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이길재 / 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푸른색, 빨강색이 선명한 {꽃뱀이} 막대기에 둘둘 말려져 있다. 《신경숙: 밤고기》
초록빛 아오자이에 비친 브래지어 끈이 {꽃뱀처럼} 꿈틀거렸다. 《박영한: 머나먼 쏭바강》
요즘 말로 하자면 {꽃뱀이었다}. 유부남과 붙어놓고는 돈을 뜯었다는 것이다. 《김소진: 눈사람 속의 검은 항아리》
신경숙과 박영한의 소설에 등장하는 ‘꽃뱀’은 파충류이지만, 김소진 소설에 등장하는 ‘꽃뱀’은 포유류인 사람이다. 후자의 ‘꽃뱀’은 ≪우리말큰사전≫(1992)에서 ‘<남자에게 짐짓 접근하여 몸을 맡기고 금품을 우려내는 여자>를 일컫는 곁말’과 같이 풀이하여 처음 실은 낱말이다. 이후 ≪표준국어대사전≫(1999)에서는 후자의 ‘꽃뱀’과 함께 전자의 ‘꽃뱀’인 ‘피부에 알록달록한 빛깔을 가진 뱀’과 같은 뜻을 더하게 된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2009)에도 ≪표준국어대사전≫과 마찬가지로 ‘꽃뱀’의 첫 번째 뜻을
‘알록달록한 빛깔의 뱀’으로 풀이하고 있다.
그런데 필자가 기억하고 있는 꽃뱀은 막연히 ‘알록달록한 빛깔의 뱀’이 아니다. 신경숙의 소설 ≪밤고기≫에 묘사되어 있는 것처럼, ‘꽃뱀’은 ‘푸른색 또는 검푸른색 바탕에 빨강색 무늬’가 있는 왼쪽의 그림과 같은 뱀이다.
‘꽃뱀’을 단순히 그와 대응하는 한자어로 바꾸면 ‘화사(花蛇)'인데, 이는 ≪표준국어대사전≫에 ‘‘산무애뱀’을 한방에서 이르는 말’로 풀이하고 있다. ‘산무애뱀’은 ‘갈색 바탕에 검은색 또는 갈색 무늬가 많은’ 뱀이다. 네 개의 검은 줄무늬가 머리에서 꼬리까지 있는 뱀으로 ‘꽃뱀’과는 거리가 있어 보인다.
‘화사’가 사전에 처음 실린 것은 한글학회에서 간행한 ≪큰사전≫(1957)으로, ‘화사’를 다음과 같이 풀이하고 있다.
- 화사(花蛇)
- [이] ≪한의≫ 산무애뱀. 풍증(風症) 문둥병을 다스리고, 보신 장양제(補身壯陽劑)로 쓰임. 그 모양에 따라 흑화사(黑花蛇), 백화사(白花蛇), 흑질백장(黑質白章) 들이 있음.
≪큰사전≫에 의하면 ‘화사’는 세 가지 종류의 뱀, 즉 ‘흑화사, 백화사, 흑질백장’인데, 이들의 풀이는 다음과 같다.
- 흑질-백장(黑質白章)
- [이] ≪한의≫ 검은 바탕에 배에 희게 무늬가 있는 산무애뱀을 한의학에서 이는 말. ~.
- 흑화사(黑花蛇)
- [이] ≪한의≫ 먹구렁이를 한의에서 이르는 말. ~.
- 백화사(白花蛇)
- [이] ≪동≫ =산무애뱀.
따라서 ‘화사’는 살갗 모양이 다른 두 가지 종류의 ‘산무애뱀’과 ‘먹구렁이(누룩뱀)’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풀이에 의하면, 백화사는 ‘갈색 바탕에 검은색 또는 갈색 무늬가 많고, 네 개의 검은 줄무늬가 머리에서 꼬리까지 있는’ ‘화사’이며, ‘흑질백장’은 ‘검은 바탕에 배에 흰무늬가 아롱진’ ‘화사’이며, ‘흑화사’는 ‘밤색 바탕에 어두운 갈색의 가로무늬가 있고 배의 각 비늘에는 검은 무늬가 있는’ ‘화사’이다.
이 세 종류의 뱀의 특징을 한 마디로 아우를 수 있는 말은 ‘알록달록’이다. 즉 ‘화사’는 ‘알록달록한 살갗’을 가진 뱀들이다. 그런데 공교롭게도 ≪우리말큰사전≫ 이후에 나온 사전들에서 ‘꽃뱀’은 ‘알록달록한 빛깔을 가진 뱀’으로 풀이하고 있다. ≪우리말큰사전≫ 이후 사전 편찬자가 ‘꽃뱀’의 또 다른 뜻을 풀이하려고 ‘화사’를 ‘꽃뱀’으로 직역하였다면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꽃뱀’은 세간의 뉴스거리가 되어 ≪우리말큰사전≫에 실리기 훨씬 이전부터 필자가 써온 말인데, 이는 ‘율모기(유혈모기)’를 달리 부르던 말이다(물론 이러한 사실은 후에 알게 되었지만).
이미 사전에 실린 단어들의 뜻풀이를 고치기란 그리 녹녹한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이미 많은 사람들이 사전의 뜻풀이를 받아들여 그렇게 쓰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앞으로 간행될 사전에서는 ‘꽃뱀’을 풀이할 때 ‘<율모기>를 일상적으로 이르는 말’이라는 뜻을 더해야 할 것이다.
※ 이 글은 필자의 견해일 뿐이다. <겨레말큰사전>의 입장이 아님을 분명히 밝혀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