같은 말, 다른 생각

김지혜(이화여대 북한학과 석사과정)

19살, 수시전형 원서를 내러 간 대학교에서는 지원자들의 경쟁률이 실시간으로 중계되는 전광판을 설치해 놓았다. 치열한 눈치작전이 펼쳐지는 그 곳에서 눈에 띄던 학과가 있었으니, 바로 ‘북한학과’. 내가 처음으로 북한을 접한 것은 그 전광판에서였다.

대학생이 되었다는 즐거움에 1학년을 보내고, 뜨거운 사랑에 빠져 2, 3학년을 보냈다. 친구의 소개로 나간 자리. 전공이 뭐냐고 묻는 남자의 질문에 “북한학과요~”라고 대답하면 어김없이 나오는 반응 첫 번째, “네? 북한..학과요? 그런 과도 있어요?”. 두 번째 바로 이어져 나오는 질문은 “북한학과에서는 뭐 배워요? 북한말 배워요?”. 북한학을 공부한지 7년이 다 되어가는 지금도 나를 처음 만나는 사람의 반응은 언제나 앞에서 말한 딱 두 가지이다. 주저리 주저리 내가 무엇을 공부하고, 왜 관심을 갖게 됐고, 북한말 한마디까지 친절하게 해주던 나였다. 하지만 토씨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질문을 받아오는 지금은 이런 질문에 너무나 힘이 빠져버린다. 도대체 왜 사람들은 ‘북한학과’에 다닌다고 하면, “북한말 배워요?”라며 묻는 것일까?

우리는 모두 북한을 너무 잘 안다. 세계 모든 나라 중에 우리와 가장 친숙하고 우리 동포로 느끼는 곳이 바로 북한이다. 이는 아마도 우리가 쓰고 있는 언어가 같아서일 것이다. 언어는 사고와 밀접한 관계를 유지할 뿐만 아니라, 인간 세상을 인식하는 방법, 즉 세계관까지 결정한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훔볼트(Humboldt) 같은 사람은 ‘한 민족의 언어는 곧 그 민족의 정신’이라고 말했는데, 이는 언어와 그 언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의 사고 방식 사이에는 깊은 관계가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이것이 남북 사이에 민족성을 느끼게 해줌과 동시에 큰 짐이 되고 있다는 점은 잘 깨닫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 우리는 말이 통하기 때문에 마음이 통하고 있다고착각한다. 하지만 남쪽 사람들이 베푼 친절에 “일없습니다”라고 말하는 북쪽 사람의 대답으로 상처받는 것이 현실이다. 또 남쪽 사람의 “아가씨”라는 말에 상처받는 북쪽 사람이다. 북한에서는 “괜찮습니다”라는 말이 “일없습니다”로 말해지고, 북한에서 말하는 “아가씨”는 여성동무들을 비하하는 발언이다. 그리고 같은 단어를 쓰고 있다하더라고 그 의미와 쓰임이 달라 생각지 않게 오해가 생기는 경우도 있다. “세대주”라는 말의 경우, 우리는 ‘한 가구를 이끄는 주장이 되는 사람’이지만 북한에서는 ‘일정한 집단이나 분야의 사업과 살림을 책임지고 맡아 하는 사람’을 비유적으로 이르는 말로 주로 한 집안의 가장, 곧 남편을 뜻한다. 또한 우리가 원한이 맺힐 정도로 자기에게 해를 끼친 사람이나 집단을 두고 말하는 “원수(怨讐)”를 북한에서는 “원쑤”라고 사용하고 있다. 예사소리의 어휘를 된소리로 바꿔 원수(怨讐)에 대한 격렬한 감정을 표현하는 것이다. 게다가 국가의 최고대표자인 ‘국가수반’을 이르는 말로 “원수(元首)”를 사용하고 있기 때문에 이것과의 차이를 두기 위해 “원쑤”를 쓰고 있다. 이렇게 같은 듯 다른 단어와 말들이 오히려 더 큰 혼란을 줄 수 있는 것이다.

우리가 영어를 공부할 때 영어 단어만 외워서는 유창한 영어를 할 수 없다. 오히려 문맥을 이해하고 모르는 단어를 유추하는 것이 더 쉽다. 그것보다 더 쉬운 방법은 영어권 나라에 가서 그 문화를 익혀 자신도 모르게 말이 스며드는 것이다. 북한말 역시 같을 듯하다.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이로, “삿대질”을 손가락총질”로, “볶음밥”은 “기름밥”으로 부르는 몇몇 단어들은 분명 우리가 북한말에 흥미를 갖고 재미를 느끼게 해준다. 하지만 자칫 이러한 단어들이 웃음거리로만 이용될까 걱정되는 것이 사실이다. 북한은 외래어 사용을 지양하기 때문에 ‘우리말 다듬기 사업’을 통해 주로 순수한 우리말을 사용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자연스레 옛말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단어

도 많다. “남새”(채소), “안해”(아내), “랄라리”(태평소), “부산 떨다”(설레발을 치다)등이 바로 그 예인데, 이렇게 아름다운 우리말이 자칫 촌스러운 말로 인식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남북 사이에는 “얼음보숭이” 그 자체 보다는 북한이 사회주의 체제 아래서 왜 외래어를 우리말로 풀어서 썼는지가 더 중요하다. 그리고 “얼음보숭이”의 흥미로움도 좋지만, 낡아빠진 “빵통”(열차의 화물칸)에 고단한 몸을 간신히 매달고 가는 북한인민들의 삶도 반드시 생각하였으면 한다. “꽃제비”(북한의 불우한 어린이들)의 인권과 “해방처녀”(미혼모)들의 소외된 삶도 느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또 북한사람들의 투박한 말투일지라도 그 말에 숨겨져 있는 내면의 따뜻함을 볼 수 있기를 바란다.

북한과 남한의 말이 같다는 것, 이는 우리를 가장 가깝게 하는 것이지만 서로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이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장애 요인이 될 수도 있다. 말이 같고 같은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북한 사람들을 잘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하지만 현실은 결코 그렇지 않다. 실제로 탈북한 사람들을 만나 이야기해보면 그들의 말을 쉽게 알아듣기 힘들다. 강한 말투와 억양 그리고 그들만의 은어(隱語)는, 같은 한글을 쓰기 때문에 의사소통에는 전혀 문제없을 것이란 오만함(?)을 한 번에 무너뜨린다. 특히 은어는 특정한 계층이나 집단의 구성원 간의 강한 유대감을 갖게 하려는 목적으로 통용되는 말이므로 그들의 생각과 문화를 알지 못하면 큰 이질감을 느끼게 마련이다. 사회주의체제가 가져온 언어정책, 그 정책 아래에서 전투적이고 고된 삶을 살던 그 사람들이 만든 말은 분명 우리가 현재 쓰고 있는 말과 다르다. 남과 북이 분단 50년이 넘는 동안 많은 변화를 겪었듯 언어도 함께 변화했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한다.

그러나 한편, 사실 우리도 인식하지 못하게 우리는 이미 ‘우리말’과 ‘북한말’로 구분

하고 있었는지 모른다. ‘우리’와 ‘북한’을 구분 짓는 것, 말이 같아서 가장 가까운 사이로 느끼면서도 어느 순간 차이를 두는 이 현실이 바로 분단이 가져온 모순이 아닐까. 이런 점에서 ‘겨레말’은 남과 북을 하나로 일컫게 해주고 통일의 단초를 제공해주는 적절한 단어라고 생각된다. 앞으로 ‘겨레말큰사전’이 단지 남과 북의 ‘언어’만을 정리하고 통합하는 것이 아니라 남과 북의 ‘언어생활’과 그들의 생각과 마음까지도 담아낼 수 있는 사전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