려 있다. 또 ‘저승’을 가리키는 한자어로 구원, 구유, 구천, 구천지하, 명간, 명경, 명계, 명국, 명도, 명로, 명부, 명토, 시왕청, 암명, 염라부, 유계, 유도, 유명, 유명계, 음부, 중천, 지부, 지하, 천대, 천양, 천하, 현택, 황로, 황양, 황천, 황토 등이 실려 있다. 한자어 대사전과 별 차이가 없다. 대부분 한자어 사전에 되돌려 주어도 좋을 말들이다. 우리말 사전의 올림말 선정에서 고려해야 할 대상이다. 그런가 하면 우리의 생생한 토박이말은 사전의 올림말로 넉넉하지 못하다. 지역어는 방언/사투리라 하여 두루 실리지 못하고, 문예 작품 어휘나 전통 생활 용어들은 조사가 미흡하여 제대로 실리지 못하였다. 어떤 언어 사전이고 말수가 많되 그 겨레말의 본바탕 말이 많아야 한다. 사전 편찬의 언어 자료 가운데 문학 작품의 언어와 표현은 가장 중요한 대상이다. 그래서 훌륭한 문학 작품은 좋은 사전의 밑바탕이 된다. 문학인은 사전을 가장 많이 또 효과적으로 이용하는 이들이고, 사전 편찬인은 그러한 수요에 성실한 공급자가 되어야 할 위치에 있다. 우리 사전 편찬의 실적은 부족하였다고 생각한다.
  올림말과 뜻풀이의 체계를 말하자면, 기본 올림말과 딸림 올림말이 일정하게 배열되어야 하고, 합성어와 파생어의 배열과 풀이 체계도 일목요연해야 한다. 어떤 파생어는 수량이 적다고 기본 올림말로 잡고, 어떤 파생어는 수량이 많고 번거롭다 하여 딸림 올림말로 처리한 예가 없지 않았다.
  사전은 가장 많은 글자와 낱말과 문장으로 이루어진다. 여느 책이고 교정•교열은 끝이 없는 일이다. 기존 사전의 틀린 글자 바로잡기는 물론이며 글다듬기(윤문)도 필요하다. 한글 철자법이야 통용되는 규정대로 따르면 되는 것쯤으로 생각할지 모르나 그렇지가 않다. 사전에서와 같이 수많은 말을 다루다 보면, 철자법 규정을 넘어 낱말 부류마다 적기를 바로잡아야 할 것들이 없지 않다.
  ‘계란말이’, ‘멍석말이’, ‘가로말이’, ‘안말이’가 있는데 ‘두루말이’는 아직도 ‘두루마리’로 적는 사전이 있다.
  ‘하루강아지<북>/하룻강아지<남>’는 ‘하릅송아지’와 마찬가지로 ‘하릅강아지’로 바로잡아야 할 것이다. ‘하릅’은 소, 말, 개 같은 짐승의 나이 ‘한 살’을 이르는 말이다.
  ‘치다꺼리, 뒤치다꺼리, 푸다꺼리’를 아직도 ‘치닥거리, 뒤치닥거리, 푸닥거리’로 적는 사전들이 있다.
  국악계에서 쓰는 장단 이름에 ‘중모리’, ‘자진모리’, ‘휘모리’라는 것이 있다. 이를 철자법에 맞게 ‘중몰이’, ‘잦은몰이’, ‘휘몰이’로 사전에 이끌어 놓는다면 잘못하는 짓일까?
   ‘미처, 뒤미처’는 남과 북이 일치하는데 ‘그 즉시로’의 뜻을 나타내는 ‘대미처’는 북에서 ‘대미쳐’로 잘못 적고 있다.
  북의 <조선말대사전>(1992)에 ‘길쭉하다(꽤 길다)’와 ‘길죽하다[-쭉-](좀 길다)는 뜻 표현으로 구분하고, ‘길찍하다’와 ‘길직하다[-찍-]’는 ‘길이가 좀 긴듯 싶다’로 같은 풀이를 보였다. 이 둘은 각각 소리도 같고 뜻바탕도 같은 한형태의 말로 보아, ‘-죽-’, ‘-직-’의 적기를 된소리 쪽으로 정리해야 할 대상이다.
  남녘 사전에서 ‘거칫거리다:거치적거리다’, ‘구깃거리다’, ‘머뭇거리다’, ‘흘깃거리다’를 ㅅ받침으로 적는다면, ‘문칮거리다:문치적거리다’, ‘뱌빚거리다’, ‘비빚거리다’, ‘버릊거리다’ 들도 ㅅ 받침으로 정리해야 할 것이다.
  북의 <조선말대사전>에 길이, 사이, 동안 따위가 ‘밭은 듯하다’를 나타내는 형용사 ‘바툼하다’를 처음으로 올렸다. 그러나 같은 형태 부류에 ‘앙밭다:앙바틈하다’, ‘얕다:야틈하다’가 있다. 이로 보면 ‘밭다:바툼하다’의 ‘바툼하다’는 ‘바틈하다’를 표준 적기로 해야 옳았을 것이다.
  우리말/국어 사전 편찬에서 한자어에 일일이 한자를 밝혀 주기란 큰 부담이다. ‘구타’는 ‘歐打’가 아니고 ‘毆打’라야 한다. ‘타관땅의 ‘他官’은 ‘他關’이 맞다. ‘호시탐탐’은 ‘虎視耽耽’이 아니고 ‘虎視眈眈’이라야 한다. 남녘에서는 ‘推敲’를 ‘퇴고’라 하고, 북에서는 ‘추고’라 한다.
  한자에는 정자(본자), 속자, 약자, 그리고 중국 한자와 간체자, 일본 한자, 한국 한자 등이 있다. 그러나 우리말 사전의 한자어에 국적을 제대로 밝힌 적은 없다. 국문(國文: 우리 나라 글), 대지(垈地), 덕담(德談), 전답(田畓), 처벌(處罰), 팔자(八字), 고진감래(苦盡甘來) 같은 말은 우리 한자어라 한다. 또 고유어에 취음한 한자도 있다. 이를테면, 거창(巨創), 고생(苦生), 기별(奇別), 사공(沙工), 사발(沙鉢), 수고(受苦<북>), 타작(打作), 타령(打令), 야속하다(野俗-) 같은 말을 지난날 기록에 한자로 적혔다 하여 그냥 한자어로 보는 사전이 대부분이다. <겨레말큰사전>에서도 논의 거리라 생각된다. 한글로 글자 생활을 하지 않고 소리가 같거나 비슷하면 무조건 한자로 적었던 점을 지나치지 말아야겠다.
  말의 발음도 그 변천 모습과 함께 현실의 발음을 밝혀 주는 것이 바람직하다. 남녘이나 북에서나 모음의 긴소리 현상은 점점 잃어 가고 있다.
  <큰사전>(1936~1957) 이후 아직도 문법 형태를 고쳐 보지 못한 것이 더러 있다. 몇 가지만 살펴본다.
  ‘거절 당하다’의 ‘당하다’, ‘교육 시키다’의 ‘시키다’를 <표준국어대사전>은 여전히 접미사로 다루었다. 본동사의 한 뜻갈래로 고쳐 다룬 사전들을 따라도 좋을 듯하다.
   ‘한 사람씩’, ‘한 사람에 두 개씩’, ‘조금씩 뿌리는 비’들에 쓰인 ‘씩’을 대부분의 사전에서 접미사로 다루고 있다. 그러나 '씩'이 붙는 말들을 파생어로 보기 어려우므로 보조토로 고쳐 다룰 만하다.
  ‘10원짜리, 두 개짜리, 5년짜리, 한 뼘짜리, 세 살짜리’ 같은 말에 붙어 쓰인 ‘짜리’도 그렇다. 지금까지 다루어 오는 접미사보다 의존명사(불완전명사)로 고쳐 보는 것이 좋을 듯하다.
  ‘열 명쯤’, ‘얼마쯤’, ‘이쯤 해 두자’, ‘어디쯤 가고 있을까?’에 쓰인 ‘정도’를 나타내는 ‘쯤’은 접미사, 의존명사, 토로 보는 세 해석이 있다. '쯤'을 접미사로 보면 '쯤'이 붙는 말을 모두 파생어로 봐야 하는데 그럴 수가 없다. 북의 <조선말 사전>(1962)에서는 '토'로, <조선말대사전>(1992)에서는 '불완전명사'로 다루었다. ‘씩’처럼 토로 정리하면 좋을 듯싶다.
  ‘투성이’도 만만치 않다. 아직껏 접미사로 다루어 오지만 그 쓰임이 넓어 접미사로서 문제가 없지 않다. 낱말 만드는 접사가 붙을 수 있는 어근은 제한적인 것이 일반적 특성이다. <문세영: 조선어사전>에서는 명사, <조선말 사전>(북. 1962)에서는 불완전명사로 다룬 적이 있다.
  기존 사전의 내용 가운데는 뜻풀이의 체계와 표현에도 정리해야 할 부분이 없지 않다. 체계 세우기는 편찬자의 의도에 따라 다를 수도 있지만 적어도 같은 유형의 올림말끼리는 풀이 체계가 일정해야 할 것이다. 또 같은 유형의 올림말에 대한 뜻풀이에서도 되도록이면 같은 표현 형식을 적용할 필요가 있다. 뜻풀이 문체의 일관성을 지켜 갈 수 있기 때문이다. 이를테면, 행동•행위 명사의 뜻풀이에서 그 맺음 형식을 어떻게 표현하였는가를 두고 생각해 보자. <표준국어대사전>에서, ‘공부’는 ‘학문과 기술을 배우고 익힘’으로, ‘연구(硏究)’는 ‘어떤 일이나 사물에 대하여서 깊이 있게 조사하고 생각하여 진리를 따져 보는 일’로 풀이하였다. ‘감독’은 ‘일이나 사람 따위가 잘못되지 아니하도록 살피어 단속함. 또는 그렇게 하는 사람.’으로 행위와 사람을 한 갈래에 아울러 풀이하였다. 여기에서 편찬자는 뜻풀이의 맺음 표현에 체계적인 정리가 필요함을 느낄 것이다. 이 밖에 뜻풀이 표현의 군살 빼기로, 겹침 표현과 불필요한 강조 표현 삼가기, 본풀이 앞에 불필요한 머리글 덧붙이지 말기, 본풀이 뒤에 ‘…를/을 나타내는/이르는 말’ 등의 표현 줄이기 등을 들 수 있다.
  새로운 사전 편찬에서 기존 사전 바로잡기에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새로운 내용 더하기다. 미처 다루지 못한 새 어휘를 찾아 올리고, 새로운 뜻갈래를 더하며, 그 쓰임의 인용례를 더하는 일련의 일이다. 이 일을 위해 <겨레말큰사전> 편찬에서는, 앞서 밝힌 대로 남과 북의 기존 사전에 다루지 못한 지역어와 현장 어휘, 그리고 지난 100년간의 문헌 작품에서 새 어휘와 인용례를 찾고 있다. 사전에도 새 물을 대주어야 하는데 우리 사전 편찬은 이 일을 제대로 해오지 못하였다. 미처 거두지 못한 새 어휘를 많이 찾아 올리는 일이야말로 사전의 면모를 가꾸는 데 중요한 과제가 아닐 수 없다.

  분단 시대의 우리 사전은 반쪽 사전이었다. <겨레말큰사전>은 남과 북의 기존 사전을 두루 편찬의 밑바탕으로 삼기에 모자란 반쪽을 채워 옹근 우리말 사전으로 태어날 수 있게 되었다. 남과 북의 학자들이 함께 편찬하는 사전이기에 우리 언어의 지식을 망라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만날 수 없던 편찬 전문인들이 수시로 만나 논의하고 문제점을 함께 해결하기에 서로의 경험과 요령을 공유할 수 있게 되었다.
  사전 편찬은 큰 건물을 짓는 일과 비슷하다. 면밀한 설계에 따라 한 현장에서 자재와 품을 들여 건물을 짓듯이, 사전 편찬도 일정한 체계에 따라 한자리에서 한결같이 일을 할 수 있어야 한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에 아직 남북 공동의 일터가 마련되지 못하였다. 금강산, 개성, 평양, 또는 외지에서 분기로 만나 일을 진행해 온다. 그리고 반세기가 넘는 분단의 언어를 7년이라는 기간에 사람과 기구를 조직하고, 자료를 모으고, 단일 어문 규범을 마련하여 편찬을 해내야 하는 일정이야말로 급하다. 그러나 소중한 기회다. 남과 북의 편찬 일꾼들은 이 기회가 보람되게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겠다. 성원해 주소서.

겨레작품읽기
북한소설읽기(1) - 경제적 합리성과 사회변화의 징후: 변창률의 연근 이삭

유임하 (한국체육대학교 교양과정부 교수)

  1.
  소설은 사회의 일화이다. 소설에는 한 사회 구성원들의 주된 관심사가 무엇인지, 그들이 어떤 방식으로 살아가고 있는지, 어떤 삶을 소망하는지가 잘 드러난다. 북한의 소설도 그 점에서는 예외가 아니다. 북한 소설 또한 성원들의 삶의 애환과 함께 그 사회가 필요로 하는 인간상을 담아낸 한 편의 이야기인 것이다.
  2000년대에 들어와 북한 사회가 중시하는 것은 경제적 합리성에 바탕을 둔 실용적 사고이다. 지난 십년 동안 북한사회는 혹독한 위기를 이겨냈다. 현실 사회주의 몰락(1989-1991)과 교역 시장 상실, 김일성 주석 사망(1994) 이후 이어진 큰물 피해(1995, 1996)로 사회 인프라가 붕괴되면서 시작된 ‘고난의 행군’은 김정일 위원장 체제의 등장(1997. 10)과 함께 끝이 났다.
  김정일 위원장 체제의 북한사회는 식량난과 물자난, 에너지난을 타개하기 위해 전 산업 분야에서 효율성을 제고하는 데 주력해 왔다. 1998년부터 2004년 7월까지 대대적인 토지정리 사업을 시행하여 7700여 정보의 농경지를 확보하였고, 에너지난을 타개하기 위해 곳곳에 수력발전소 건설을 추진했다. 또한, 150Km에 이르는 개천-태성호 물길을 완성하여 10만 정보의 논밭에 농업용수를 공급하는 등 산업 인프라 구축에 박차를 가해 왔다.
  이러한 가운데 시행된 ‘7.1경제관리 개선 조치’(2002)는 계획경제의 정체된 국면을 타개하기 위해 경제적 효율성을 제고하는 변화의 기폭제가 되었다. 시장경제적 요소를 가미한 이 정책은 자율권을 부여하는 한편 초과이익을 개인과 기관에 양도함으로써 계획경제 방식의 탈피를 지향하고 있다. 이 조치는 계획경제의 근간을 이루는 배급제의 폐지와 함께, 국가 보조금 중단과 인센티브 제공, 생활비 인상과 같은 시장경제적 요소를 도입하는 등 매우 혁신적인 사안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조치에 따라, 기업소와 공장은 자율권을 보장받고, 책임경영을 통해서 얻은 초과생산에 대한 이익을 처분할 권리까지도 얻게 되었다. 이에 따라 사회 성원들에게 요청되는 인식 변화의 요청도 그만큼 높다.

  2.
  변창률의 소설 「영근 이삭」(『조선문학』 2004년 1월호)은 협동농장의 한 초급일꾼을 통해서 변화하는 북한사회의 한 단면을 제시한 작품이다. 작품의 주인공인 ‘홍화숙’은 협동농장의 기본 단위인 분조의 한 사람이다. 그녀는 ‘홍말썽’ ‘홍타산’이라는 별명이 붙을 만큼 분조원들과는 자주 불화를 일으키지만, “남자 못지 않게 일솜씨가 걸싸고 농사물계에 환한 녀인”(46쪽)이다. 작품의 관찰자인 작업반장은 그런 그녀를 연로하여 퇴역하게 되는 1분조장의 후임으로 점찍어 놓고 있다. 지난 1년 동안 그녀를 지켜본 작업반장은 내심 그녀의 능력을 인정하고 있다.
  그러나 홍화숙의 ‘옹근 이삭’ 같은 면모는 ‘분조의 화목’을 바라는 사람들과 끝없는 분란을 일으킨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갈등은 오늘의 북한사회가 낡은 관행과 새로운 사고가 충돌하는 접점과 변화의 현주소이기도 하다.
  일 년 전에 부임한 작업반장은, 지난 소한 무렵 개최된 농장원 모임에서, 지난 한 해의 영농사업을 함께 지도하고 분조별 편성을 모두 끝낸 다음 3분조장이 홍화숙에 관해 푸념하는 것을 듣는다.

  “…지금 우리 분조에 있는 홍화숙이 때문에 내 머리털이 다 셀 정도요. 엊저녁에도 그랬지요./ 거름상하차작업(트랙터에 거름을 싣고 내리는 작업-인용자)을 하던 애기엄마들이 쉴 참에 탁아소에 젖 먹이러 갔다가 하두 추운 날씨라 좀 늦잡았던 모양인지 작업총화에서 그걸 계산하지 않았다고 코를 드는 게 아니겠소. 그래서 당신도 아이를 키우는 어머니인데 그만한 것도 리해를 못해 옴니암니해서야 어떻게 분조의 화목이 이루어지겠는가고 한 마디 했지요. 그랬더니 한다는 소리가 거름 한 차 실은 것은 물론 그 시간에 뜨락또르(트랙터-인용자)가 태워버린 기름값까지 계산해야 한다는거요. 기가 막혀서…”(47쪽)

  3분조장의 푸념은 ‘분조의 화목’을 깨는 홍화숙에 대한 부정적인 평판을 양가적으로로 보여준다. 부임한 지 얼마 되지 않았던 작업반장이, 협동농장 분조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린 원인을 잘 알지 못한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상황의 낯설음은 분조원들의 통념에서 전달되는 북한사회의 정체된 실상이 객관화되는 데 있다. 불평을 통해 전해지는 홍화숙의 면면이 가진 특징은, 분조원들이 작업시간을 허비하는 시간을 효율과 비용 문제로 매섭게 몰아치는 대목에서 잘 나타나 있다. 그녀의 신랄한 문제 제기가 보여주는 반어(反語)적인 효과는 경제적인 가치를 따지는 데 익숙하지 못한 북한사회의 당혹감이다. ‘기가 막혀서…’라는 3분조장의 푸념은 계획경제 시절의 오랜 관행에 젖어 있는 대부분의 성원이 갖는 정서적 반응이기도 하다. 이렇게 보면 협동농장 성원 대부분이 경제적 합리성과 효율성 문제를 충분히 납득하지 못한 상태임을 말해준다.
  이렇게, 그녀가 골치덩어리에 가깝게 그려지는 도입부는 다른 분조원들이 낡은 통념에 사로잡혀 있는 현실을 한껏 부각시킨다. 그러나 작업반장이 새로 부임해 오면서 협동농장 분위기는 서서히 홍화숙을 중심으로 재편되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질서의 등장은 작업반장의 부임, 새로운 분조장 선출과 맞물려 새로운 시대에 걸맞는 새로운 사유와 실천을 요구하는 북한사회의 변화를 잘 말해준다. 새로운 분조장 감으로 거론되는 여 주인공 홍화숙을 중심으로 펼쳐지는 이야기의 행로는 북한 농촌의 쇄신과 맞물려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홍화숙을 둘러싸고 협동농장에서 벌어지는 좌충우돌식의 분란은 북한 농촌사회의 생동하는 모습을 핍진하게 포착하고 있어서 매우 흥미롭다. 까탈스러운 홍화숙에 대한 논란은 이야기가 전개되면서 점차 긍정적인 의미로 바뀌어가면서 어조 또한 바뀐다. 이야기의 의도는 분조원들의 원성과 분조장의 푸념이 ‘화목을 바라는 정실주의와 타성’에서 비롯된 것임을 지적하고 이를 정정하는 데 있다. 홍화숙이 불러일으키는 분란의 정체는 새로운 가치관으로 무장한 ‘종자’의 가치를 인식하지 못한 데서 비롯된 것이다.
  예컨대, 홍화숙이 탁아소 책임보육원에게 땔나무 문제를 제기하는 장면에서도, 사회적 갈등을 불러일으키는 문제가 무엇인지 잘 확인된다. 그녀는 지금처럼 분조원들이 돌림식으로 탁아소의 땔나무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임시방편에 지나지 않는다고 잘라 말한다. 그녀는 탁아소 인원들이 합심하여 자체적으로 봄가을에 열흘씩만 나무를 심으면, ‘땔나무림(땔나무숲-인용자)’ 몇 정보는 마련할 수 있고 거기에 사료로 염소도 기르고 꿀벌도 치면 고기와 우유를 얻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작업반장조차도 의구심을 갖는 그녀의 원대한 포부는 일 년 사이에 변화된 현실을 낳는 원천이다. 일 년이 지난 지금, 작업반장은 버려진 탁아소 뒤편 둔덕이 농장관리일군들이 합심하여 조성한 아카시아 땔나무림과 넓은 강냉이밭을 바라보면서 많은 변화를 실감한다. 이같은 변화를 선도하는 인물이 바로 홍화숙인 것이다.
  변화를 선도하는 여 주인공의 인물 형상은 단순히 한 개인의 영역에 그치지 않는다. 그녀의 면모는 강냉이밭에서 강냉이 포기를 정성스럽게 살피는 연구사 처녀와 겹쳐진다. 연구사 처녀는 식량난을 타개하려는 국가이성의 의지를 보여준다. 그러나 홍화숙은 뜨락또르 기술자와 합심하여 벼모판을 냇물에 씻어내어 기계화된 모심기에 성공하는 창안자이기도 하다. 하지만 그녀는 새로운 창안으로 성취한 놀라운 작업 성과를 자신의 몫으로만 돌리지 않는다. 그녀는 작업복 주머니에 넣어둔 까만 비닐지갑인 ‘로력일수첩’에다 꼼꼼하게 하루의 작업량을 기록한다. ‘로력일수첩’에다 하루 작업량의 수치와 관련 내용을 상세하게 기록하는 행위는 그녀가 경제적 가치와 합리성을 소유한 인물임을 말해준다. 수첩에는 수확된 강냉이의 특징과 알 수까지도 정확히 기록되어 있다. 이 기록이 가을 수확기에 다른 분조와 뒤섞인 강냉이 수확물을 가려내는 근거로 요긴하게 쓰인다.

  “뭐가 아직 내려가지 않아서 생색이요? 이렇게 망신을 주어야 씨원하겠소? 이거나 저거나 무엇이 다른가 말이요? 까다롭다는 건…”
  3분조장은 서리맞은 무우잎처럼 시퍼런 인상이 되여 발치 앞의 강냉이를 와락 잡아챘다. 그 서슬에 좀전에 골라놓았던 큰 이삭이 저만치 굴러났다. 홍화숙은 창황이 그 이삭을 집어들었다.
  숨가진(생명을 가진-인용자) 물건이런듯 찬찬히 쓰다듬었다.
  (…중략…)
  “너무 지나쳤다면 용서하세요. … 하지만 이 강냉이는 한 이삭이라도 축나거나 보태여져도 안되는 거예요. 먹는 문제를 풀자구 우리 과학자들이 뼈와 살을 깎으며 연구해낸 품종인데 정확한 수확고를 알려줘야 그들의 연구사업에 도움이 되고 우린 앞으로 더 많은 알곡을 낼게 아닌가요, 이것이 소란을 피우고 까다롭게 구는 것으로 되는가요. …”(54쪽)


   자존심을 상처입는 것으로만 여기며 얼굴을 붉히는 3분조장의 언행에서는 오늘의 북한사회에 작동하는 낡은 가치의 완강함과 오랜 타성을 충분히 느낄 수 있다. 강냉이 품종에 대한 이해나 강냉이 알의 수에 대한 홍화숙의 발언은 단순히 개인의 작업량이나 자존심과는 다른, 경제적 효율을 지향하는 과학적 합리성의 차원임을 말해준다. 그녀의 관심은 연구사 처녀의 과학적 영농사업의 결과와 연계되고 이것은 식량난을 해소하려는 국가 이성의 의지에 부합한다.
  홍화숙의 면모는 체제이데올로기의 완강한 교시를 체득한 자가 지닌 구심력과는 질적으로 달라 보인다. 3분조장에게 사과하고 흘리는 눈물에서 볼 수 있듯이, 그녀는 경제적 가치에 각성한 개인의 면모, 그의 호소력을 구비한 사고와 논리를 소유한 모습을 보여준다. 그녀가 일으키는 변화는 마치 작은 불씨 하나가 들불을 일으키는 것처럼, 이웃과 사회, 국가로 파급되는(또는 파급되기를 소망하는) 모습을 일화로 구성되고 있는 것이다. 그녀는 탁아소 뒷산을 땔나무 숲과 강냉이밭으로 변화시키는 발화점이 되었듯이, 경제적 합리성으로 무장하고 낙후한 농촌사회를 풍요롭게 바꾸는 초급일꾼의 자격을 인정받는다.

  3.
   「영근 이삭」이 부정적인 시선에서 출발한 것은 북한사회가 직면한 문제와 장애들이 그만큼 뿌리깊다는, 작가의 비판적인 태도가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여 주인공과 분조원들 사이에 조성되는 긴장과 갈등은 그간 통용되어온 관행과 경제적 비효율성을 비판적으로 초점화한 것이다. 여 주인공이 역설하는 경제적 가치에 대한 지적이나 대안 제시 방식이 분조원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것은 관행과 타성에 젖어 있는 자들의 냉소와 반발이 완강하다는 점을 말해준다. 냉소와 반발에도 불구하고 시간까지도 경제적 비용으로 타산하는 홍화숙의 편모에서, 우리는 북한사회가 지금 시장경제의 요소를 학습하는 과정을 거치고 있지만, 이같은 인물의 등장과 함께 일어난 많은 변화를 기대해도 좋을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홍화숙은 냉동기(냉장고)와 색텔레비죤(천연색 텔레비전), 록음기, 재봉기와 같은 가전제품을 장만해두었을 뿐만 아니라, 돼지, 염소, 토끼, 닭, 오리, 게사니(거위), 칠면조까지도 키우는 부유한 자산가이기도 하다. 그녀의 풍요로움은 빈틈없는 경제적 합리성을 상징할 뿐만 아니라 이미 북한사회에서 자산가의 등장이 결코 낯설지 않다는 점을 시사한다. 홍화숙은 타성에 젖어 분란없이 살아가려는 일상적 개인들에게, 그리고 관행이라는 미명하에로 적당히 타산을 맞추려는 농장원들에게, 경제적 효율성과 합리성의 원리에 입각하여 정실주의와 관료주의의 폐단을 매섭게 지적하고 정정해 나가는 거울이 된다.
  「영근 이삭」은 식량난 해소와 경제난 극복에 진력하는 오늘의 북한사회 모습을 실감나게 보여준다. 오늘의 북한사회는, 여 주인공의 언급처럼, 사회 전반에서 수확고의 정확한 계량화 같은 경제적 합리성에 기초한 자기 쇄신을 요구하고 있다. 바로 이런 맥락에서, 통념과 과감히 맞서고 분란을 일으키지만 침체된 공동체 성원들에게 변화를 촉발하고 변화의 동력을 사회 전반으로 전파할 충분한 자격을 갖춘 인상적인 초급일꾼인 홍화숙의 등장은 인상적이다.

유임하 한국체육대학교 교양과정부 교수(현대소설)유임하

한국체육대학교 교양과정부 교수(현대소설)

저서로는 『한국소설의 분단이야기』, 『한국문학과 불교문화』, 『북한의 문학과 문예이론』(공저) 등이 있음.

겨레말 현장을 찾아서
아따, 아자씨! 땀 찍찍 흘리고 그런 것 히서 머달라 그라요?

김규남 (전주대 한국어문화교육센터 책임객원교수)

  흑산도 해녀들은 음력 2월부터 9월 즈음까지 물질을 했다고 한다. 음력 2월이면 바닷물에 들어가기가 만만한 일이 아니었을 텐데 그것도 고무로 만든 해녀복이 나오기 전까지는 광목이나 베로 만든 옷을 입고 물질을 했다고 한다.

“그랑께 백목이나 강목이나 이 베로 히가지고 해수욕복을 맨들았지.” “그때도 해녀복이라고 했어요?” “옛날에는 잠베이, 촌 말로는 잠베이라고 그라제.” “물질은 몇 월부터 시작해요?” “음력으로 이월 금정부톰 시작헐 것이요.” “이월 금정이며는?” “이월 금정이머는 정월 넘고 이월 다 되가는 거이요. 물견이 잘 나머는 구월까지 헤요.” “이월에는 얼마나 추웠을까?” “그랑께 불을 놔. 잉그락 불에 사람이 불을 쬐먼 춤이 풀어질 것 아니요. 그리갖고 몸이 착 풀리먼 또 들어가요.”

저 옛날 잉걸불에 고구마를 삶아 한기든 몸을 풀어가며 전복을 잡던 흑산도 아가씨가 지금은 일흔을 훌쩍 넘긴 할머니가 되어 낯선 이방인과 더불어 지나온 삶을 반추하고 있다.

“우리 가스나이 때는 어찬 줄 알아요. 이만 한 바구리 옹뒹이 태악 갖고 가서 타고요. 빈창을 이렇게 해 가지고 태악을 타요. 태악을 타고” “할머니, 태악이?” “해녀질 할 때 타는 두룸박, 이것 안 타먼 못 해. 물에 탁 빠지먼 이것은 동당 떠 있어요. 이것을 쭉 밀어놓고 들어가요.” “거기서 힘들 때는 쉬기도 하고요잉?” “하! 숨이 짠뜩 가뿌먼 올라와서 태악 붙들고 ‘휴이’ 하고 숨을 쉬기도 하고 또 이것을 타고 여기저기 휘어 댕기기도 해요.”

할머니의 이야기 속에서 톡톡 살아나는 ‘잠베이, 이월 금정, 태악, 바구리, 옹뒹이, 빈창, 휘어댕기다’ 등의 방언 어휘들은 마치 물 위로 튀어 오르는 물고기처럼 조사자의 신경을 자극한다. 이 가운데 어떤 어휘가 과연 겨레말 사전에 등재될 수 있을까는 차치하고 우선 그 뜻을 알 수 없는 것들은 그 의미를 확인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녀들이 물질을 하기 위해서는 ‘망사리’ 달린 ‘태악’을 물에 띄우고 손에는 ‘빈창’을 들고 자맥질을 한다는 사실이다. ‘망사리’는 ‘잡은 전복 따위를 보관하는 망’이며 ‘빈창’은 ‘전복 등을 따는 데 쓰이는 도구’이다. ‘망사리’와 ‘태악’과 ‘빈창’은 물질을 하는 해녀 이야기 속에서 있어야 할 어휘이며 그녀들의 삶에서 생생하게 살아있는 어휘이다.

“배로 가서 미역을 딴다든지 하머는, 옛날에는 육지로, 어디로 가자. 흑산 말로 하머는 먹뒹이로 가자, 포라개미로 가자, 금머리로 가자, 서산머리로 가자, 멜끝으로 가자 그리가지고 휘어댕겨.”

할머니 말마따나 흑산 말로 하자면 ‘먹뒹이, 포라개미, 금멀, 서산머리, 멜끝’은 흑산 사람들의 삶이다. ‘먹뒹이’와 ‘포라개미’의 물속이 어떻게 생겼는지, ‘멜끝’에서 어떤 사연이 있었는지는 그 분들만 아는 일이며 그래서 그 분들의 삶에 필요한 그분들만의 언어이다.

“전북을 따가지고 와서요 까. 다 까가지고 그 내장은 똥을 따가지고 뽂아먹고, 내장은 개홋, 전북 내장 개홋 그라고 전북은 이렇게 따서 그릇에다 담아요. 양판에다 양지기 거그다 담어서도 소금을 두 삽 채 느서요. 거그다 싹싹 비벼요. 따둑따둑 눌러서 오늘 저녁 때 그렇게 간하믄 낼 아침에 히쳐요. 전북이 검잖아요. 히츠믄 히어요. 꽂대를 간잔지르하게 곱게 빵가 이 끄터리를 잘 히쳐갖고 딱 끼요. 열 개를 딱 끼먼 볼 만하죠. 그러먼 한 접. 그러먼 그놈을 피득피득 말려가지고 그놈을 빼요 그놈을 빼가지고 그놈을 느라. 곱게 손질을 헌다고요. 돌을 이렇게 조그만헌 차돌 하나 주서다 놓고 꽂대에서 전복을 빼죠. 이빨로도 한 사람이 있고 손이로도 하는 사람도 있고 돌에다가 이렇게 날개죽을 비슬그러요. 그라믄 으트께 보기가 좋아요. 그라고 살었어요.”

  전복 내장은 ‘개홋’이라고 하는데 볶아서 먹는다. 내장을 빼낸 전복은 간을 해두었다가 다음날 아침에 씻는다. 이것을 ‘히친다’고 한다. 그렇게 ‘히치면’ 검던 전복이 희어진다. 그리고 씻은 전복의 가장자리를 빗질하듯 ‘비슬그린다’. 그래서 ‘꽂대’에 열 개씩 ‘간잔지르하게’ 엮어서 빨랫줄이나 나무작대기에 걸어 말린다. 그 기원을 알 수 없는 세월을 켜켜이 쌓으며 꼭 그렇게 흑산 아가씨들은 전복을 잡는 데서부터 손질하여 말리는 것까지의 행위를 삶의 중요한 일부로 엮어 왔다. 그리고 그 삶의 과정 속에서 조우하는 사물과 행위들에 대해 그들 나름대로 말하고 불러왔다. 그렇게 살아 왔다. 방언 역시 그 속에서 그분들과 더불어 살아왔으며 그분들이 남긴 삶의 온기를 따뜻하게 전하고 있다.

“이 꽂대 열 개를 여다 한나 여다 한나 놈시로 영꺼. 딱 열 개를 영꺼서 빨래줄이나 나무작대기에 걸어 놓으먼 참 이뻐요.”

  손질한 전복을 바라보고 있노라면 예뻐 보이지 않을 까닭이 있을까. 그것이 돈이 되기 때문이기도 하려니와 소금기 가득한 겨울 바닷물에 절어버린 몸을 잉걸불에 녹여가며 전복을 잡는 데서부터 간을 치고 손질을 해서 지금 이 모습을 만들어내기까지의 수고로움과 정성이 묻어날 것이니 말이다.
   이야기가 무르익을 무렵 작렬하는 더위와 맹렬히 싸워가며 조사에 신이 나 있는 조사자를 보며 할머니께서 던지신 말, “아따, 아자씨! 땀 찍찍 흘리고 그런 것 히서 머달라 그라요?”에 나는 그럴 듯한 대답을 했다. “할머니 돌아가시면 누가 조상님들 살아온 내력을 일러준대요?” 그러나 그런 당위성도 당위성이지만 내가 먼저 떠올린 것은 바로 흑산 해녀가 ‘망사리’ 달린 ‘태악’을 타며 ‘빈창’들고 잡아 ‘히치고 비슬그려서 간잔지르하게’ 꽂아놓은 그 전복의 고운 태깔과 그러기까지의 수고로운 일상의 행위들이었다.
  지난 해 나는 그렇게 동해와 남해와 서해 바다를 누비며 수십 척 배를 짓고 수백 번 그물을 던져 온갖 바다 이야기들을 건져 올렸다. 주목받지 못했던 우리 민초들의 삶, 그러나 정성스럽게 시간의 베틀로 짜놓은 삶의 무늬들과 그들이 누린 삶의 온기가 방언 어휘를 통해 겨레말의 이름으로 통합되고 세세 무궁토록 전할 수 있게 된 사실이야말로 우리 겨레의 가슴을 분홍빛으로 물들일 설레고 벅찬 감동임을 새삼 느끼게 된다.

김규남김규남

전북 완주 생, 전북대학교에서 사회방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2007년 겨레말큰사전 어로 생활 관련 현장 어휘 조사를 하였다. 저서로는 ‘눈 오는 날 싸박싸박 비 오는 날 장감장감’,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공저)’, ‘언어변이와 변화(공역)’, ‘언어와 대중매체(공저)’ 등이 있다.

말에 얽힌 이야기
구루마

이재웅(소설가)

  어렸을 적, 내 고향에서는 ‘사심 붙이다’라는 말을 사용하곤 했다. 그것은, 요새 의미로는, 어깃장을 놓다, 괜히 심술부리다, 자기 분에 못이겨 시비를 걸다 정도가 될 것이다. 우리는 놀이 중에 독불장군처럼 굴거나, 자기 주장을 어거지로 밀어붙이는 녀석에게 “저 새끼, 사심 붙인다!”하고 소리치곤 했던 것이다.
  이제 그 말은 죽어버렸다. 세월이 우리의 기억 한 켠에서, 일상에서 그것을 문질러 버린 것이다.
‘구루마’는 ‘사심 붙이다’라는 말에 비하면, 아직은 언어로서의 명줄을 움켜쥐고 있는 셈이다. 하지만 앞으로 그것 역시도 많은 사어들의 운명을 받아들여야 하는지도 모른다. 나는 이틀 전, 열 한 살 난 조카 녀석에게 물었다. “너 구루마가 뭔 줄 알아?” 그러자, 녀석은 시골과는 무관하게 살아온 열 한 살의 인생답게, 장난기를 머금은 표정으로 “그거 블루마블 같은 건가?”하고 되물었다. 녀석은 벼는 알아도 나락은 모른다.
  내 어린 시절에, 내 가난한 고향에서는, 구루마는 얼마만큼은 부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것은 구루마 자체도 흔하지 않고, 무엇보다도 구루마를 끌만한 힘 좋은 소가 필요했기 때문이었다. 나는 이것을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다. 그래서 그 당시 나는 구루마며, 우리 집 외양간의 힘 좋은 소를 은근히 자랑하고 싶어 하곤 했다. 당시 나는 그 구루마라는 것을 또 그것을 끄는 소를 장만하기 위해 아버지가 겨울철이면 일명 ‘노가다’라는 공사판 일자리를 얻기 위해 도시의 빈민으로 전전했다는 사실은 몰랐다.
  나의 아버지는 시골의 많은 아버지들이 그랬듯이 다정다감하지 않았고, 오히려 그것을 약간의 수치로 여기는 사람이었다. 무관심에 가까운 배려를 가지고 있었고, 이기적이었고, 자식에게 칭찬할 일이 있으면 칭찬 대신 경직되고, 엄격해진 표정으로 자리를 피하곤 했다.
  아버지는 잘난 사람들에 대한 질투심이 강한 사람이기도 했다. 그는 늘 마을 안, 이웃 동네, 면의 누구와 경쟁하는 자세를 유지했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그것을 직접적으로 드러내는 것을 점잖지 못하고 또 사내답지 못한 소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시골 촌부들이 정자나 술파는 구멍가게에 모여 지위가 우월한 사람들에 대해 험담을 늘어놓으면 언제나 반감을 억누르는 듯한 거북한 표정과 태도로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그는 그 험담보다 더 독한 침묵을 유지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도리어 어린 나도 그가 윗가티의 누구와 아래 가티의 누구를 질투하고 있는 지 눈치 챌 정도였다.
  아버지는 타인들에 대한 질투심을 침묵으로 누르듯이, 자신에 대한 자부심을 침묵으로 누르는 사람이기도 했다. 그래서 누군가가 만약, “이것은 자네가 최고구먼.”하고 칭찬을 할라치면, 아버지는 부끄러움과 비웃음이 섞인 묘한 웃음을 지으면서, 어떤 잘못이라도 지은 것처럼 당황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그가 순진한 사내라는 증거였다. 하지만 동시에 그가 거만한 사내라는 증거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버지가 그 당황의 와중에서도 기쁨을 느끼며 또 다른 칭찬의 기대로 몸이 부풀어 오르듯 달뜨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때로 곁에 있던 나에게도 전염되어 나 역시도 마치 내가 칭찬을 받은 아이처럼 설레고 마구 떠들고 싶은 심정이 되곤 했다. 나는 아버지를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아버지와 나는 구루마를 몰 때에, 이러한 연대적 감정을 그 어느 때보다 크게 느끼곤 했다. 나는 말할 것도 없고, 아버지 역시 우리의 씩씩한 소를, 그 소가 이끄는 구루마를 자랑스러워했던 것이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그런 것들 외에는 가진 것이 없는’ 가난한 자들의 자아도취, 소박한 행복감 같은 것이었다.

  그 해 늦은 가을날도 아버지와 나는 그런 감정 속에서, 볏단을 가득 싣고, 구루마 앞쪽에 겨우 엉덩이만 걸치고 앉은 채 집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해는 붉은 석양이었다. 겨울을 몰고 오는 차가운 바람이 가을걷이가 끝난 벌판 위로 황량히 불어오고 있었다.
  우리는 그 때, 좁은 농로를 지나, 도로 밑으로 뚫린 콘크리트 굴로 접어들었었다. 그런데, 그 때 우리의 맞은편에서 자동차 한 대의 우람한 본네트가 양쪽의 라이트를 켠 채 우리의 소와 구루마를 압박하듯이, 밀려오듯이 다가와서 우리의 앞에 멈춰서는 것이었다. 그러더니, 그 뒤로 연이어 두 대의 자동차가 더 들어섰다. 하나의 좁은 굴 안에서 우리의 구르마와 세 대의 자동차가 대면한 꼴이 된 셈이다.
  나는 그 때에 어렸으므로, 그 세대의 자동차가 무슨 연유로 그 굴을 지나려 하고, 또 그 자동차의 주인들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다. 또, 신분의 역학관계라는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했다. 내가 아는 것은, 우리 마을에서 구루마는 흔치 않으며, 그 몇 대의 구루마 중 한 대가 바로 우리의 구루마였다는 것이다. 나는 내 손에 쥔 장난감이 세상에서 가장 좋은 장난감이라고 믿고 있던 코흘리개였던 것이다. 그래서 나는 그 때에 아주 막연히 우리의 구루마가 그것들을 밀어내면서 앞으로 나아갈 것이라고 생각했다. 아버지가 잘난 사람들 앞에서 취하던 침묵을 유지한 채로, 자동차를 똑바로 응시하면서, 뒤로 뒷걸음질 치는 소를 가만히 두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이다. 이것은 어린 아이들이 갖는 묘한 오기와 자존심이 불러일으키는 무의미한 대결의식이었다.
  상황은 내가 생각했던 것과는 정반대였다. 자동차에서 클략숀이 울려터지고, 또 차에서 두 사람이 내려 아버지에게 뛰어와 무엇인가를 다급하게 설명하고, 그 후에는 ‘빼요! 빼!’하고 소리지르자, 아버지는 완전히 당황해서는 재빨리 구루마에서 뛰어내렸는가 하면, 소를 비스듬히 끌면서 어떻게든 뒤로 물러나게 하려고 허둥댔던 것이다. 하지만 소는 전진에는 능숙해도 후진에는 그 반대의 습성을 지닌 동물이다. 게다가 그것은 클락숀 소리와 본네트의 불빛, 허둥대던 아버지가 평소와는 다르게 고삐 자체를 거칠게 붙잡고 당기는 것에 질려버려서는 눈을 희번득거리고 반쯤 입을 벌린 채 혀를 내밀 뿐이었다. 그것은 흡사 당황한 아버지와 또 그만큼 당황한 소가 힘겨루기를 하는 모습이었다. 그리고 그 상황에서도 우리 앞을 막아 선 사람들은 “저건 뭐야! 빼요! 빼요!”하고 반복해서 고함치는가 하면 또 반복적으로 클락숀을 울려댔다. 그 소리에 콘크리트 굴 전체가 울렁거렸다.
  결국, 아버지는 구루마를 콘크리트 굴 밖까지 물리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그 결과는 참담했다. 소의 코에서는 피가 흐르고, 아버지는 땀에 젖었는가 하면, 구루마의 한 쪽 바퀴는 농로를 벗어나 논 속에 박혔던 것이다. 아버지가 애써 구루마에 쌓았던 볏단이 무너져 버렸다. 또 나는 그 와중에, 어떻게든 구루마에서 떨어지지 않으려고, 구루마의 한 부분을 붙잡고, 불안한 자세로 버티고 있었다. 나는 그 때 사나운 개에게 손을 물릴 때처럼 거대한 충격에 사로잡혔었다.
  세대의 자동차는 떠났다. 다시 평온의 시간이 찾아왔다. 그 평온의 시간이라는 것은, 아버지와 내가 다시 구루마에 오르는 것이었고, 구루마의 느린 속도 위에서 시골의 아늑함과 함께 우리의 구루마에 대한 자부심을 다시금 느끼는 것이었다. 하지만, 아버지도 나도 말은 안했지만, 그 시간이 전과 다르게 크게 훼손되어버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아버지는 침착하게 땀을 어깨에 부벼닦았다. 그리고 소를 다독거리고, 논으로 떨어져 내린 볏단을 다시 길 위로 옮겨놓는가 하면, 마지막으로는 구루마를 꺼내기 위해서 소를 재촉하고, 자신이 직접 구르마의 커다란 바퀴를 붙잡고 그것을 온힘을 쥐어짜듯이 들어올렸다. 나는 그 때 이 일련의 과정을 어떤 슬픔에 홀려서, 아버지가 두 손으로 구루마의 바퀴를 붙잡고, 두 눈을 질끈 감고 턱을 높이 쳐든 채, 마치 자신이 들어 올리려는 것이 구루마의 바퀴가 아니라 논에 빠져든 자신의 몸 그 자체라는 듯이 온 힘을 짜내어 구루마 바퀴를 들어 올리고 있는 모습을 바라보았었다. 내 눈에, 그것은 한 인간에게 내재된 고통의 한 단편을 들어 올리는 것과 같았다. 그만큼의 무게였다.
  모든 것이 끝나자, 아버지와 나는 다시 구루마에 올랐고, 이제는 어떠한 방해꾼도 없이 콘크리트 굴을 가로질러 갈 수 있었다. 그 때 우리를 찾아온 것은 역시 평온의 시간이었다. 하지만, 역시, 그것은 크게 훼손되어 아버지와 나는 어떤 비참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굴욕 뒤의 덤덤함 같은 것이 우리의 두 육체와 함께 구루마 위에 얹혀 있었던 것이다.
  그 후 오랜 시간이 지나, 구루마와 얽힌 이 소소한 상처는 상처라고도 칭할 수 없는, 그저 그런 풍경의 하나로 멀어지고 말았다. 그것은 어떤 면에서는 구루마라는, 사물을 지칭하는 작은 언어 하나가 나의 일상에서 그 모습을 감추는 것과 비슷했다.
  이제 아버지는 일흔 몇 살의 나이로, 경운기를 몬다. 소는 모두 팔렸고, 구루마는 내가 고등학교 다닐 때까지 헛간 앞마당을 차지하고 있더니 어느 날 분해되어 이제 두 바퀴만 헛간 안쪽에 보존되어 있을 뿐이다. 그것은 이제 아무 쓸모가 없다. 하지만 아버지는 가난한 농부의 습성으로 그것을 자신의 생활 한 곳에 쌓아두고 있다. 아버지가 죽으면, 구루마도 죽을 것이다.

이재웅이재웅

실천문학 데뷔.
저서로는 장편소설 『그런데 소년은 눈물을 그쳤나요』, 창작집 『럭키의 죽음』

시선
국어 교육 강화 정책을 펴자

박장민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선임연구원)

박장민(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선임연구원)지난 12월 대통령 선거가 끝나고 새로운 대통령과 함께 대한민국은 2008년을 맞이했습니다. 그런 와중에 지난 1월 말의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의 영어 교육에 대한 발표는 큰 충격으로 다가왔습니다.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에 영어 몰입 교육에 대한 발표는 그간 들어왔던 여러 교육 정책 중에 가장 공감하기가 어려웠습니다. 영어 수업은 영어로 한다고 쳐도 왜 다른 교과목도 영어로 하는지 두렵고 떨리기까지 했습니다. 엄연히 우리 말과 글이 있는데 왜 영어로 배워야 하는지 우리는 영어 공용어 국가도 아니고 아름답고 쓰기 편한 우리 말과 글이 존재하는
데ㆍㆍㆍ, 그런 발표를 하고 사방에서 원성이 들려오자 ‘영어 몰입 교육’은 없었던 일이 되었습니다. 그 발표에 내심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기도 했습니다.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 발표와는 상관없이 우리는 지금 폭발적인 사교육 열풍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이 사교육 열풍의 핵심은 영어 교육입니다. 초등학교 3학년부터 영어 수업을 한 이래로 우리 부모들은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 학원이며 학습지 학습을 준비했고 또 아직 시행은 되지 않았지만 시범적으로 초등학교 1학년부터 영어 수업을 한다는 발표가 나니 유치원생부터 영어 학원과 학습지 학습을 하고 있습니다. 대부분 이렇게 영어 사교육을 하고 있는 현실인데 영어 공교육 강화는 아이들을 더 일찍 그리고 더 많이 영어 사교육의 시장으로 내몰게 하는 것입니다. 이런 판국에 학원가에는 또다시 상술이 눈뜨고 있습니다. 발 빠른 사람들은 새롭게 초등학생들을 위한 강좌를 개설하고 부모들은 거기에 휘둘리도록 제도가 마련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옛날을 한번 생각해 보면 우리들은 고등학교에서 제2외국어라고 불어와 독어를 공부했지만 지금은 중국어와 일본어가 득세입니다. 또 누군가는 이제 중국어 열풍이 올 것이라고 말합니다. 그럼 그때 우리는 영어는 밀쳐두고 또 다른 외국어에 열을 올려야 할까요? 이렇게 해서는 악순환만 되풀이될 뿐입니다.

우리말과 글로 자신의 생각을 잘 펼칠 수 있도록 국어 교육 강화 정책을 펼쳐 보는 건 어떨까요. 또한 다른 사람의 말과 글도 잘 듣고 읽을 수 있는 교육을 했으면 합니다. 영어 잘하라고 생각도 영어로 하라고 하면 그 사람은 영어권 국가로 이민가야지 여기 한반도에서 살 이유는 없어 보입니다. 우리의 인사는 ‘굿모닝’이 아니라 ‘안녕하세요, 안녕하십니까’라고 말해야 합니다. 지금은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시대입니다. 지구촌 60억 인구가 영어로만 의사소통하는 것은 아닙니다. 요즘의 교육 과정은 다문화를 중시한다고 합니다. 그러므로 학교에서는 다양한 외국어 교육을 할 수 있도록 생각을 전환해 봅시다. 실용적인 영어 교육 정책도 아마 교육계에서 그 전부터 고심하던 문제일 것입니다.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좀더 현실에 맞게 서서히 정책을 펴나가면 될 것입니다.

영어 공교육 강화 정책의 발표이후 신문 지상에는 연일 이 문제와 관련한 글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습니다. 이런 현상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습니다. 영어 교육 정책으로 인해 그동안 문제가 있었던 다른 교육 전반에 대해 사람들이 쓴소리를 많이 하고 있습니다.
지금의 영어 교육 정책으로 발만 동동 구를 것이 아니라 참된 교육에 대해 생각해 보는 좋은 기회로 삼았으면 합니다.

끝으로 외국어는 의사소통의 수단이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는 가장 단순하면서도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을 우리 모두가 혹 잊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 생각해 볼 일입니다.

 

겨레말소식
■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회 제2기 권재일 편찬위원장 선출
권재일2008년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회 제2기 편찬위원장으로 권재일(서울대 언어학과)교수가 선출되었다. 권재일 위원장은 3년 동안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회를 이끌어갈 예정이다.




■ 제10차 정기 이사회 개최
   · 일시 : 2007년 12월 24일(월) 오후 4시
   · 장소 : 겨레말큰사전사업회 회의실

고은태, 정도상, 권재일 등 8명의 이사가 참석한 제10차 정기이사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이사회에서는 임원 현황과 예산집행 현황을 보고한 후 2008년 (수정)예산안 및 국립국어원과 업무협정 체결에 관한 건 등을 심의하였다.



■ 제23-24차 남측편찬위원회 회의 개최
  · 일시 : 2007년 12월 24일(월) 오전 11시 / 2008년 1월 24일(목) 오후 5시
  · 장소 : 겨레말큰사전사업회 회의실

제23차-24차 남측편찬위원회 회의가 공덕동 사업회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에서는 편찬실 직제 개편과 2008년 예산안 심의에 대해서 편찬위원들과 논의를 가졌다.




■ 통일부 현장 점검
  · 일시 : 2008년 1월 16일(수) 오전 9시 30분
  · 장소 : 겨레말큰사전사업회 회의실

통일부에서는 사업회 진행상황을 살펴보기 위한 현장 점검을 실시하였다. 이번 점검에서 사전 사업을 비롯하여 회계 등 사업회 전반에 걸친 내용을 살펴보고 점검하는 자리가 되었다.




■ 김희진 선생님 도서 기증식 및 감사패 전달
  · 일시 : 2008년 1월 25일(금) 오후 5시
  · 장소 : 겨레말큰사전사업회 회의실

사업회에서는 교육학대사전, 남북 매스컴 용어 사전 등 총 318권의 도서를 기증해 주신 김희진 선생님(전 국립국어원 부장)을 모시고 도서 기증식 및 감사패를 전달하는 자리를 마련하였다.




■ 사업회 감사 및 공인회계 검사
  · 일시 : 2008년 1월 29일~31일
  · 감사 및 검사자 : 장형수 감사, 오세진 공인회계사

사업회에서는 지난 1월 29일부터 31일까지 3일간 <2006~2007년 사업회 업무 감사>와 <회계처리 전반에 관한 검사> 및 <2007 회계연도 회계 검사>를 받았다.



■ 제11차 정기 이사회 개최
  · 일시 : 2008년 2월 12일(화) 오후 4시
  · 장소 : 겨레말큰사전사업회 회의실

제11차 정기 이사회가 개최되었다. 이번 이사회에서는 제2기 남측편찬위원회 구성과 2007년 결산서 승인, 사업 규정의 개정에 관한 건 등이 심의 되었다.




■ 제25차 남측편찬위원회 회의 및 남측편찬위원회 2기 출범식
  · 일시 : 2008년 2월 13일(수) 오후 5시
  · 장소 : 겨레말큰사전사업회 회의실

제25차 남측편찬위원회 회의가 공덕동 사업회 회의실에서 열렸다. 이번 회의에서는 12차 공동편찬위원회 회의(금강산) 주제인 뜻풀이 속구조와 단일어문규범 논의, 새 어휘 선정 지침, 1차 올림말 선별 완료 결과에 대해서 편찬위원들과 논의를 가졌다. 또한 제2기 남측편찬위원회 출범을 알리는 편찬위원들의 위촉장이 수여되었다.

 
 
■ 한국어의미학회 제22차 전국학술발표대회
  · 일시 : 2008년 2월 16일 (토) 10:00~17:30
  · 장소 : 한성대학교 미래관(지하1층, DLC센터)

한국어의미학회에서 제22차 전국학술발표대회를 개최하였다. 한성대학교에서 열린 이번 학술대회는 임지룡(경북대 교수)학회장의 개회사를 시작으로 ‘의미와 문법 기술’이란 주제로 공동 주제 발표가 진행되었다. 임동훈(한림대 교수) ‘한국어의 서법과 양태 체계 발표’, 최상진(경희대 교수) ‘국어 실체 명사의 의미 형질 성분 분석’ 등의 개인 연구 발표가 이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