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편찬 현장 | |인쇄 |
협력하여 선을 이루다
김완서(겨레말큰사전 책임연구원)
지난 3월 첫 조별 집필회의가 열리던 평양에서 나와 함께 할 북측 조장 이름을 보고 난 ‘허걱’이라는 말이 먼저 나왔다. 젊은 사람이 조장을 맡을 거라는 예상을 깨고, 사전에 관록이 쌓이고 쌓여 사전에 관해선 견줄 대상이 남측의 조재수 위원장님 외에는 없어 보이는 정순기 선생님이었기에 내 입에서 나온 ‘허걱’은 너무도 당연했던 것이다.
북측의 조장 명단을 본 선생님들은 내게 한마디씩 건넸는데, 각 팀장님들과 동료 선생님들의 반응은 아래와 같았다.
늘 나를 놀려먹는 김강출 팀장님 왈, “열심히 해봐. 잘 된다는 보장은 없지만…. 하하하”
소리없이 나를 놀려먹는 임보선 팀장님 왈, “음~~, 잘해 봐.”
도덕없는 이대성 선생님 왈, “집필요강 회의로 2년 넘게 정순기 선생님과 쌓은 내 인맥을 김완서가 날로 가져갔다.”
그리고 한용운 실장님 왈, “내가 옆에서 도와줄게.”
그렇게 내 염려 반 다른 사람들의 염려 반 속에 첫 조별 집필회의를 하였고, 난 정순기 선생님의 카리스마에 밀릴지도 모른다는 염려 속에 그분과의 첫만남을 가졌다.
그러나 정순기 선생님은 내 염려와는 달리 당신의 생각과 주장을 나에게 조곤조곤히 설명하며 설득하려 하셨고, 사전에서는 한참 후배인 내 말을 귀담아 들어주는 모습을 보이셨다. 그렇게 화기애애한 분위기 속에 첫 집필회의를 마쳤고, 난 정순기 선생님의 매력에 흠뻑 취한 채 귀국을 했다.
그리고 3개월 후, 나는 두 번째 집필회의와 정순기 선생님과의 두 번째 만남을 가졌다.
매정스런 회의 일정 때문에 나는 정순기 선생님과 짤막한 인사만을 교환한 후 바로 자리에 앉아 풀이에 대해 합의를 하기 시작했다.
큰 탈 없이 합의를 진행하던 중, 한 단어에 이르자 정순기 선생님이 풀이에 대해 지적을 하시며 논의를 해보자고 하셨다.
갑남을녀 [감남을려] (甲男乙女) [명]
(갑이란 남자와 을이란 여자라는 뜻으로) 평범한 사람들을 이르는 말. | 나는 역시 사람 사이에 처하기를 즐거워하고 사람을 그리워하는 {갑남을녀의} 하나요.《이양하: 신록예찬》 [비슷] 필부필부①.
정순기 선생님의 지적은 이랬다.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풀이가 와닿지 않기 때문에 친절한 설명이 아니라는 것, ‘평범한 사람들’이라는 풀이가 한발 더 앞서 나간 것 같다는 것이었다.
설명을 듣고 보니 풀이가 좀 엉성한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그리곤 정순기 선생님은 풀이 수정안을 내놓으셨다.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 김선생은 어쩌면 좋겠어요?”
시작은 하였으나 매듭을 짓지 못하시고 나에게 넘겨버리는 정순기 선생님의 태도에 순간 난 당황했다.
“선생님, ‘다른 사람들과 다를 것 없는’이라고 하면 좀 약한 것 같으니까 ‘별’이라는 말을 넣어 ‘다른 사람들과 별 다를 것이 없는’이 어떠세요?”
나의 이 제안에 정순기 선생님은 쾌히 동의한다는 특유의 말투로 답하셨다.
“그럽시다.”
그리고 난 다시 매듭을 지으려 고심 끝에 말했다.
“보통 사람들 어떠세요?”
“그럽시다.”
그 순간 나는 성경의 한 구절이 불현 듯 떠 올랐다.
“협력하여 선을 이루다”
남과 북이 합의하여 만들어낸 뜻풀이는 기존 사전의 것보다 더 친절하고 주관적 입장에서 봐도 손색이 없는 뜻풀이였다.
평범한 사람들을 이르는 말 → 다른 사람과 별 다를 것이 없는 보통 사람을 이르는 말.
이런 과정을 거쳐 약 2000개의 올림말에 대해서 합의를 보았고, 7박 8일의 회의 일정을 마쳤다. 그리고 회의를 마친 그날 저녁 식사를 끝내고 나는 정순기 선생님과 함께 고생하신 김영렬 선생님께 고맙다는 인사와 작별 인사를 하러 갔다.
내 인사를 반가이 받아주신 정순기 선생님은 주변에 누가 듣는 사람도 없는데 내 귀에 당신의 입을 바싹 갖다 대시곤 나지막이 말씀하셨다.
“김선생, 다음번엔 아기사진 갖고 와요. 가족 사진도 갖고 오고요. 같이 한번 봅시다. 하하하”
김완서
동국대학교 대학원 졸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연구원
현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책임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