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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 우체통

시 받아쓰기

20년 가까이 ‘시를 짓’던 시간이 있었다. 그러나 요즘 와서 생각해보니 시는 짓는 게 아니라, 쓰는 것이다. 그게 그거 아니냐고 말할지 모른다. 하지만 다르다. 한자어인 ‘작문’을 그대로 우리말로 풀어 쓰다 보니 ‘글을 짓다’가 되고 ‘작시’는 ‘시를 짓다’가 된 것은 아닌가 싶다. 특히 시는 허구인 소설과는 달리 내 마음에 일어나는 생각과 느낌을 붙잡아 글로 옮기는 일이기 때문에 ‘쓰다’라는 표현이 걸맞겠다.
소설을 쓰기 위해선 뛰어난 상상력이 필요하고 시를 쓰기 위해선 면밀한 관찰력이 필요하다. 물론 소설을 쓰는 데 있어서도 경험과 함께 면밀한 관찰력이 중요하고 또 시를 쓰는 데 있어서도 어느 정도 허구적 상상력이 필요하긴 하다. 하지만 시는 시인의 마음을 드러내는 것이기 때문에 없는 이야기를 지어내어 말하기는 어렵다. 시인 자신이 아닌 또 다른 시적 자아를 내세워서 말한다 하더라도 그게 곧 시인의 목소리이고 보면 없는 것을 지어내는 일은 아니라고 본다.
우리말에 “본다”, “만져본다”, “들어본다”, “맡아본다”, “맛본다” 는 말이 있는데 이는 눈으로만 관찰이 이루어지는 것이 아님을 말하고 있다. 시는 그래서 머리로 쓰는 일이 아니라 온몸으로 쓰는 일이다. 온몸으로 보고 듣고 느낀 것을 옮겨 쓰는 일인 것이다. 그러고 보면 그냥 ‘쓴다’는 표현을 ‘받아 쓴다’라고 해야 옳을 것도 같다.
때로 가만히 관찰만 해도 내가 처해 있는 상황이 시를 들려주는 경우가 있다. 내가 바라보는 대상이 나에게 시를 들려주는 경우가 있다. 나와 얘기를 나누는 사람의 말이 곧 시인 경우가 있다. 내가 시를 짓는 능력이 있어서가 아니라 면밀하게 관찰만 해도 시를 쓸 수 있다는 말이다. 받아 적기만 하면 되니까.
나는 요즘 어머니의 ‘말’을 곧잘 받아 적는다. 어느 날 비가 몹시 내렸다. 어머니께 비가 많이 내린다고 말씀드렸다. 어머니께서는 농담을 잘 하신다. 그 날도 내가 드린 말씀에 어머니는 농담하시듯 “냅둬라.”라고 대꾸를 하신다. ‘냅두다.’는 표준어가 아니다. 우리말 큰사전을 찾아보니 전라도 사투리라 한다. 조선말대사전을 찾아보니 전남사투리로 나와 있다. 그나저나 어머니의 이 말씀과 함께 이 상황을 그대로 옮기면 시가 되겠다 싶었다. 나는 곧바로 이 상황을 짧게 압축하여 ‘받아 적었다’.

 졸작 어머니의 힘 전문

어머니는 농담으로 하셨겠지만, 순간 내 머리 속에는 농담 그 이상의 묵직한 진리가 느껴졌다. 마치 높은 깨달음을 얻은 스님들이 주고받는 선문답 같은 느낌도 들었다. 내가 냅두지 않고 어쩌랴. 하늘이 알아서 하는 일을. 냅둘 수밖에 없는 일이다. 어머니라고 이를 모르시랴. ‘하늘일은 하늘에 맡겨두고 너는 네 일이나 하여라.’ 혹은 ‘궂은 날이 있으면 좋은 날도 있단다.’ 하시는 말씀 같기도 하였다.

어쨌건 어머니께서 이 ‘냅둬라’를 ‘내버려 두어라’ 매끄러운 표준어로 표현하셨다면 이만한 울림이 있었을까? 어머니의 다듬어지지 않은 이 ‘말’에는 야생의, 날것의 싱싱한 힘과 지혜가 담겨 있다. 졸작 한 편 더 소개하겠다.

졸작 푸르른 욕 전문

이 역시 어머니의 말씀을 ‘받아 쓴’ 것이다. 농사꾼에게 어린 모종은 자식과 같다. 그 어린 싹을 돌보면서 타들어갔을 어머니의 속은 기어이 육두문자를 내놓으신다. 그것도 하느님의 영역인 날씨에게. 마치 날씨라는 불한당에게 매 맞고 들어온 고추모종 어린 자식 역성들듯이 말이다. 그 모습이 조금도 상스럽지 아니하였다. 어머니의 그 말씀들은 오히려 푸들푸들 살아있는 생물체로 느껴졌다.
어머니가 하신 ‘말’은 표준어를 기준으로 정리되어 있는 국어사전에는 없거나 있다 해도 그 의미를 온전히 풀어놓은 게 없다. 책을 통하여, 혹은 사전을 통하여 익힌 말이 아니다. 노동 속에서 고단한 삶속에서 익힌 말이다. 머리로 지어서, 다듬어서 하는 말이 아니다. 그래서 어머니의 말은 살아있다. 살아있는 지혜와 진리가 배어있다.
이후로도 머리를 쥐어짜서 시를 ‘짓기’보다 내 어머니와 같이 노동하고 고뇌하고 부대끼며 살아가는 이웃과 푸르게 살아있는 것들의 ‘말’을 잘 보고 듣고 맛보고 느끼고 ‘받아 쓸’ 것이다.

복효근사진

| 복효근 |
1991년 계간 『시와시학』으로 등단하여, 편운문학상, 시와 시학 젊은 시인상을 수상하였다. 시집으로는 『당신이 슬플 때 나는 사랑한다』,『버마재비 사랑』,『새에 대한 반성문』,『누우 떼가 강을 건너는 법』,『목련꽃 브라자』,『마늘촛불』과 시선집 『어느 대나무의 고백』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