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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창

_ 정도상 / 겨레말큰사전 상임이사

어떤 문명이든 그것이 다른 문명에 자연과 역사를 통해 물려받고,
부여한 천분을 근거로 정치적, 지적, 도덕적 강압을 행사하는 한,
인류를 위한 평화와 희망은 있을 수 없다.
한 민족의 문화적 특수성을 부정하는 것은
그 숭고성을 부정하는 것과 같다.
- 1993년 말리 대통령, 알파 우마 코나레 -

떤 문화든 고립된 섬일 수는 없다. 섬에 갇혀 혹은 높은 성을 쌓아두고 그 내부에서만 생성되고 발전된 문화란 인류역사에 존재하지 않았다. 모든 문화는 섬을 떠나 바다로 항해했으며 성을 넘어 길을 따라 이동했다. 그리하여 오늘날 우리가 소위 문화라고 부르는 인류의 재산이 만들어진 것이다. 지금도 끊임없이 문화는 이동하고 있으며 다른 문화와 다양한 형식으로 섞이고 있다. 문화의 이동을 막을 수 있는 것은 인류가 탄생할 때부터 지금까지 단 한 번도 존재한 적이 없었다.

것은 언어도 마찬가지였다. 한 지역 혹은 한 민족의 언어 또한 끊임없이 다른 언어와 섞이면서 발전을 거듭해 왔다. 불변의 언어, 고정적이고 정체된 완벽한 언어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우리말은 중국어와 만주어에 영향을 받았고, 일본어에 영향을 끼쳤다. 나중에는 일본어의 영향을 되돌려 받기도 했었다. 그런 관계 속에서 우리말 속에는 주변 지역의 다양한 언어적 영향이 숨겨져 있게 되었다. 기록을 통해 보듯이 언어는 탄생, 성장, 소멸의 길을 걸어왔다. 언어는 생물처럼 살아 움직였다. 어떤 언어의 무덤 속에는 여러 천년 동안 사용했으나 지금은 사용하지 않는 어휘가 바닷가에 쌓여 있는 조개껍질만큼이나 많이 담겨 있다. 반면에 어떤 언어는 소멸 위기에 처해 있으면서도 어휘의 창고 속에서 끊임없이 호출되기도 한다. 그러한 호출을 통해 어떤 어휘들의 소멸의 위기를 넘기고 새로운 생명력을 부여받기도 하는 것이 오늘날의 언어 현실이기도 하다.

국어를 포함한 세계의 모든 언어는 내적, 외적인 힘에 의해 끊임없이 변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부정하고 표준의 틀 안에 언어를 고정하는 것은 언어의 생물성과 다양성을 포기하는 것이며 언어의 발전을 근본적으로 가로막는 장애라고 생각한다. ≪겨레말큰사전≫은 명시적으로 선언하진 않았지만, 언어의 생물성과 다양성을 확보하기 위한 남북 언어학자들의 암묵적 합의가 있기에 첫발을 뗄 수가 있었다.

치의 최종단계는 언제나 문화로 발현된다. 폭력적 갈등과 군사적 충돌, 압제와 부당한 권력의 행사, 비민주성과 그에 따른 인간발전의 심각한 장애를 정치는 충분히 해결할 수 있다. 그러나 그 해결은 사실상 시작에 불과하다고 할 수 있다. 정치적 해결은 언제나 불완전한 상태로 남겨져 있기 마련이다. 그 불완전성을 해소하는 것이 바로 문화의 기능이었다. 문화는 갈등과 충돌 그리고 압제의 차이로 인해 발생한 상처를 인간발전과 사회발전의 지렛대로 삼아 새로운 문화를 창조해내는 능력을 갖고 있기 때문이다.

화롭게 함께 어울리고 더불어 사는 사회를 이루고자 한다면, 이는 ‘다르다’는 것에 근거한 가치(진리, 사상, 주의주장, 견해를 포함한)의 차이를 인정하고 다른 문화를 존중해야만 한다. 그것은 언어에서도 마찬가지다. 한 국가의 표준어가 그 국가 안의 다른 언어를 ‘비표준어’라고 억압할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도 없다. 표준어 때문에 여러 천년동안 사용해온 경상도 지역의 어떤 어휘가 하위언어 취급을 받고, 충청도 지역의 어떤 어휘가 사투리라고 낙인찍힌 경우를 우리는 수없이 목격해왔다. 그 자체로 수준이 낮고 배타적이며 하위 계층만 사용하고 질이 떨어져서 존중받을 가치가 없는 언어란 있을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특정지역의 어휘들이 국가에서 발간한 사전이나 국가가 공인한 교과서에서 추방당하고 있는 게 현실이었다.

겨레말큰사전≫은 한반도 남쪽 내부는 물론이고 북쪽 지역까지 포함하여 언어적 차이를 이질적이고 수용 불가능한 것, 표준어를 위해 소멸시켜야 할 대상이 아니라는 것으로부터 출발했다. 오히려 그 차이에서 긍정적 가치들을 발견하고, 나아가 그 차이에 생명력을 부여하기 위해 노력해왔다. 여기에는 그 어떤 정치적 의도도 개입되지 않았다. 오직 언어 자체의 생물과 같은 생명력에 의존하고 있을 뿐이다.

겨레말큰사전≫에 새롭게 등재될 10만여 개의 새어휘의 가치는 언어사적인 측면에서 논의해야할 정도로 귀중하다고 생각한다. 우리말이 국가의 공식언어가 된 지난 66년 동안 표준어(문화어)의 그늘 아래에서 그 지위를 상실해가던 어휘를 찾아 우리 겨레말편찬사업회는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한반도 남쪽과 북쪽 지역은 기본이었고, 중국의 연변지역, 중앙아시아의 카자흐스탄과 우즈베키스탄, 일본의 오사까 지역 그리고 사할린에 이르기까지 우리말의 흔적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라도 기꺼이 갔고, 그 곳에서 어휘 목록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우리는 그 어휘들에 온전한 사전적 지위를 부여하여 표준어와 동등한 가치와 생명력을 갖도록 할 것이다.

겨레말큰사전≫의 새어휘들은 다원주의에 그 바탕을 두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 어휘가 발현시켜온 결속에는 한반도를 비롯한 주변 지역에서 여러 천년 동안 살아온 민족 구성원들의 경험과 지혜 그리고 삶과 문화의 축적된 무늬가 담겨 있다는 것을 언제든 확인할 수 있을 것이다. 객관성과 보편성, 표준화는 언제나 진리란 여러 개가 아니라 하나라는 절대성을 요구해왔다. 인식과 윤리의 절대성, 객관과 표준의 절대성은 때때로 자가당착과 문화적 폭압을 생산해냈다. 인류의 역사가 수많은 곳에서 그것을 증거하고 있다.

런 의미에서 ≪겨레말큰사전≫의 새어휘들은 절대성의 폐허에서 피어난 작은 꽃들이다. 그 꽃들의 향기를 함께 나눌 날이 어서 오기를 소망해본다.

겨레말큰사전 새어휘

≪겨레말큰사전≫에서 새어휘는, ≪표준국어대사전≫(1999)과 ≪조선말대사전≫(1992)에 실리지 않은 모든 어휘를 가리킨다.
새어휘 조사는 문헌어, 지역어, 현장어 등 세 분야로 나뉘어 2006년부터 현재까지 진행되고 있다.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는 ‘우리 생활 현장에서 쓰고 있거나 썼던 말 가운데 민족 언어 유산으로서 가치가 있는 어휘·의미 자료를 현장 조사를 통해 빠짐없이 조사’ 한다는 원칙에 따라 약 10만여 개의 새어휘를 발굴할 예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