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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격적인 집필을 눈 앞에 두고
권재일 (남측편찬위원장, 서울대학교 교수)
2008년은 한글학회가 창립한 지 100년이 되는 해였다. 1908년 8월 31일 주시경 선생의 가르침을 받는 여름국어강습소 수료생을 중심으로 창립된 한글학회는 지난 100년 간 우리말과 우리글을 갈고 다듬고, 그리고 일제강점기에는 일본말에서 우리말을 지키고, 현대 사회에서는 물밀듯 밀려오는 서양 외국어로부터 우리말을 지켜 온 바로 우리말과 우리글의 지킴이였다. 이러한 한글학회의 업적으로 지금 우리가 쓰고 있는 한글맞춤법을 제정한 일, 표준어를 가려 뽑은 일, 우리말 큰사전을 펴낸 일을 꼽을 수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은 1933년에 맞춤법을 제정함으로써 우리의 글자생활의 규범을 정했고, 1937년에 표준어를 가려 뽑음으로써 언어생활의 규범을 정하였다. 그런데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광복 전에 미리 이 두 가지를 마련해 두었다는 점이다.
1945년 광복되어 우리말과 우리글을 되찾았을 때, 어떠한 혼란과 혼돈 없이 바로 국어 교사를 양성하고 국어 교육을 바로 시작할 수 있었던 것은 이 두 가지 규범을 미리 마련해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이 마련되어 있지 않았다면, 이를 정하는 데에 상당한 기간을 허비하고 국어 교육은 우왕좌왕하였을 것이다. 그리고 남북이 지금과는 달리 완전히 다른 규범을 정하여 오늘에 이르렀을 것이다.
나는 ≪겨레말큰사전≫ 편찬의 의의가 바로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어느날우리 앞에 나타날 국토와 정치, 경제의 통일의 날에 바로 활용할 수 있는 남북 언어를 통합하는 규범이 될 미리 준비해 둔다는 것은 값으로 따지기 어려운 ≪겨레말큰사전≫ 편찬의 의의일 것이라 믿는다. 이것이 학자, 작가는 물론 온 국민이 ≪겨레말큰사전≫에 깊은 관심과 격려를 쏟아야 까닭인 것이다.
지난 12월 13일부터 16일까지 평양에서 열린 제16차 남북 공동편찬회의로서 우리 사업은 만 4년이 지나게 되었다. 그간 우리는 본격적인 뜻풀이 집필을 위한 기반 작업을 마무리하였다. 사전에 올릴 올림말 선정을 대부분 마쳤으며, 문헌과 지역어 자료에서 새어휘를 꾸준히 찾아냈으며, 뜻풀이를 집필할 구체적인 요강을 확정하였다. 그리고 시범적으로 집필한 내용을 남북이 서로 바꾸어 보면서 거기서 드러나는 차이를 줄이려고 무던히 노력하였다. 그래서 이제는 서로의 생각과 마음을 눈빛만 보고도 읽을 수 있게 되어, 본격적인 뜻풀이 집필을 시작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른 것이다.
이번 제16차 남북 공동편찬회의에서는 2009년부터 4년간 해마다 8만 단어씩 집필해 나가기로 결정하였다. 대략 32만 단어가 되는 셈이다. 1년에 네 차례 열리는 남북 공동편찬회의 때마다 2만 단어씩 집필하기로 하였다. 남북이 각각 1만 단어를 집필하고, 이를 서로 교환하여 검토하여 있을 수 있는 차이를 찾아내어, 서로 이마를 맞대고 그 차이를 좁혀 가는 방식으로 뜻풀이를 완성해 나가기로 하였다. 남북이라는 공간의 제약을 극복하기 위한 최선의 방식이다.
‘감독’이라는 단어를 통해 이러한 뜻풀이 집필 방식을 소개해 보자. 이 단어에 대한 북측의 시범 뜻풀이는 다음과 같았다.
- ① 무엇이 잘못되지 않도록 살피고 단속통제하는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 ∥ 재산관리에 대한 {감독}. 시험{감독}. {감독의} 눈에 뜨이다.
- ② 제품의 질적상태를 검사하는 일 또는 그 일을 하는 사람. ∥ 품질{감독}.
- ③ 《체육》 선수훈련과 경기운영과정을 직접 책임지고 지휘하는 일 또는 그 일을 맡아하는 사람. | 체육경기는 {감독}들사이의 두뇌전이라고 한다.
- ④ 《연출가》를 남에서 이르는 말.
- ⑤ 《종교》 카톨릭교나 감리교의 높은 교직자, 교회의 관리, 의례 집행, 신도들에 대한 교리교육 등을 맡아한다.
- ⑥ 《력사》 리조 말기에, 궁내부에 속한 칙임벼슬. 수륜원, 철도원, 내장원, 비원, 광학국 같은데서 책임자의 일을 도왔다.
이 단어에 대한 남측의 시범 뜻풀이는 다음과 같았다.
- ① 일이나 사람 등이 잘못되지 않도록 살피어 단속하는 일. ∥ 시험 {감독}. 작업 {감독}. | 조합장과 최 전무도 조합의 {감독} 소홀로 다른 곳으로 전출이 됐으나 상무였던 아버지만은 어쩐 일인지 그대로 있게 되었다.≪전상국: 좁은 길≫ [비슷] 독찰.
- ② 살피어 단속하는 사람. ∥ 공장 {감독}. 현장 {감독}. {감독을} 맡다. / 그는 마치 옥희와 {감독} 사이에 무슨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였다.≪이기영: 고향≫
- ③ 영화, 공연, 경기 등을 지휘하거나 책임을 맡은 사람. ∥ 축구팀 {감독}. |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을 보았다.
- ④ 《종교》 감리교회 등에서, 교회를 관리하고 의례와 교육을 맡아보는 높은 직무, 또는 그 사람.
북측의 시범 뜻풀이를 검토한 남측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 - ①과 ②, ③과 ④는 각각 한 뜻갈래로 묶어도 좋을 듯하다.
- - 되도록 전문어 수를 줄이자는 그동안의 논의 내용을 감안하여 ③은 전문어로 보지 않는 것이 좋겠다.
- - ⑥은 별도 단어였다면 올림말 선정지침에 따라 삭제되었을 만한 것이므로 뜻갈래에서도 삭제하는 것이 좋겠다.
남측의 시범 뜻풀이를 검토한 북측의 의견은 다음과 같았다.
- - 뜻①과 ②를 합쳐야 할 것 같다.
- - 북에서는 체육분야에서 선수훈련과 경기운영을 맡아보는 사람을 《감독》이라고 하지만 예술분야에서 지휘하거나 책임을 맡은 사람을 《감독》이라고 하지 않는다. 이런 실정을 고려하여 뜻③을 체육과 관련시켜서만 풀이하고 갈라진뜻 하나를 더 주어 《< …연출을 맡은 사람 >을 남에서 이르는 말》과 같이 주석했으면 한다.
이렇게 서로 검토한 남북의 의견을 만나서 토론하여 단일화한 ‘감독’의 뜻풀이를 다음과 같이 마무리하였다.
- ① 일이나 사람 등이 잘못되지 않도록 살피어 단속하는 일, 또는 그런 일을 맡은 사람. ∥ 시험 {감독}. 작업 {감독}. 품질 {감독}. 현장 {감독}. {감독을} 맡다. | 조합장과 최 전무도 조합의 {감독} 소홀로 다른 곳으로 전출이 됐으나 상무였던 아버지만은 어쩐 일인지 그대로 있게 되었다.≪좁은 길≫ / 그는 마치 옥희와 {감독} 사이에 무슨 밀접한 관계가 있지 않은가 의심하였다.≪고향≫ [비슷] 독찰.
- ② 《체육》 선수 훈련과 경기 운영 과정 등을 직접 책임지고 지휘하는 일, 또는 그런 일을 맡은 사람. ∥ 축구팀 {감독}. | 체육경기는 {감독}들 사이의 두뇌전이라고 한다.
- ③ <영화, 공연 등을 연출하거나 책임을 맡은 사람>을 남에서 이르는 말. | 나운규 {감독의} 영화 <아리랑>을 보았다.
- ④ 《종교》 감리교회 등에서, 교회를 관리하고 의례와 교육을 맡아보는 높은 직무, 또는 그 사람.
지난 4년간 남북의 편찬위원회는 쉽지 않은 합의를 많이 이루어 냈다. 그 결과 이제 새해부터는 사전의 본격적인 뜻풀이를 집필하게 되었다. 하나하나 단어마다 뜻풀이를 합의해 나간다는 것이 결코 쉽지 않음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지금까지 남북이 이룬 집필을 위한 합의 사항에 따라 차근차근 집필해 나갈 것이다. 여기에는 다음과 같은 두 가지가 바탕이 되어 있음은 물론이다. 첫째는, 남북의 편찬원들이 함께 쌓은 신뢰 또는 신심이다. 둘째는, 남북 편찬원들의 열정과 정성이다.
우리는 2013년까지 ≪겨레말큰사전≫을 세상에 펴낼 것이다. 이를 위해 우리는 최선을 다할 것이다. 지켜보는 여러 분들의 긍정적인 관심과 따뜻한 성원을 거듭 기대한다.
권 재 일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및 대학원 언어학과를 졸업하여 문학박사 학위를 받고, 현재 서울대학교 인문대학 언어학과 교수로 재직 중이다. 2005년부터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회의 단일어문규범위원회 위원장을, 2008년부터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한국어통사론>, <한국어 문법의 연구>, <한국어 문법사>, <언어학과 인문학>, <인문학의 학제적 연구와 교육>, <남북 언어의 문법 표준화>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