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김수현 / 겨레말큰사전 선임연구원
모르는 낱말을 만날 때나 낱말 간의 뚜렷한 의미 차이를 확인해 보고 싶을 때 우리는 먼저 <사전>의 뜻풀이를 찾아본다. 그런데 가끔은 국어사전에 제시된 뜻풀이 정보에 만족하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올림말 <혼행>을 찾아봤을 때가 그러했다.
요즘은 전통 혼례를 치르는 일이 드물어 <혼행>과 <신행>이라는 말이 낯선 말이 되어 가고 있다. 이들처럼 일상생활에서 자주 쓰이지 않는 말이 사전에서 풀이되었을 때, 우리는 그 정보를 아무 의심 없이 받아들이게 되는 경향이 있다. 먼저 기존 사전의 뜻풀이를 살펴보자.
[표준국어대사전]
혼행 (婚行) [명]
혼인할 때에, 신랑이 신부 집으로 가거나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감. ≒신행2(新行)[1].
[조선말대사전]
혼행 (婚行) [명] =신행.
신행 (新行) [명] 《민속》
결혼할 때 또는 결혼후 인차 신랑이 신부집으로 가거나 신부가 신랑집으로 가는 일. (=)혼행.
기본올림말의 차이만 있을 뿐 두 사전의 뜻풀이는 크게 다르지 않다. 그리고 두 사전 모두 <혼행>과 <신행>을 같은말(동의어)로 처리하고 있다. 그런데 이 두 낱말이 과연 사전의 풀이처럼 같은말(동의어)로 쓰이고 있는지는 한 번쯤 의심해 봐야 할 필요성이 있다. 전통 혼례의 관습은 지방마다 조금씩 다르기 때문에 그 용어가 달리 쓰일 가능성도 있기 때문이다.
- 우귀는 신행과 같은 뜻으로 신랑신부가 함께 신랑 집에 가는 것인데, 당일우귀, 3일 우귀 외에
7일, 1개월, 3개월, 1년, 3년 우귀 등 다양한 형태가 상황에 따라 선택되었다.
(한국민속의 세계2,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147쪽)
- 신부가 시집으로 오는 것을 우귀 또는 신행이라고 한다.(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35쪽)
위는 민속 용어 사전에서 <신행>을 설명한 내용의 일부를 옮겨 온 것이다.1) 찬찬히 읽어보니 기존 사전의 풀이와는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실제 쓰임은 어떨까? 아래 문학작품에 나타난 <신행>은 민속 용어 사전에서 설명하고 있는 것과 그 용법이 일치한다. 혼례식을 마친 신부가 신랑과 함께 신랑의 집으로 가는 것이 <신행>인 것이다.
- “너는 내 딸이다.” {신행} 첫날 폐백을 받으면서 그렇게 말한 시어머니는 그 뒤 정말로 그대로
대했다.《이문열: 영웅시대》
- 어제 혼례식을 올렸는데, 오늘 벌써 {신행이었다}.《하근찬: 야호》
그렇다면 같은말(동의어)로 처리된 <혼행>의 의미와 쓰임은 어떨까? 아래의 문학작품 속에서 나타난 <혼행>은 <신행>과는 그 개념이 사뭇 다르게 느껴진다. 문맥을 보면 '신랑이 혼례를 치르려고 신부 집으로 가는 것'으로 해석되기 때문이다.
- 그는 먼저 사당으로 들어가서 배례를 하고 어른들에게도 차례로 절을 했다. “관례를 시켜 놓으
니 제법 숙성하구나.” … {혼행길을} 떠나던 이튿날 새벽이었다.《이기영: 봄(1989)》
- 사모관대하고 흑화를 신어 예장을 갖춘 신랑은 몹시 긴장해서 과년한 티가 거의 나타나지 않
았다.… 납폐는 전날 밤에 보냈으니 … 승재는 그 화려한 {혼행을} 거느리고 … 처가에 당도했
다. 《박완서: 미망》
다시 말해, <신행>은 '전통 혼례에서, 혼례를 치른 신부가 신랑 집으로 가는 것'이고, <혼행>은 '전통 혼례에서, 신랑이 혼례를 치르려고 신부 집으로 가는 것'을 뜻하는 말로서 두 낱말은 구별해서 써야 하는 ‘다른 말’인 것이다. 기존 사전에서 이들을 같은말(동의어)로 풀이한 것은 잘못된 정보를 제공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이상의 내용을 종합하면, <신행>과 <혼행>의 뜻풀이는 다음과 같이 수정해 볼 수 있을 듯하다.
신행 (新行) [명]
전통 혼례에서, 혼례를 치른 신부가 신랑의 집으로 가는 일. [같은말] 우귀(于歸)①.
혼행 (婚行) [명]
=초행2(醮行).2)
초행2 (醮行) [명]
전통 혼례에서, 혼례를 치르려고 신랑이 신부의 집으로 가는 일. [같은말] 혼행(婚行).
[참고] 재행(再行). 삼행(三行).
※ 이 글은 글쓴이의 견해이며, 《겨레말큰사전》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밝힙니다.
1) 민속 용어 사전에서는 <신행>이 자세하게 설명되어 있는 데 반해 <혼행>은 설명되고 있지 않다.
2) <초행> 이후에 두 번째로 처가에 가는 일을 <재행>, 세 번째로 가는 일을 <삼행>이라고 한다. 관련 정보를 고려했을 때 기본올림말은 <초행>으로 하는 것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