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큰사전》, 남과 북 진정한
소통의 다리 놓기를

정병국 / 국회의원(한나라당, 문화체육관광방송통신위원회)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 상임의장

요즘 한 개그 프로그램에서 북한 말투를 흉내 내 웃음을 자아내는 코너가 인기를 끌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다. 예를 들면, 북쪽에서는 "당신과 입맞추고 싶습니다."를 "움직이면 쏘갔어."라고 하고, "개가 아주 사납습니다."를 "삶으라우."와 같이 말한다는 식이다. 물론 재미삼아서 하는 것이긴 하지만 듣고 나니 좀 씁쓸했다. 누가 봐도 과장이 분명한데 이 코너가 웃음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마 남쪽 사람들의 보통 관념에 북한 사람들은 매우 호전적이어서 일상생활에서도 저와 같은 말투를 쓸 것으로 생각하는 사람이 적지 않기 때문일 것이다.

실제로 우리 국민이 접하는 북한 말이라는 것이 북의 공식매체를 통해서이다 보니 대부분 북한의 사회주의 체제를 선전하거나 남북 간의 대결 상황을 격앙된 말투로 반영하는 내용만을 접하게 된다. 그러나 실제로 북한 사람들을 만나 대화를 나누어보면 보통 평범한 북한 사람들이 쓰는 어휘와 말투가 남쪽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다는 점을 금방 알게 된다. 물론 남쪽 사람 입장에선 북쪽의 독특한 체제를 반영한 정치 용어의 뜻을 쉬이 알아듣기 어렵고 반대로 북쪽 사람은 남쪽의 과학 기술 용어와 부쩍 많아진 외래어를 알아듣지 못해서 몇 번의 확인 과정을 거치는 수고로움이 있다. 하지만, 억양을 비롯한 몇 가지 낯선 첫인상 빼고는 의사소통에 크게 무리가 없다.

수천 년을 함께 살아온 같은 민족으로서 이는 너무도 당연한데도 60여 년의 분단은

북한 사람들은 별스러운 생각과 별스러운 말투를 쓰며 살아갈 것으로 생각하게 하였다. 그만큼 남북 간 단절의 벽이 높았고 서로 생각과 말을 접할 교류가 없었기 때문이다. 국회 문화관광위원회에서 오래 일하면서 정치, 군사 이런 외형적인 힘보다는 문화의 힘이 가장 크고 근원적이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선진화의 종착점이 결국 문화 강국이라는 것은 이제 상식이 되었다. 바로 그런 문화적 관점에서 볼 때, 그리 멀지 않은 시간에 통일이 이루어진다면 가장 어려운 것이 바로 이 문화영역일 것이다. 남북이 서로 오랜 시간을 다르게 살아온 문화적 감성의 차이와 구체적 생활의 질감 차이일 것으로 생각한다.

이 문화적 차이를 가장 분명하게 반영하는 것이 언어이고 언어의 속뜻이다. 겉으로 소통에 큰 무리가 없어도 그 말이 내포하는 다양한 무늿결을 실감할 수 없다면 진정으로 뜻이 통했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남북의 문화 통합은 바로 여기에서 시작되어야 한다.

필자가 참여하고 있는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기본 출발점도 이것이라고 본다. 남과 북이 화해와 협력의 긴 과정, 여러 번 반복되는 만남을 통해 서로 깊이 이해하게 될 때 진정한 통일이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때로는 서로 낯을 붉히기도 하고 서운한 점도 적지 않게 느끼지만 그런 과정을 통해 남과 북의 차이를 확인하고 또 같은 점을 발견하면서 통합을 만들어 가는 과정 그 자체가 통일이라는 것이다.

남과 북은 21세기에 서로 손을 맞잡고 새로운 민족 통합의 길을 가야 한다. 지금 잠시 냉각기가 있는 듯하지만 긴 호흡에서 보면 결국 같은 운명 공동체로서 서로 이해하는 길로 들어서리라 생각한다. 말에 비유하자면 지금의 남북 상황은 서로 말을 잘 못 알아듣는 단계이다. 어휘를 몰라서가 아니라 서로 짐짓 모르는 체하는 것일 수도 있고, 또 어쩌면 상대방의 감성을 진정으로 이해하지 못한 것에서 비롯된 오해일 수도 있다.

통일은 긴 과정이겠지만 어느 순간 불시에 통합 과정이 매우 비약적으로 전개될 가능성도 배제할 순 없다. 그런 매우 급한 과정에서는 정치·경제적인 힘의 논리가 문화를 압도할 가능성이 크다. 소수자의 말은 사라지고 그 나름의 소중한 의미와 역사, 문화를 간직하고 있을 말의 유산이 증발해버릴 가능성이 크다. 그런 때를 대비하여 《겨레말큰사전》 공동 편찬 작업을 남북이 함께 진행하면서 지금부터 차분하게 서로 말을 깊이 있게 이해하고 서로 차이가 나는 용어나 표기들을 정리하여 단일안을 만들어 놓는 일은 매우 소중한 작업이라 할 것이다. 또한, 통일 이후 남북 간에 진행될 수많은 공동 작업에서 《겨레말큰사전》은 일정한 기준 역할을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의미를 적극적으로 이해하여 지난 17대 국회에서는 당시 여야 의원의 압도적 다수인 231명이 이 편찬 사업을 위한 정부 지원 법안에 찬성 의사를 표시한 것이었다.

겨레의 말은 곧 그 겨레의 얼을 담고 있다고 한다. 일제 강점기 시절, 우리 겨레의 말은 써서는 안 되는 불온한 말이 되었던 적이 있었으나 우리의 선조는 목숨을 바쳐가며 겨레의 말과 글을 지켜내었다. 60년 분단의 세월 동안, 겨레의 말은 이념과 체제의 대결 과정에서 또 다른 굴절의 시간을 버텨내어야 했다.《겨레말큰사전》편찬 사업은 또 하나의 국어사전을 만드는 것이 아니라 상처받은 우리 겨레의 말을 온전하고 풍성하게 발전시켜 가는 민족 통합 사업이다. 남과 북이 진정으로 소통하며, 서로가 서로를 온전하게 보듬어가는 문화적 통일의 길에 거는 기대가 참으로 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