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임 편찬위원장에게 듣는다 | |인쇄 |
“새 어휘 하나를 사전에 올린 다는 것은,
보석 하나를 캐어 간직하는 일과 같습니다.”
조재수 남측편찬위원장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이하 사업회)는 4월 23일 제35차 남측편찬위원회를 개최하고, 만장일치로 조재수 편찬위원을 신임 편찬위원장으로 선출하였다. 조재수 신임 남측편찬위원장은 한글학회에서 ‘우리말 큰사전’ 편찬을 주도하고, ‘국어사전편찬론’과 ‘남북한말비교사전’을 저술하는 등 평생을 국어사전 편찬에 힘써 왔다. 또한, 2005년부터 2008년까지 사업회 편찬실장으로 재직하면서, 사전 편찬을 위한 기초 작업과 편찬사업의 합리적 방향을 제시하는 등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에 열정과 헌신으로 기여해 왔다. 조재수 신임 남측편찬위원장을 만나 각오와 함께 앞으로의 계획을 물어본다.
1. 먼저 축하드립니다. 본격적인 집필이 시작되는 매우 중요한 시점에 남측편찬위원장 직책을 맡게 되셨습니다. 남측편찬위원장을 맡으신 소감 한 말씀 부탁드립니다.
다시 직책을 맡게 되어 마음이 무겁습니다. 편찬실장의 직책을 벗은 지 채 넉 달도 안 되었습니다. 갑작스런 사정에 따라 어쩔 수 없이 위원장 직을 맡게 되어 다시 마음을 가다듬는 중입니다.
여태까지 해 온 대로, 편찬위원으로 사전 원고 집필에 한 몫을 해 가면서, 위원장으로 꼭 해야 할 일에 대하여는 편찬 위원들 그리고 연구원들과 의논하여 처리할 생각입니다.
2. 《겨레말큰사전》의 실용성에 대해서 질문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겨레말큰사전》이 가질 가치와 유용성은 무엇일까요?
《겨레말큰사전》은 60년 간의 분단 시대 언어를 남과 북의 편찬학자들이 함께 정리하여 한 체계로 엮어 보자는 사전입니다.
이 사전의 실용성이라면 남과 북의 겨레말을 처음으로 공유하여 자유로이 이용할 수 있다는 데에 있을 것입니다. 이 사전 편찬으로 우리 겨레의 전반적인 언어 통일에 다가갈 수 있는 기틀이 마련되리라 봅니다. 또 이 사전 편찬의 성공은 민족 통일을 위한 각 분야의 공동 실천 사업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3. 이제 본격적인 집필 작업이 시작되었습니다. 3월 28일부터 4월 4일까지 1차 공동집필회의를 처음으로 가졌습니다. 공동집필회의를 하면서 느끼신 점과 앞으로 계획에 대해 말씀해 주십시오.
분단 60년에 남북의 편찬 성원들이 각 조(팀)별로 책상을 같이하여 각기 집필해 온 원고를 다듬고 보태는 일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큰 보람이었습니다. 서로의 언어 정서를 하나하나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자리였습니다. 이러한 언어 경험과 지식이 바로 이 공동 사전에 반영될 것입니다.
무슨 일이고 기대는 크나 성과는 더디게 쌓이는 법입니다. 이제 막 시작한 일입니다. 첫 공동 집필 회의를 마치면서 이런 속담을 떠올렸습니다. “첫술에 배부르랴”, “급하다고 바늘허리에 실 매어 쓰랴”였습니다.
넉넉지 않은 기간에 많은 분량의 집필을 해야 합니다. 그에 대한 전망이나 계획은 한 1년 정도의 결과를 보고 짚어볼 일이라 생각합니다.
4. 아직 합의되지 못한 ‘어문규범’문제는 어떻게 해결해 나가실 계획이신지요?
남과 북의 어문 규범 문제, 누구에게나 큰 관심사입니다. 이 사전 편찬에서도 어려운 과제의 하나입니다. 가장 쉬운 해결 방법은 어느 한쪽의 규범을 지켜 적용하는 것이겠지요. 그러나 그게 가능한 일이 아님은 누구나 잘 아는 사실입니다.
남북 공동 사전 편찬을 위해서는 어떤 형식으로든 단일안 마련이 필요합니다. 이 일을 맡아보고 있는 양측 ‘어문 규범 위원회’의 현명한 합의안 마련을 기다리고 있습니다.
이 문제에서 분명히 해 둬야 할 것은, 이번에 마련될 어문 규범안은 《겨레말큰사전》편찬을 위해 작성되는 잠정적인 단일 규범이지, 남북 전체 언어 규범으로 확정하는 안이 아니라는 점입니다.
5. 《겨레말큰사전》은 남북의 학자들이 공동으로 편찬하는 최초의 사전으로 학계는 물론이고 사회적으로 관심이 큰 사업이라고 봅니다. 따라서 《겨레말큰사전》 편찬사업에 직접 참여하고 있지 않은 학계 인사들이나 일반 국민들과의 소통과 공감대 형성이 중요하다고 생각됩니다. 이 문제는 어떻게 풀어갈 계획이십니까?
편찬의 진행 상황을 널리 알리고 협조와 조언을 구해 나가도록 하겠습니다. 처음부터 그래 왔던 것처럼 국립 국어원과 긴밀히 협조를 하고, 각 어문 단체 및
학계의 조언을 들어 반영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우리 편찬 위원들과 자문 위원들의 홍보 활동도 중요합니다.
6. 올림말 선정이 마무리 되었습니다. 그 결과를 볼 때 《표준국어대사전》 과 《조선말대사전》을 비교하여 《겨레말큰사전》이 갖고 있는 특징이라면 어떤 것이 있을까요?
언제 어떤 사전이든 새로 편찬하는 사전에는, 이미 나온 사전들을 밑자료로 이용하되 잘잘못을 가려 적용할 일과, 아직 실리지 못한 새 어휘를 널리 수집하여 올리는 일입니다. 기존 사전의 잘못은 바로잡고, 모자라는 것은 보태는 과정이라 하겠습니다.
《겨레말큰사전》은 남북 공통 어휘를 비롯하여 분단 이후 각각 불어난 어휘를 선정하여 약 30만 올림말을 목표로 했으나, 올림말 선정 결과 더 올려 잡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정확한 올림말의 범위는 1차 집필이 끝나야 윤곽이 드러날 것입니다.
여느 사전과 다른 이 사전의 특징을 말한다면, 남과 북의 사전에 따로 실려 있던 올림말들을 한 자리에서 두루 볼 수 있다는 점과, 지난 60년 간 남과 북의 사전에 실리지 않은 새 어휘라 할 지역어와 문헌 어휘를 되도록 많이 보이도록 하는 점에 있습니다.
새 어휘 하나를 사전에 올린다는 것은, 보석 하나를 캐어 간직하는 일과 같다고 봅니다. 되도록 많은 새 어휘 찾기와, 더해야 할 뜻갈래를 챙기도록 하겠습니다.
7. 지금까지 17차례의 공동편찬회의와 1차례의 공동집필회의를 개최했습니다. 북측 학자들과 이렇게 정례적으로 오랜 기간 만난 경우는 드문데요. 북측의 학계 분위기나 수준은 어떻다고 보십니까?
분단 이후 북측의 사전 편찬은 남측과는 달리, 국가 연구 기관에서 맡아 지속적으로 편찬하고, 여러 차례 새롭게 출판했습니다. 사전 편찬 전문 인력을 나라에서 길러 왔습니다.
사전 편찬의 경험을 서로 나누고 합하는 자리로서 남북 편찬회의, 집필회의 모두 참으로 진지하고 협조적인 분위기입니다.
상대방의 학문이나 연구는 서로 존중하고 이해할 대상이지 평가할 대상은 아니라고 봅니다.
8. 《겨레말큰사전》만 해도 5년째 편찬사업을 함께 해 오고 계신데요. 사전 편찬 작업에 함께하는 동료, 후학들에게 한마디 부탁드립니다.
우리 학계에는 추상적인 이론을 말해야 빛나 보이고, 그 이론의 토대가 되는 실제적인 자료를 대어 따지는 일은 낮게 보는 경향이 있습니다. 그래서 사전 편찬 같은 일은 연구 실적으로 보지 않아 이 일을 오래도록 하려 들지 않습니다. 사전 편찬자가 기본 어휘 하나를 풀이하고 정리하는 일이 논문 한 편 쓰는 일거리에 뒤지지 않는 데도 말입니다.
사전에서 다루는 모든 언어는 그 사회와 문화의 거울입니다. 사전 편찬이란 인문학, 자연과학 할 것 없이 그 모든 대상에 대한 보편적인 지식을 어휘 단위로
밝히는 일련의 작업입니다. 그래서, 사전 편찬인은 상식인이면서 전문가가 되어야 합니다. 괴테의 글에 ‘상식은 인류의 수호신’이라 한 글귀가 있습니다. 감히 이를 고쳐 ‘상식은 인류의 스승’이라 해도 좋을 듯합니다.
우리 사전 편찬인 여러분! 먼저 우리의 상식을 챙긴 다음에 전문 이론가가 되십시오. 우리말 사전 편찬에 취미를 갖고 정진하기 바랍니다. 이 일, 평생을 해도 다하지 못할 일이기에 이만한 직업 흔치 않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