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 찾은 겨레말 | |인쇄 |
“허참, 그놈 간풀어지게 노는구먼!”
이길재 (겨레말큰사전 새어휘팀장)
“크나는 아아들이사 쌈도 하고 {간풀게} 놀아야 큰사람이 된다 카기는 하더라마….(=커가는 아이들이야 싸움도 하고 {간풀게} 놀아야 큰사람 된다고 하기는 하더라마는….)”《박경리: 토지》
<토지>의 한 대목이다. 다른 말들이야 어지간히 그 뜻을 알 수 있지만 ‘간풀다’는 그 뜻을 쉽게 짐작하기 어렵다. 서희의 몸종 봉순이가 한 많은 세월을 돌이켜 보며 열한 살짜리 꼬마신랑의 모습을 그려내는 <토지>의 한 대목을 읽다 보면, ‘간풀다’가 무슨 말인지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다.
“내가 열여섯에 시집을 갔는데, 가니께 신랑 나이가 열한 살이더마. 게다가 우찌나 {간풀던지} 여름이믄 또랑에서 미꾸라지 잡노라고 옷이 흙에 범벅이 되고 겨울이믄 얼음판에서 온종일 미끄럼을 타는 바람에 바지 밑바닥이 성할 날 없었고 날이믄 날마다 연날리기, 연실에 손 비이기는 일쑤고 그래가지고 돌아오믄 이눔으 가씨나야! 니 때문에 손 비었다 하믄서 머리끄뎅이를 잡아끌고, 그래도 서방님이라구 말대꾸 한분 못하고 살았지.”《박경리: 토지》
‘옷에 흙 범벅, 바지 밑바닥에 구멍내기, 연실에 손 베기, 제 각시 머리채 잡기’ 등 열한 살 꼬마신랑은 온갖 말썽을 다 피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봉순의 긴 회한 속에서 개구쟁이를 연상케 하는 꼬마신랑의 철없는 행동은 밉살스럽기도 하지만, 때론 귀엽고 살갑게 비춰지면서, ‘간풀다’라는 한 단어로 표현된다.
‘간풀다’는 남과 북에서 간행된 어느 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은 겨레말이다. 굳이 표준어나 문화어에서 그와 비슷한 뜻을 갖는 단어를 찾아 보자면 <표준국어대사전>의 ‘짓궂다’와 북녘에서 간행된 <조선말대사전>의 ‘장난궂다’를 들 수 있다. ‘짓궂다’는 [장난스럽게 남을 괴롭고 귀찮게 하여 달갑지 아니하다]로, ‘장난궂다’는 [장난기가 있거나 또는 매우 많다]로 풀이되어 있다. ‘짓궂다’의 풀이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짓궂다’가 갖는 행위의 결과는 ‘달갑지 아니한’ 것이다. 그러나 ‘간풀다’의 장난스러운 행위의 결과는 달갑지 아니한 것도 사실이지만, ‘간풀은’ 행동을 하는 사람을 좀더 ‘친근하고 살갑게’ 느껴지게도 한다는 점에서 ‘짓궂다’와 다르다. ‘장난궂다’는 ‘간풀다’가 갖는 ‘친근하고 살가운’ 정서적 의미를 담아내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 뜻이 일치하지 않는다. ‘간풀다’와 말꼴이 비슷한 ‘감풀다’가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려 있기는 하나, [거칠고 사납다]로 풀이되어 있어 ‘간풀다’와는 그 뜻이 사뭇 다르다.
‘간풀다’의 말맛은 온갖 말썽을 다 피우며 마당에서 놀고 있는 손자 녀석을 흐뭇한 눈길로 바라보며 혼잣말처럼 주워섬기는 우리네 할아버지의 말 한마디에서 쉽게 느껴 볼 수 있다.
“허참, 그놈 간풀어지게 노는구먼!”
이처럼 ‘간풀다’는 너무 짓궂어서 밉살스럽다는 뜻으로도 쓰이는 말이지만, 그러한 ‘간풀은’ 행동이 귀엽고 살가울 때에도 쓰는 말이다. ‘간풀다’는 주로 전라남도와 <토지>의 배경 지역인 경상도의 남해, 하동 등지에서 쓰이는 겨레말이다.
“나가 젊었을 직에 얼매나 {간풀았는지} 앙가?”
(=내가 젊었을 적에 얼마나 {간풀었는지} 아는가?)
“참 그놈 {간풀게} 놀아쌌틍마 일내 못씨게 풀레 뿔데.”
(=참 그놈 {간풀게} 놀아쌓더니만 끝내 못쓰게 풀려 버렸데.)
‘간풀다’와 비슷한 뜻을 갖는 겨레말로 ‘개구지다’와 ‘개궂다’를 들 수 있는데, ‘개궂다’는 이미 ‘짓궂다’의 <경북> 방언으로 <표준국어대사전>에 실려 있는 말이다. ‘개구지다’ 또한 ‘간풀다’와 마찬가지로 아직 어떤 사전에도 실려 있지 않은 겨레말이다. ‘개구지다’는 주로 전라도 지역에서는 흔히 쓰이는 말인데, 요즘 들어서는 인터넷 공간에서도 쉽게 찾아 볼 수 있다.
“씨름이며 닭싸움이며를 하느라 한참 동안 {개구지게} 놀고 난 아이들이 비녀봉으로 칡이나 캐러 갈까 하고 둑을 내려설라치면….”《이서하: 서점 앞에서》
‘개구지다’는 그 뜻이 [장난이 심하거나 짓궂다]로 풀이될 수 있는 겨레말로, <조선말대사전>의 ‘장난궂다’와 비슷하기는 하나 정서적 의미를 고려해 보면 ‘간풀다’와 가장 비슷한 말이다. ‘개구지다’가 ‘개구쟁이’의 말뿌리 ‘개구-’와 ‘-지다’가 결합하여 ‘개구지다’가 되었는지, ‘개구지다’의 ‘개구-’가 ‘-쟁이’와 결합하여 ‘개구쟁이’가 되었는지 그 선후 관계를 알 수는 없지만, ‘간풀다’의 말뿌리 ‘간풀-’과 ‘-쟁이’가 결합하여 만들어진 ‘간푸쟁이’는 ‘개구쟁이’와 가장 비슷한 뜻을 갖는 겨레말이다.
‘간푸쟁이’는 ‘간풀쟁이’에서 ‘ㄹ’이 탈락한 것인데, 이는 ‘바늘’과 ‘-질’이 결합한 명사 ‘바늘질’의 ‘ㄹ’이 탈락하여 ‘바느질’이 되는 것과 같은 소리의 변화이다. ‘개구지다’와 ‘간풀다’, ‘개구쟁이’와 ‘간푸쟁이’는 서로 비슷한 말이기는 하지만 같은 말은 아니다. ‘간풀다’와 ‘간푸쟁이’는 ‘개구지다’와 ‘개구쟁이’보다 장난의 정도가 훨씬 심하다.
어쨌든 ‘간풀다, 간푸쟁이, 개구지다’는 우리 겨레가 살려 써야 할 소중한 언어 유산이며, 지켜나가야 할 겨레말이다.
※이 글은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의 민족화해(통권 39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