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정희원 /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
《겨레말큰사전》 남북공동편찬위원회 회의에 참석차 2014년 10월 30일부터 5일간 평양을 다녀왔다. 이번 방북은 거의 5년 만에 이루어진 것이기에 더욱 뜻 깊게 느껴졌다. 게다가 필자는 북녘 땅을 처음 밟아보는 것이어서 설렘과 기대가 각별했다.
평양은 서울에서 불과 250㎞ 남짓 떨어진, 광주보다도 가까운 곳이다. 고속도로로 달리면 3시간 만에 닿을 수 있는 그곳을, 중국을 거쳐 국제선 비행기를 두 번이나 갈아타면서 가자니 서울을 떠난 지 12시간 만에야 도착할 수 있었다.
환승을 위해 북경 공항에 도착하니 안내원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국호가 선명하게 찍힌 사증을 나눠 주었다. 처음 받아본 북한 당국의 입국 허가증을 ‘매의 눈’으로 살피며 우리와 달리 쓰는 말이 무엇인지 찾아보았다. 우선 두음법칙이 적용되지 않은, ‘녀자’와 ‘려권번호’라는 표기가 눈에 띄었다. 그 옆에는 ‘난날’이라는 생소한 말이 적혀 있었는데 ‘생년월일’의 다듬은 말임을 이해하는 데 큰 어려움은 없었다. 국적 란에는 북측이 우리를 부르는 명칭대로 ‘남조선’으로 적혀 있었다. 그 밖에 ‘날짜’를 ‘날자’로 쓴 것이 눈에 띄었는데, 이는 단지 표기의 차이로 우리가 ‘날짜, 이빨, 눈썹’ 등 된소리 글자로 적는 일부 단어들을 북한에서는 ‘날자, 이발, 눈섭’ 등으로 적는다. 사증의 맨 끝에는 ‘수표’라는 말 뒤에 흘려쓴 글씨체로 사람 이름 석 자가 인쇄되어 있었다. 대개 관청의 직인이나 담당자 서명이 들어가는 자리여서 사증 발급 기관의 책임자 이름이려니 짐작은 했지만 ‘수표’의 말뜻이 궁금했다. <조선말대사전>을 찾아보니 ‘도장 같은 것을 찍는 대신 자기 손으로 자기의 이름을 나타내는 일정한 표식을 하는 것’으로 풀이하고 ‘手票’라는 한자 원어를 제시하고 있었다. ‘사인’(sign)이나 ‘서명’(署名)과 같은 말로 이해하면 될 듯하다. 겨우 열두어 가지 정보가 표시된 손바닥만한 사증 하나에서도 이렇게 다양한 어휘 차이를 발견해 내고 보니, 남북한의 언어 차이가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려항공’ 비행기를 타고 두 시간 남짓 걸려 드디어 순안공항에 내렸다. 숙소는 한강에 있는 여의도처럼 대동강 가운데 떠 있는 섬 ‘양각도’에 있는 호텔이었다. 양각도(羊角島)는 섬의 모양이 양의 뿔을 닮아서 붙여진 이름이다. 회의 틈틈이 남는 시간에는 호텔 주변을 산책하였다. 산책길 주차장에서 만난 차량의 번호판 하나가 눈길을 끌었다. 숫자 대신 ‘새로받은차’라고 씌어 있었다. 처음엔 이게 뭘까 싶었으나 곧 우리의 임시 번호판에 해당하는 것임을 짐작할 수 있었다. ‘임시’라는 한자말 대신 토박이말로 새말을 만들어 쓴 것이며, 개인이 차량을 구입하는 것이 아니기에 ‘새로나온차’가 아니라 ‘새로받은차’라는 표현이 사용됐을 것이다.
회의가 없는 일요일 낮에는 북측의 안내에 따라 모란봉공원으로 나들이를 갔었다. 공원 입구에 ‘불엄금’이라고 씌여진 팻말이 붙어 있었다. 작은 불씨가 애써 가꾼 숲을 태워버리기라도 할까봐 담뱃불 등을 주의하라는 경고 표지였다. 우리 식으로는 ‘화기 엄금’에 해당할텐데, ‘화기(火氣)’라는 한자말을 ‘불’로 다듬어 쓴 것이다. 그런데 남한에서는 ‘화기 엄금’이라는 말을 자주 못 보았다는 데 생각이 미쳤다. 주유소의 경고 표지판에서는 종종 볼 수 있으나 등산로나 공원 안내판에서는 잘 쓰이지 않는 표현이다. 돌아와 인터넷 검색을 통해 재미있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화기 엄금’은 예전에는 흔히 쓰던 말이었으나 1995년 이후 권위주의적인 안내판 용어를 순화하기로 함에 따라 자취를 감추게 되었다는 것이다. 시민에게 친절한 표현으로 순화한다는 원칙에 따라 ‘일단 정지’는 ‘잠깐 멈추십시오’, ‘출입 금지’는 ‘들어가지 마십시오’, ‘화기 엄금’은 ‘불조심’ 등으로 바뀐 것이다. 남과 북이 ‘화기 엄금’이라는 같은 말을 순화했지만 서로 관점이 달랐기에 그 과정과 결과는 사뭇 다르게 나타났다. 북측에서는 ‘화기’라는 한자어를 ‘불’로 바꿀 생각은 했지만 ‘엄금’이라는 표현에는 주목하지 못했다. 온갖 구호와 선동적 표현을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북한 사회에서 ‘엄금’이 특별히 거부감을 주는 표현이라고는 생각지 못했을 것이다. 반면에 남측에서는 애초에 ‘화기’를 굳이 바꾸어야 할 어려운 한자어로 생각하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래서 불 사용을 정말 엄격하게 금해야 하는 곳에서 강력한 경고의 뜻을 나타내기 위해서는 ‘화기 엄금’이란 표현을 그대로 사용한다. 다만 일상적인 상황에서는 ‘엄금’이라는 말이 지나치게 위압적이라는 판단에 따라 표현을 누그러뜨리려다 보니 ‘불조심’이란 말을 쓰게 된 것이다. 남과 북이 세상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관점의 차이가 언어 표현에 반영된 사례라고 할 수 있겠다.
남한과 북한이 분단된 채 70년 세월이 흘렀으므로 서로 말이 다르게 변화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다. 다만 ‘말 다듬기’에 대한 양측의 접근 방식이 서로 달라 언어 차이가 더욱 가속화되고 있다. 북한에서는 우리말의 고유성을 지키고 쉬운 말로 소통을 원활히 하기 위한 말 다듬기 사업을 우리보다 훨씬 적극적으로 하고 있다. 외래어는 물론이고 비교적 널리 쓰이는 한자어까지도 고유어 표현으로 바꾸어 사용한다. 반면 우리는 한자어나 외래어 사용을 엄격히 제한하지 않는다. 오히려 세계화 시대를 표방하며 외국어 단어들을 우리말 속에 섞어 쓰는 것을 자연스럽게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당연히 북한 사람들은 남쪽에서 사용하는 외래어들이 무슨 뜻인지 몰라 어려움을 겪게 된다. 실제로 통일부에서 2014년 조사한 자료에 따르면 탈북자들이 국내에서 겪는 가장 큰 어려움은 ‘외래어로 인한 의사소통 문제’(41.4%)로 나타났다. 반면에 남쪽 사람들이 북한의 다듬은 말을 대하게 된다면 필자가 평양에서 경험했던 것처럼 처음엔 낯설게 느끼겠지만 대부분 그 뜻을 쉽게 짐작해 낼 수 있다. 북측의 말 다듬기보다는 우리의 무분별한 외래어 사용이 남북한 소통에 더욱 큰 장애 요인이 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다가올 통일의 날, 원활한 소통을 위해서는 남북이 힘을 합쳐 《겨레말큰사전》을 만드는 일 못지않게 중요한 일이 불필요한 외래어 외국어 사용을 줄여나가는 것임을 다시 한 번 깨닫게 된 평양 방문길이었다.
| 정희원 |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졸업(문학박사). 현재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으로 어문연구팀장, 한국어진흥과장 등을 역임하였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으로 활동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