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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남측 대표야!
박선영(겨레말큰사전 연구원)
9박 10일 간의 힘든 일정을 마치고 방학과 같은 달콤한 휴식 뒤에 출근을 했더니 회의 상황을 소개해 달라는 원고 청탁이 기다리고 있었다. 솔직히 다시 회상하고 싶지 않을 정도로 힘들었던 데다가 학교를 졸업한 이후로 글이라고는 억지로라도 써 본 적이 없는 나로서는 전혀 반가울 리 없었다. 하지만 곰곰이 생각해보니 회의를 다녀 온 후 내가 친구들에게 들려주었던 이야기를 단지 형식만 바꾼다면 여러 사람들이 재밌게 읽을 수 있는 글이 될 것 같다. 열흘씩이나 한국을 떠나 도대체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해 하는 지인들에게 나는 진지하면서도 재밌게 상황을 설명해 주었던 것이다. 도대체 무엇을 쓸까 고민했던 나지만 나는 이미 그 대답을 알고 있었던 듯하다.
‘가슴띠’는 속옷인가 아닌가
‘가슴띠’는 남측에서는 ‘브래지어’라고 한다. 우리 엄마는 가끔 ‘부라자’라고도 하지만. 북측에서 검토해 온 ‘가슴띠’의 뜻풀이는 아래와 같다.
가슴띠 [명]
녀성들이 가슴모양을 곱게 하기 위하여 젖가슴에 띠는 띠. 무명이나 나일론 등으로 신축성 있게 만든다.
나는 뜻풀이가 마음에 들지 않았다. 모양을 곱게 하기 위한 것보다는 보호하는 역할을 더 많이 하는 것인데 저 뜻풀이만 읽어보면 무슨 장신구 같은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팬티가 엉덩이 모양을 곱게 하기 위한 것은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나는 ‘보호한다’는 내용을 추가하고 또 ‘속옷’이라는 말도 꼭 있어야 한다고 주장했다. 엄연히 속옷 가게에서 팔고 있고, 우리가 흔히 ‘속옷’을 생각할 때 팬티와 함께 떠오르는 것이니까. 그러나 북측의 최병수 선생님의 의견은 달랐다. 그것을 과연 옷으로 볼 수 있느냐며 그럼 양말, 모자, 장갑도 옷이냐 따지셨다. 그러한 견해의 차이가 남북의 차이인지, 남녀의 차이인지, 아니면 지극히 개인적인 것인지는 알 수 없다. 결국은 최병수 선생님께서, “녀성들이 더 잘 알겠지.”라고 하시며 나의 의견을 적극 수용해주셨다. 수정된 뜻풀이는 이렇다.
가슴띠 [명]
가슴을 감싸는 여성용 속옷. 가슴을 보호하고 가슴모양을 곱게 한다.
나는 뜻풀이가 수정되는 것을 보면서 한 가지 무서운 사실을 깨달았다. 만약 북측 선생님께서 “남측은 어떨지 몰라도 우리는 그것이 전혀 속옷의 개념이 아니다. 그렇게 되면 영 어색하다.”라고 했다면 내 의견을 계속 주장할 수 없었을 것이다. 혹은 만약 내가 “잘 모르시겠지만 남측에서는 이것을 남자들도 사용하니 ‘녀성들이’라는 말은 뽑아주십시오.”라고 했다면 어땠을까? 서로의 상황과 언어 현실을 전혀 모르기 때문에 집필 회의 때 상대측 한두 사람이 하는 말을 전적으로 신뢰하고 그것이 북측, 혹은 남측 전체의 상황과 언어 현실이라고 이해
할 수밖에 없다. 한 사람의 역할과 책임이 너무나도 크다. 하지만 그런 만큼 일을 하면서 사명감 또한 갖게 되는 것 같다. 그래, 내가 남측 대표야! 나중에 겨레말큰사전이 완성되면 친구들에게 또 한 번 자랑하면서 얘기해줘야겠다.
“너네 ‘가슴띠’가 뭔지 알아? 나 아니었으면 하마터면 그거 액세서리가 될 뻔했어.”라고.
박선영
1982년생
고려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졸
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의 유쾌한 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