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김완서 / 겨레말큰사전 책임연구원
바쁘다. 바쁜 일상이다. 맞벌이 부부에게 아침만큼 바쁜 시간은 없다. 애들 깨우고, 씻기고, 옷 입히고, 밥 먹이고…. 애들을 어린이집에 보내고 출근하려면 이 모든 일들을 일사불란하게 후다닥 해치워야 한다. 여기서 조금만 틀어지면 그날은 100% 지각이다. 그래서 평일 아침은 너무나 바쁜 나머지 전쟁을 치루는 기분마저 든다.
회사에 오면 또 바쁘다. 이래저래 쌓여 있거나 밀린 일을 처리하느라고 정신 사나울 정도로 업무 시간이 후딱 가버리고 어느새 퇴근 시간이다.
퇴근 후 집에 와도 바쁨은 떠나질 않는다. 애들 저녁 먹이고, 씻기고, 놀아주고, 재우려고 애쓰다 보면 두세 시간이 훅하고 지나간다. 애들 자는 시간이 조금이라도 늦어지면 내일 아침은 더욱 분주해진다. 그래서 ‘애들이 일찍 자 주는 것이 효도다’라는 말이 나온 것 같다.
이상이 ‘바쁘다’에 담겨 있는 기본 의미이다. 남과 북의 사전 모두에서 ①번 의미로 채택했다는 것이다.
표준국어대사전 |
조선말대사전 |
바쁘다 ① 일이 많거나 또는 서둘러서 해야 할 일로 인하 여 딴 겨를이 없다. |
바쁘다 ① 일이 많거나 급히 해야 할 일로 겨를이 없다. |
그런데 ‘바쁘다’의 북쪽 용례를 찾아보면 남쪽에서는 이해하기 힘든 용례들이 나온다.
- 그렇지만 자동차 기중기로 25도까지 들어준 상태에서는 권양기의 힘으로 들 수 있습니다. 다만 한계점을 극복할 때까지 권양기를 세우지 않으면 됩니다. 권양 제동기가 견디여 내기 {바쁘니까요}.《최성진: 높이 솟은 탑》
- 그는 힘겨웁게 일하는 옥이 쪽으로 다가 와서는 “{바쁘지} 않아요?”하고 물으면서 옥이의 삽자루에 손을 내밀었다.《허춘식: 노래》
- “도적잠을 자다가 헤뜬 게 아니요? 회의를 하다 말구 어델 나가는가 말이요?”“헤뜬 게 아니라 저… 참기가 좀 {바빠서}…”마동석은 아랫배 근방을 움켜쥐고 아이들처럼 울상을 지어보이였다.《변희근: 뜨거운 심장》
위의 용례들을 읽어보면 ①번 풀이를 대입할 수가 없다. 그러므로 사전에 있는 나머지 풀이와 위의 용례가 서로 맞는지 살펴 볼 필요가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는 남쪽에서만 쓰이는 ‘바쁘다’의 의미를 아래와 같이 4개로 한정하고 있다.
- ① 일이 많거나 또는 서둘러서 해야 할 일로 인하여 딴 겨를이 없다.
- ② 몹시 급하다.
- ③ 한 가지 일에만 매달려 딴 겨를이 없다.
- ④ 어떤 행동이 끝나자마자 곧의 뜻을 나타낸다.
어느 것 하나 위에서 든 북쪽 용례에 해당하는 의미가 없다. 즉, 북쪽 용례에 있는 ‘바쁘다’의 의미는 남쪽에서는 쓰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남쪽 화자들에게 낯선 ‘바쁘다’의 의미를 확인하려면 ‘바쁘다’ 대신에 ‘힘들다’를 넣어서 읽어보면 된다. 그러면 의미가 명확하게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있다.
북쪽은 남쪽과 달리 ‘바쁘다’를 ‘힘에 부치거나 참기가 어렵다’다는 의미로 사용하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남과 북은 ‘힘들다’에서도 의미 차이를 보이고 있다.
표준국어대사전 |
조선말대사전 |
힘들다 ① 힘이 쓰이는 면이 있다.
② 어렵거나 곤란하다.
③ 마음이 쓰이거나 수고가 되는 면이 있다. |
힘들다 ① 힘이 쓰이여 없어지다.
② 어렵거나 곤란하다. |
이런 차이 때문에 대학 입학을 준비하는 남과 북의 수험생들에게 아래와 같은 동일한 질문을 하면 같은 의미이지만 서로 다른 표현의 답을 할 수 밖에 없다.
질문: 요즘 공부하는 것 어때?
남쪽 학생의 답: 공부하기가 힘듭니다.
북쪽 학생의 답: 공부하기가 바쁩니다.
※ 이 글은 광주광역시 교육청 소식지 <광주교육 12월호>에도 연재되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