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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은 겨레얼 입니다 겨레말큰사전 누리판 2015.06

남녘말 북녘말

까지다

_ 김완서 / 겨레말큰사전 책임연구원

북: 동무, 오랜만에 봅니다.
남: 그러게요. 그동안 건강하셨죠.
북: 그런데 전보다 좀 까진 것 같습니다.
남: 말이 좀 심하네요. 까졌다니요.
북: 심하다니요. 까진 걸 까졌다고 하지 뭐라 합니까?
남: 제가 어딜 봐서 까졌다고 그런 말을 합니까?
북: 동무가 왜 화를 내는지 도무지 이해가 안갑니다.
남: 내가 왜 화를 내는지 알지 못하는 당신이 나도 이해가 안갑니다.
북: 그만 합시다.
남: 뭘 그만 해요. 사과하세요.
북: 사과는 무슨 얼어 죽을 사과요.
남: 이 사람, 다시는 상종 못할 사람이군.
북: 다시는 상종 못할 사람이라니, 당신이나 사과해요.
남: 적반하장이라고 누가 누구에게 사과하라는 거에요.
   이상은 남과 북의 사람이 만나서 대화를 나누다 큰 싸움으로 번지는 상황을 가상으로 만들어 본 것이다. ‘까지다’라는 말 하나 때문에 처음의 화기애애함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서로의 언성만 높아지고 급기야는 ‘상종 못할 사람’이라는 심한 말까지 내뱉고 있다. ‘까지다’에 있는 남과 북의 의미 차이로 드잡이하기 직전까지 가게 된 것이다.
   ‘까지다’라는 말과 잘 어울려 쓰이는 말들이 있다. 그것은 ‘홀랑, 홀딱, 훌렁, 발랑’ 등이다. ‘까지다’ 앞에 ‘홀랑, 홀딱, 훌렁’이 오면 ‘대머리’가 연상되고 ‘발랑’이 오면 ‘되바라진 아이’가 연상된다. 아래의 예처럼 말이다.
<홀랑/홀딱/훌렁+까지다>
  • 내가 안 떠날라고 헝게로 그 마빡 홀랑 {까진} 수리조합장이 그러데. 군청과 상의혀서 나루터에 집을 장만혀줄 팅게 장사나 혀보라고 말여. 수리조합장 아시겄지?《박범신: 겨울아이》
  • 굿 차릴 준비가 거의 되어가는데다 드디어 앞머리가 홀딱 {까진} 대머리 소자가 나타난 것이다.《박정요: 어른도 길을 잃는다》
  • 훌렁 {까진} 대머리인 이 영감님은 면의원이 되기 전까지는 지극히 온순한 사람이란 소문이었지만 면의원이 된 후로는 손바닥을 뒤집은 듯이 사람이 달라졌다는 것이다.《정한숙: iyeu도》
<발랑+까지다>
  • 영주는 한때 발랑 {까진} 아이라는 말을 들을 만큼 눈치가 빨랐고 어린아이답지 않게 자기보호본능에도 민감한 아이이기는 했었다.《김인숙: 한 여자 이야기》
  • 저희 반에 행실이 얌전하지 못한, 소위말하는 ‘발랑 {까진}’ 여자애가 있어요.《권지예: 유혹》
  • 말허자면 한몸땡이 안에 순진무구헌 동심 세계허고 발랑 {까진} 악동 세계가 의초롭게 공존허던 시절이었지.《윤흥길: 소라단 가는 길》
   그런데 북은 ‘홀랑, 홀딱, 훌렁, 발랑’과 ‘까지다’가 절대로 어울려 쓰이지 않는다. ‘절대로’라는 말을 써가면서 강조하는 이유는 그러한 쓰임을 찾을 수도 없고 일상생활에서 그렇게 사용하지도 않기 때문이다.
  • 발그레한 볼이 렴성재의 말대로 알아누웠던 탓인지 약간 {까졌다}.《리병수: 붉은 지평선》
  • 비록 볼은 {까졌으나} 눈매만은 어찌도 정기찬지 그를 어떠한 체형으로써라도 굴복시킬 수 없으리라는 믿음을 느끼게 한다.《박태민: 4번수》
   북은 남과 달리 ‘홀랑, 홀딱, 훌렁, 발랑’ 대신에 ‘볼’과 함께 쓰이고 있다. ‘볼’이 대머리처럼 벗겨진 것도 아니고 버르장머리 없는 아이처럼 되바리진 것도 아닐 텐데 ‘까지다’ 앞에 ‘볼’이 자리를 하고 있다. 이 이유는 ‘까지다’의 남과 북 사전 풀이를 비교해 보면 알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 《조선말대사전》
까지다1 [동]
   ① 껍질 따위가 벗겨지다.
   ② 재물 따위가 줄어들다.

까지다2 [동]
   지나치게 약아서 되바라지다. | 나쁜 애들과
   어울리더니 말투까지 {까질} 대로 {까졌다}.
까지다 [동]
   (살이) 빠지다. ∥ 볼이 {까져서} 홀쭉하다
   북에서는 ‘벗겨지다’와 ‘되바라지다’의 의미로 ‘까지다’를 사용하지 않고 있다. ‘살이 빠지다’의 의미로만 ‘까지다’를 쓰고 있다. 물론 《조선말대사전》에서 ‘빠지다’를 ‘(살이) 여위다’로 풀이하고 있다. 그러나 북에서는 ‘빠지다’는 전혀 사용하지 않고 ‘까지다’라는 말만을 쓰고 있다. 그래서 5년 만에 만난 북쪽 선생님이 내게 첫인사를 이렇게 했다.

   “완서 선생, 왜 이렇게 몸이 까졌어요? 어디 아팠어요?”

| 김완서 |

경기대학교 국어국문과와 동국대학교 대학원을 졸업하고, 세종대왕기념사업회 한국학연구원을 역임하였다. 현재 겨레말큰사전 책임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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