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조재수 / 겨레말큰사전 남측 편찬 위원
글자를 맞추어 말을 적는 법을 ‘맞춤법’, ‘철자법(綴字法)’, ‘정서법(正書法)’이라 한다. 한글을 맞추어 말을 적는 규칙이 ‘한글 맞춤법’이고 북의 ‘조선말맞춤법’이다. 한자에는 한자 정서법이 있고 영어 등에는 알파벳 철자법(스펠링)이 있다.
오늘날 쓰고 있는 ‘한글 맞춤법’의 기본 원칙을 되새겨볼 필요를 느껴 여기에 세 가지를 인용해 본다.
한글 맞춤법은 표준말의 각 형태소를 소리대로 적되 그 원형을 밝힘을 원칙으로 한다. <한글 맞춤법 총론 1항>(한글학회. 1980.)
한글 맞춤법은 표준어를 소리대로 적되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 <한글 맞춤법 총칙 1항>(문교부 고시 제88-1호. 1988. 1. 19.)
조선말맞춤법은 단어에서 뜻을 가지는 매개 부분을 언제나 같게 적는 원칙을 기본으로 하면서 일부 경우 소리나는대로 적거나 관습을 따르는것을 허용한다. <조선말규범집 총칙>(북, 국어사정위원회. 1987.)
모든 규칙이나 법규는 지키기 위해 만든다. 규정과 법규는 원칙이 잘 지켜져야 하고 예외적인 허용 사례는 최소화해야 그 체계나 질서가 흔들리지 않는다. 한글 맞춤법도 그 원칙이 존중되고 잘 지켜져야 한다. 낱말 적기에서, 소리대로 적되 형태소의 원형을 밝힘을 원칙으로 한다든지, 어법에 맞도록 함을 원칙으로 한다든지, 뜻을 가지는 매개 부분을 언제나 같게 적는 원칙을 기본으로 한다는 위의 세 규정은 표현은 달라도 그 정신은 같음을 알 수 있다. 말의 각 형태소를 소리대로 적되 그 원형을 밝혀 적는 것을 원칙으로 한다는 사실이다.
한글 맞춤법도 교통 법규와 마찬가지로 온 국민이 지켜야 할 규칙이다. 교통 법규를 자기 편의대로 적용할 수 없듯이 한글 맞춤법도 개인이나 집단이 자기 편의대로 적용해서는 안 될 일이다. 한자의 획이나 영어 스펠링을 정확히 쓰려고 애쓰듯, 우리말도 바르게 적는 노력이 필요하다.
문교부는1956년 최현배 선생 지도 아래 최초로 ‘우리말 말수 사용의 잦기 조사’를 하였다. ‘말수
잦기 조사’를 요즘에는 한자 용어로 ‘어휘(語彙)
빈도(頻度) 조사’라 한다. 고속도로 등에 ‘안개 잦은 곳’과 ‘사고
잦은 곳’이 있다. ‘사고 잦은 곳’을 요즘에는 ‘사고 다발 지역’이라 한다. 잦으면 많이 일어나는 것인데 꼭 ‘
다발(多發)’이란 한자어로 고쳐 써야 할까?
‘잦다’에는 ‘자주 있다’는 뜻과 ‘여러 번 거듭되는 동안이 짧다’를 이르는 뜻이 있다. 거듭되는 동안이 짧다는 것은 동작의 횟수가 빠르다(급하다)는 뜻이다. 잦은 기침, 잦은 숨결, 잦은 다듬이질, 잦은 절구질 등이 그러하다.
국어사전에 ‘잦은’을 뿌리(어근)로 한 올림말이 더러 있다. 두 발을 잦게(빠르게) 떼어 걷는 ‘잦은걸음’, 무엇을 잇달아 빠르게 두드리거나 치는 ‘잦은마치’, 잇달아 자주 뀌는 ‘잦은방귀’, 국악 용어로 빠른 가락이나 장단을 이르는 ‘잦은가락’, ‘잦은몰이’, ‘잦은장단’ 등이 있다. 그런데 이 가운데 국악 용어들은 그 표기가 일정하지 않다. ‘잦은’과 ‘몰이’의 표기가 그러하다. |주| 아래 보기에서,
<큰사전>은 한글학회가 편찬한 큰사전(1929~1957)과 우리말 큰사전(1992)
<국악대사전>은 장사훈(1916~1991) 저 국악 대사전(세광음악출판사. 1984)
<표대>는 국어원이 편찬한 표준국어대사전(1999)
<북>은 북에서 편찬한 조선말대사전(1992)
잦은몰이 <큰사전><국악대사전> : 자진모리 <표대> : 잦은모리 <북>
잦은가락 <큰사전><북> : 자진가락 <표대>
잦은염불 <큰사전><국악대사전> : 자진염불 <표대>
잦은장단 <큰사전><북> : 자진장단 <표대>
잦은한잎 <큰사전><국악대사전> : 자진한잎 <표대>
[참고] ‘늦은가락’, ‘늦은한잎’은 <큰사전>, <국악대사전>, <표대> 일치함.
중몰이(-장단) <큰사전><국악대사전> : 중모리(-장단)<북><표대>
휘몰이(-장단) <큰사전><국악대사전><북> : 휘모리(-장단) <표대>
<큰사전>과 장사훈 저 <국악대사전>은 각 형태소의 말밑을 밝혀서 ‘잦은’과 ‘몰이’로 적었다. ‘잦은한잎’은 옛 국악 가곡에서 가장 빠른 형식의 곡을 이르는 말로 한자어로는 ‘삭대엽(數大葉)’이라 한다. 여기 ‘몰이’란 급하게 몰아가는 장단을 이른다. ‘휘몰이’는 가장 빠른 속도로 처음부터 급하게 몰아가는 장단이다.
국어원의 <표준국어대사전>은 아마 국악인들이 쓰는 입말을 따라 ‘잦은’을 ‘자진’으로 ‘몰이’를 ‘모리’로 적은 듯 하다. 형태소의 원형을 밝혀 적은 ‘잦은몰이’를 ‘자진모리’의 잘못이라는 식으로, 국악 용어의 모든 ‘잦은~’을 ‘자진~’의 잘못, ‘~몰이’를 ‘~모리’의 잘못이라 풀이했다.
북에서는 ‘잦은모리’, ‘중모리’는 ‘모리’로, ‘휘몰이(-장단)’는 ‘몰이’로 바르게 적던 것을 <조선말대사전> 증보판(2006)에서 ‘휘모리(-장단)’로 후퇴하여 모두 ‘~모리’로 적었다.
국악 용어가 일부분이나마 다른 전문어와 마찬가지로 우리 사전에 올려진 것은 <큰사전>(1929~1957)부터였다. 전문가의 의견을 수렴한 것으로 안다. 장사훈(1916~1991) 저 <국악대사전>(세광음악출판사. 1984)은 국악 용어와 그에 관한 자료를 집대성한 첫 국악 용어 사전으로 알고 있다. 이 사전에서 국악 용어의 표기를 옛 <큰사전>을 따른 점을 눈여겨볼 일이다. 그런데 국악인들은 써온 버릇소리대로 ‘잦은’을 ‘자진’으로, ‘몰이’를 ‘모리’로 적기를 고수하는 모양이다.
전문 용어의 표준화를 생각할 때 선배들이 바르게 닦아놓은 용어를 잘못으로 돌리는 일은 신중해야 한다고 본다. 설령 ‘자진모리’로 쓰는 국악인도 그 설명에서는 ‘잦은 빠르기로 몰아가는 장단이나 곡조라 할 것이다. ‘늦은가락’, ‘늦은한잎’도 ‘느진가락’, ‘느진한잎’이라 하는지? 낱말 형태소의 원형을 밝혀 적어 잘 이끌어 온 ‘잦은몰이’, ‘중몰이’, ‘휘몰이’ 등을 잘못으로 돌리지 말고 오히려 되살려 갔으면 한다.
‘돌실라이’의 ‘돌실’은 전남 곡성군 석곡면의 ‘석곡(石谷)’의 원래 이름이며, ‘샛골나이’의 ‘샛골’은 전남 나주군 다시면의 한 마을 이름이다. ‘-라이/-나이’는 ‘
-낳이’를 잘못 적은 것이다.
우리말 ‘낳다’에는 아이나 알 따위를 태어나게 하는 ‘낳다’와 솜, 털, 삼껍질 따위로 실을 만들거나 그러한 실로 천(피륙)을 짜는 ‘낳다’가 있다. 모시를 낳고, 무명, 삼베를 낳는 모든 과정의 일이 바로 길쌈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무명을 낳고 손으로 길쌈하던 것을 지금은 기계로 짜내고 돈 주고 사 입게 되는 세상이다. <이기영: 고향>(어문각. 1947/1933)
*모친도 무명을 잘 앗고, 특히 한산 생모시를 잘 낳아 어딜 가도 솜씨 자랑이 끊이지 않은 채 평범하게 살아온 촌부였다. <이문구: 장한몽(최종회)>(창작과 비평. 1976)
‘돌실낳이’는 돌실 마을에서 낳은(짠) 삼베나 그 길쌈이고, ‘샛골낳이’는 샛골에서 낳은(짠) 무명베나 그 길쌈을 가리키는 말이다. 현지인들의 발음에 좇아 언론과 조사자들이 ‘돌실라이·돌실나이’, ‘샛골나이’ 등으로 적어 온 듯 하다.
‘낳이’에는 섬유에서 실을 뽑는 ‘실낳이’, 천이나 베를 짜는 ‘천낳이·베낳이’가 있다. ‘방적(紡績)’은 ‘실낳이’, 방직(紡織)은 ‘천낳이’ 또는 ‘베낳이’에 해당한다.
천의 감[재료]에 따라 명주낳이, 무명낳이, 삼낳이, 모시낳이 등이 있는데 아무렇게나 짠 막치 무명을 ‘막낳이’라 한다.
또 어느 철에 낳은(짠) 천이라는 말로 ‘봄낳이’, ‘여름낳이’가 있고, 어디에서 낳은(짠) 천이라는 말로 ‘돌실낳이’, ‘샛골낳이’, ‘안동낳이’, ‘한산낳이’ 등이 있다. <큰사전>에 ‘-낳이’의 풀이 끝에는 ‘고양(高陽)낳이’, ‘강진(康津)낳이’를 예로 보였다.
북의 <조선말대사전>은 고양 지방에서 생산되는 무명을 초판에서 ‘고양나이’로 올렸다가 증보판(2006년)에서는 ‘고양낳이’로 바로잡았다.
<문세영>, <큰사전>에서부터 오늘날의 모든 국어사전에 ‘수나이’가 올라 있다. 천 두 필 짤 감을 주어서 한 필은 받고 한 필은 짠 삯으로 주던 것을 이르는 말이다. 이 또한 ‘수낳이’로 고쳐 실어야 할 것으로 본다. 앞 형태소 ‘수-’는 그 말밑(어원)이 떠오르지 않지만.
‘낳이’는 아래 인용례와 같이 ‘하다’와 결합해 동사로도 쓰인다.
*명주낳이하느라구 눈배린(눈 버린) 생각하믄(생각하면) 진작 못 뛰쳐난 게 한이디오(한이지요). <손소희: 남풍>(어문각. 1996/1963)
‘낳이’를 ‘나이/라이’로 적는다면 위에 들어 보인 여러 관련 낱말들의 표기를 어떻게 해야 할까? 이런 혼란 때문에 맞춤법 규정의 총칙에 ‘낱말의 각 형태소를 소리대로 적되 그 원형을 밝혀 적는 것’을 원칙으로 세운 것이다.
‘돌실라이/돌실나이’, ‘샛골나이’를 ‘돌실낳이[돌실라이]’, ‘샛골낳이[새꼴라이]’로 바로잡아 익히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