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는 토끼띤데요.”
“네? 토끼 뭐요?”

김기흥 KBS 정치외교팀 기자

지난 9월 20일 모처럼 민간단체의 많은 사람이 평양을 방문했다. 김정일 국방위원장의 건강이상설이 계속해서 제기되는 상황에서 북한의 심장부라는 평양을 민간단체가 대규모로 방문하는 것이어서, 게다가 금강산 피격 사건으로 사실상 중단됐던 민간단체의 대규모 방북이 재개된다는 의미까지 더해지면서 언론의 관심이 높을 수밖에 없었다.

서해 직항로를 통해 인천국제공항에서 출발한 인원은 기자단을 포함해 130여 명. 한 시간도 채 걸리지 않은 비행거리지만 비행기가 순항공항에 가까워질수록 모든 사람들의 시선은 창밖으로 쏠렸다. 마치 오랜 시간 아니 오랜 세월을 휘휘 돌아서 드디어 이곳에 왔다는 양……. 창 너머로 풍경은 그리 낯설지 않았다. 남녘의 들판이 그러하듯 드넓은 논과 밭 이곳저곳에는 여지없이 나지막한 산이 놓여 있었다. 차이가 있다면 개간을 해서 그런지 산은 곳곳에 붉은 황토 빛을 토해냈다.


오랜 세월을 휘휘 돌아서 도착한 듯

공항에 도착한 우리는 버스 4대에 옮겨 타고 북측의 안내에 따라 평양 한가운데 위치한 만수대 언덕으로 향했다. 초등학생으로 보이는 학생들이 그저 비로 계단을 쓸 뿐 북한 주민들의 모습은 좀처럼 보이지 않는 가운데 유독 우뚝 솟은 거대한 군상들은 나에겐 낯설었다. 북에 왔다는 것보다는 그냥 낯선 곳에 와있다는 느낌 정도였다. 하 지만, 짐을 푼 양각도 호텔에서는 상황이 달랐다. 바로 북측 사람들과 이야기를 할

수있었기에 평양에 왔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었다.

첫날 일정에서 이제 남은 것은 호텔에서의 환영 만찬. 북에서 제공한 저녁 식사 정도라고 생각하면 된다. 북한은 식량난이 심하니까 북에 가면 절대로 음식을 남기지 말라는 선배의 말에 주는 음식은 모두 비웠다. 북쪽 음식을 아주 잘 먹는 것이 신기했는지 남쪽으로 말하면 음식을 날라주는 접대원 동무가 나에게 말을 걸어왔다. “음식이 괜찮습니까?” “네 맛있는데요! 그런데 젊은 분이신 것 같은데 몇 살입니까? 보아하니 띠동갑 같은데?” “저는 토끼띤데요.” 하지만 접대원 동무는 “네? 토끼 뭐요? 띠…….” “아니 제가 75년생 토끼띠인데 나이가 어떻게 됩니까?” 여자 나이를 함부로 물어서 접대원 동무가 부끄러워서 그런가 생각했는데 나중에 알아보니 북쪽에서는 ‘띠’라는 개념이 없다는 것이다. 남쪽에서는 사용하는 무슨 띠 그리고 띠동갑이라는 표현을 북쪽에서는 모른다는 거다. 그제야 내가 지금 평양에서 밥을 먹고 있구나. 여기는 평양이었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쭉~ 냅시다!

이런 생각에 잠겨 있을 때 테이블마다 연달아 터지는 “쭉~ 냅시다!”, “조국통일 위해 쭉~ 냅시다.” 무슨 말인가 이리저리 머리를 돌리는 사이 상황으로 그 의미를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술을 마실 때마다 ‘건배’, ‘원 샷’할 때 북에서는 “쭉~ 냅시다!”라고 외쳤던 것이다. 하지만, 이어지는 상황은 나를 더욱 어리둥절하게 했다. 이어지는 “쭉~ 냅시다!”의 분위기에 힘입어 우리 테이블의 한 선배가 어색한 북한말로 접대원 동무에게 “한 잔 하시라우.” 말을 걸었는데 접대원동무의 말은 “일없습니다.” 일이 없긴 무슨 일이 없다는 것인가. 하지만, 북쪽에서의 ‘일없다’라는 말은 남쪽에서는 ‘괜찮다’라는 뜻이라는 설명에 ‘아, 그렇구나!’ 영어도 아닌 우리말을 쓰고 있는데 이렇게 서로 이해하

지 못하는 상황 아니 오해할 수 있는 상황이 연출될 수 있다는 사실 자체로 서로 떨어져 있는 50여 년의 시간의 틈새를 무시할 수 없다는 것을 새삼 느꼈다.

“중앙으로 꺾어 차기”…“연락했습니다.”

다음날 일정이 빡빡하기에 아쉽지만, 술자리를 빨리 파하고 호텔방으로 돌아왔다. 문득 북한의 조선중앙TV에서는 어떤 것을 방송하고 있을까. 호기심에 이끌려 전원을 켰는데 이게 웬일인가, 남아공월드컵 아시아 예선 남북 축구 경기가 중계되고 있었다. 이미 며칠 전에 한 경기라 결과를 알고 있었지만, 눈길을 뗄 수 없었던 것은 바로 해설자의 말들. “연락을 받은 000선수 중앙으로 꺾어 차기 했습니다.” 연락받은 선수? 공을 받은 선수가 크로스를 올린 것인데 북의 해설자는 이렇게 표현했다. 북에서는 프리킥을 ‘벌차기’로 크로스바를 ‘가로막대’, 크로스를 ‘중앙으로 꺾어 차기’, 패스를 ‘연락’으로 말한다고 한다. 만약 축구 중계를 보지 않은 상태에서 누군가 가로막대니 벌차기니 이런 말을 한다면 가로막대로 누구에게 체벌을 가한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북쪽에서는 지난 1966년부터 ‘말다듬기 사업’을 펼쳐 어려운 한자어, 일본식 용어 그리고 외래어를 우리말로 쉽게 고쳤다. 우리가 외국말을 그냥 들여와 사용하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할 때 북쪽에서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행동에 옮긴 것이다. 처음에는 낯설게 들리겠지만 누구나 그렇게 말한다면 그 말이 당연하게 들리지 않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다소 과장된 듯한 고음, 감정까지 담아

북쪽 사람들과 이야기를 하면서 낯설다는 느낌이 들게 하는 것은 그들이 사용하는

단어도 단어지만 그들의 말투라고 본다. 다소 과장된 듯한 고음을 많이사용하고 높낮이가 우리보다 두드러진다. 둘째 날 고 김일성 주석이 태어났다는 만경대를 가봤는데 거기 안내원 동지의 해설은 그야말로 한편의 오페라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김 주석이 항일투쟁을 했다는 부분에서는 안내원은 눈물까지 글썽이기도 했다. 그들의 그런 모습이 남쪽 사람들에겐 이해가 되지 않지만 그들에게 있어 그런 모습은 당연한 듯했다. 우리에게도 웅변이라는 것이 한참 유행일 때가 있었다. 웅변 또한 높낮이가 두드러지면서 감정까지 담아내는 표현으로는 제격이었다. 하지만, 요즘 웅변학원에 다닌다는 학생들은 찾기 어려울 것이다. 아마도 이런 웅변조의 말투는 아무래도 개인보다는 전체를 우선시하는 사회, 그리고 개인을 전체를 위해 동원하는 그런 사회에서 어울리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북한말… 제2외국어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로 양배추를 ‘거두배추’로 말하는 것처럼 같은 대상을 남북이 서로 다르게 표현하는 때도 있다. ‘하늘소’처럼 남쪽에서는 ‘곤충’을 의미하고 북에서는 ‘당나귀’를 의미하는 말도 있다. 그리고 ‘무슨 띠’, ‘띠동갑’처럼 남쪽에서만 사용되는 말들이 있다. 남과 북은 단어뿐만이 아니라 단어와 단어가 조합돼 문장으로 만들어져 일상생활에서 쓰일 때의 말투에서는 더욱 큰 차이를 보인다. 아마도 어떤 목적성이 강한 북쪽의 사회분위기 때문이 아닐까? 사회주의 혁명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기 위한 그리고 주체사상에 입각하며 민족적 자부심과 계급의식을 불러일으키기에는 북한의 언어 정책도 일조한 것으로 보인다.

남과 북, 시간이 가면 갈수록 이제 우리는 더 이상 ‘같은 말을 쓰는 한민족’이라는 표현을 쓸 수 없을 수도있다. 우리말이라는 범주로 남과 북을 하나로 묶을 수 없을 수도

있다. 아니 어쩌면 이런 상황이 지속된다면 북은 남의 말을 배우기 위해 그리고 남은 북의 말을 배우기 위해 서로의 말을 ‘제2외국어’로 지정하고 배워야 할 웃지 못 할 상황이 벌어질 수도 있다. 아마도 시험 문제는 이렇지 않을까? 다음의 북쪽 말을 남쪽 말로 해석(?)하시오

‘일없다고 한 접대원 동무에게 강떼 쓰면서 우림술 권하던 선배가 말밥에 올랐다.’
정답은 ‘괜찮다고 한 직원에게 생떼 쓰면서 과일주 권하던 선배가 구설수에 올랐다.’이다.


이런 비극이 벌어지지 않기를 빌면서…….

김기흥 / KBS 정치외교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