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강호제 / 이화여자대학교 통일학연구원 연구위원
대부분의 나라들처럼 최근 북한의 최대 관심사는 경제발전이다. 특히 1990년대 중반, 극심한 경제 침체 현상을 겪은 북한의 입장에서 빠른 경제성장을 위해 사활을 걸 수밖에 없다. 2012년을 기점으로 강성대국의 대문에 들어서겠다는 계획 속에서도 경제강국 건설이 최우선 과제로 제시되고 있다. 2000년 7월에 정식화된 ‘과학기술 중시사상’은 과학기술을 발전시켜 경제를 빠른 속도로 성장시키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다. 실제로 북한이 표방하고 있는 경제발전 전략은 ‘국방공업을 앞세우고 경공업과 농업을 동시에 발전시킨다는 것’이다. 다른 부문보다 앞선 기술력을 보유하고 있는 국방공업을 통해 경제발전을 꾀하겠다는 것이다.
그런데 북한과 과학기술을 연결시키면 많은 사람들이 낯설어한다. 이는 언론보도를 통해 나오는 북한의 영상이 너무 남루하기 때문이기도 하고, 북한 사람들의 일상 생활 수준이 우리와 비교해서 너무 낮기 때문이기도 하다. 그래서 북한이 과학기술을 통한 경제발전을 이야기하면 대부분 실현성이 낮다고 평가절하한다. 과학기술 발전과 경제가 직결되는 것이 현대사회의 특징이기 때문에 정치적 수사로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이지 구체적인 실천 방법을 마련하여 이런 주장을 하는 것이 아니라는 판단이다. 하지만 최근 두 차례씩 진행된 핵실험과 인공위성 발사시험이 상당한 수준의 과학기술력을 요구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떠올리면 북한과 첨단 과학기술이 그렇게 어색한 조합이 아니라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게다가 해방 직후부터 북한 지도부가 과학기술 발전을 위해 상당히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는 것과 1960년대 초에 북한 경제가 달성한 높은 경제 성장률이 과학기술의 뒷받침으로 가능하였다는 역사적 사실을 떠올린다면 최근의 경제발전 전략이 단순한 선전선동용 구호만은 아니라고 판단할 수 있다.
계획경제를 운영하고 있는 북한은 신년 공동사설을 통해 지난해의 활동을 평가하고 그해의 활동 계획을 밝힌다. 올해 신년 공동사설에는 ‘CNC화, CNC기술’이라는 알파벳 표기가 그대로 실려 많은 사람들의 이목을 끌었다. ‘Computer(ized) Numerical Control’의 첫 글자를 따서 만든 CNC는 기계설비를 만드는 기계장치인 ‘공작기계’ 중에서도 ‘컴퓨터를 통해 수치를 제어하여 작동시키는 공작기계’를 가리키는 말이다. 정확하게 말하면, 컴퓨터 기술을 활용한 수치제어장치를 장착하여 기계를 지능적으로 자동제어함으로써 빠른 속도로 복잡한 형상을 높은 정밀도로 제조하는 지능화된 공작기계를 가리켜 CNC공작기계라고 부른다.
북한 말은 구체적인 것에서 시작하여 점차 추상화되는 경향이 있다. 북한을 대표하는 ‘주체’라는 말도 과학기술이나 경제 부문에서 구체화되어 점차 정치, 사상 부문으로 확대되면서 추상화된 말이라 할 수 있다. 처음에는 연료, 원료, 기술, 인력 등의 자립을 뜻하던 ‘주체’가 정치, 사상, 군사 부문까지 확대되었던 것이다. 올해 공동사설에서 사용한 ‘CNC화, CNC기술’도 처음에는 최첨단 공작기계를 가리키는 말이었지만 점차 추상화, 일반화되어 이제는 ‘컴퓨터로 조정되는 기계장치 일반’, 혹은 ‘자동화된 생산설비’를 가리키는 말이 되었다.
원래 CNC공작기계는 이를 번역한 ‘자동수자조종장치’로 불렸다. 하지만 2~3년 전부터 그냥 CNC라고 불리기 시작하였다. 그 시점은 고성능 CNC공작기계에 해당하는 ‘5축 CNC공작기계’를 자체적으로 개발한 다음이라고 볼 수 있다. 여기서 ‘축’이라는 것은 공작기계가 움직일 수 있는 자유도를 뜻하는데 축수가 많아질수록 정밀도나 가공속도가 높아지므로 축수가 높아질수록 성능이 높아졌다고 볼 수 있다. 보통 축수를 가지고 ‘2-3/4-5/6-8/9이상’ 4단계로 CNC공작기계의 성능을 구분하는데 이 당시 북한의 기술수준은 두 번째 단계 끝에 도달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2010년 9월에는 4단계에 해당하는 9축 공작기계까지 만들었다고 발표하였다. 번역어보다 CNC라는 영어표현을 그대로 사용하면서 기술 수준이 이전과 대폭 달라졌다는 것을 나타냄과 동시에 이를 외부에서도 잘 느낄 수 있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리고 무조건 우리말로 번역해서 쓰려는 강박관념을 버리고 외래어를 그대로 수용함으로써 유연성이 높아졌다는 것을 강조한 효과도 있었다.
사실 과학기술 용어는 정확한 의미를 표현해야 하므로 번역하기 쉽지 않다. 하지만 과학기술의 발전이 경제발전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다는 인식을 갖고 있던 북한 지도부는 해방 직후인 1949년 2월부터 교육성 산하에 ‘학술용어사
정위원회’를 설치하여 학술용어를 가다듬었다. 그리고 웬만하면 우리말로 번역하려는 경향성은 1980년대 말을 기점으로 바뀐 듯하다. 주로 최첨단 과학기술 부문부터 외래어가 그대로 사용되기 시작하였는데 IT부문이 대표적이다. 1990년에 개원한 ‘조선콤퓨터센터(KCC)’의 이름에 외래어가 그대로 쓰였다. 이런 변화는 김일성보다 김정일이 주도하였던 것 같다. 북한에서 CNC공작기계를 처음 제작하는 데 성공한 1980년대 후반에 김일성은 ‘수치
조종반, 가공중심반’ 등이 일본식 이름이라고 지적하면서 이를 우리말로 바꿀 것을 지시하기도 하였다.
1986년에 처음으로 완성된 현대적 수자조종선반은 ‘구성 104호’라로 불렸고 이는 1988년부터 ‘104호분공장’에서 본격적으로 대량생산되기 시작하였다. 이 당시 북한은 사회주의권 전체의 몰락과 함께 찾아온 자연재해 등으로 인해 경제가 급격히 나빠지기 시작하였다. 대부분의 공장은 가동률이 30%까지 떨어졌다. 당연히 재정상태가 급격히 나빠져 제대로 된 지원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하지만 공작기계 부문에 대한 지원은 끊기지 않아 1995년에는 상당히 발전한 수준의 CNC공작기계인 ‘구성 10호’가 개발되었다. 이는 1990년대말, 2000년대 초에 외국으로 수출되기도 하였다.
오늘날 전세계 CNC공작기계 생산시장은 5~10여개의 국가가 독차지하고 있다. 고성능 공작기계가 있어야 생산설비를 만들기 때문에 전세계의 모든 공장들은 이들 몇 개 국가에 크게 의지하고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최근 북한의 CNC공작기계 제작 기술은 최소 10위권 이내, 높게 잡으면 5위권 이내에 들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기술을 활용하여 낙후된 생산설비들을 일거에 최신 설비로 바꾸게 되면 북한의 경제는 급격히 살아날 수 있게 된다. ‘직방도달, 단번도약, 연속비약’ 등의 구호를 통해 빠른 경제성장을 추구하고 있는 북한으로서 신년 공동사설에서까 지 강조했던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다만 이런 식의 설비교체에 많은 자원이 들어갈텐데 지금처럼 군사, 안보적 위협이 상존하게 되면 군사비의 비중을 낮출 수 없어서 경제발전을 위한 자원을 충분히 확보하기 쉽지 않다. 물론 외국과의 협력도 쉽지 않다. 따라서 북한의 입장에서 본격적인 경제발전을 위해 한반도의 평화체제 정착이 무엇보다도 중요한 시점이다. 비록 지금은 서해에서 군사적 충돌을 일으켰지만 항구적인 평화체제를 만들려는 의지가 북한 지도부에게 매우 많다고 추정할 수 있다. 현재의 충돌이 끝나면 급격히 긴장이 완화되었으면 하는 바램을 버릴 수 없는 이유이다.
| 강호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