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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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인은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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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2.1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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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918
평양랭면
인은주 겨레말큰사전 경영관리부 대리
평양냉면 하면 어떤 계절이 떠오르나요?”
이런 질문을 받는다면 나는 여름, 겨울도 아닌 가을을 가장 먼저 떠올릴 것이다. 가을걷이한 햇메밀로 만든 냉면이야말로 메밀 향이 진하게 느껴져 평양냉면의 심심한 맛을 제대로 즐길 수 있기 때문이다.
평안도에서는 쌀농사가 어려워 가을에 수확한 메밀로 겨울에 냉면을 만들어 먹었다고 한다. 그런데 뜨거운 국물에는 메밀가루를 반죽해 뽑아낸 국수가 툭툭 잘 끊겨 살얼음을 띄운 차가운 육수에 메밀면을 넣어 먹으면서 평양냉면, 북측 표기법으로는 ‘평양랭면’이 생겨났다.
평양냉면 하면 구수한 메밀 향과 함께 작년 이맘때쯤 갔던 평양냉면 ‘맛집’이 떠오른다. 사업회가 위치한 마포에는 2대에 걸쳐 50년째 평양냉면을 만드는 노포, 을밀대가 있다. 언젠가 당시 사업회에 계시던 감사님께 평양냉면을 좋아해서 사업회에 온 뒤로 ‘을밀대’에 자주 갔다는 말씀을 드린 적이 있는데, 남북정상회담과 이산가족 상봉 등의 실무자로 방북 경험이 많으셨던 감사님이 평양냉면으로 손에 꼽는 맛집이라며 합정동에 위치한 동무밥상이라는 식당에 데려가 주셨다. 옥류관 출신의 요리사가 조리하는, 제대로 된 평양냉면을 먹을 수 있다는 기대를 안고 사업회 동료들과 함께 길을 나섰다.
이른 저녁 시간에 도착한 식당 앞에는 명성에 걸맞게 수많은 사람이 대기표를 들고 순서를 기다리고 있었다. 북에서는 “조선사람이라면 누구나 ‘평양랭면’과 구수한 ‘토장국(된장국)’ 맛을 좋아한다”고 한다는데, 서울 도심 속 이북 음식점 앞에 길게 늘어선 줄을 보고 있으니 새삼 평양냉면 맛은 남북 주민 모두가 인정하는 맛이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식당에 들어가자마자 가장 눈에 띈 건 이색적인 차림표였다. 사업회에 처음 입사해 《겨레말큰사전》에 수록될 세밀화 구축 사업을 담당했을 때, 세밀화로 봤던 어복쟁반, 명태식해 같은 이북 향토 음식이 적혀있으니 가장 먼저 반가운 마음이 들었다. 무엇보다 음식 이름이 북측 표기 그대로 ‘평양랭면’으로 적힌 것도 퍽 마음에 들었다. 내가 하는 일 덕분에 마냥 낯설지 않은 단어들로 채워진 차림표를 보며 ‘평양랭면’ 네 그릇과 소고기 초무침, 찐만두 한 판을 주문했다.
주문한 음식으로 한 상 가득 차려지자, 감사님은 자연스럽게 방북 경험담을 풀어놓으셨다. 남북교류사업의 실무를 맡고 있고, 아직 북측에 방문해 보지 않은 나에게는 늘 신기하고 새로운 이야기들이었다. 특히나 남북 관계 경색으로 남북공동회의 재개가 지연되는 상황에서의 방북 경험담은 책으로는 배울 수 없는 것이었기에 귀를 기울였다.

선주후면(先酒後麵). 감사님은 소주 한 모금에 냉면 한 젓가락을 드시며 언젠가 남북공동회의가 열려서 북에 방문하게 될 때 알아두면 좋을 음식 문화에 대해 이야기해 주셨다. 선주후면은 단어 그대로 먼저 술을 마시고 난 뒤에 국수를 먹는다는 말이다. 평양에는 지치 뿌리를 꽂고 꿀을 넣어 밭은, 달고 독한 소주인 감홍로(甘紅露)가 있는데, 귀한 손님에게는 이 술과 평양냉면을 대접했다고 했다. 지금도 평양 옥류관에서는 귀한 손님이 올 때 평양냉면과 함께 술 한 상을 내놓는다고 한다.
감사님은 북녘의 오랜 음식 관습인 선주후면에 따라 술 한 잔 뒤에 평양냉면을 먹어야 비로소 평양냉면의 진미를 느낄 수 있다고 하셨다. 남북공동회의가 언제 다시 열릴지는 알 수 없지만 여기에서라도 북녘의 문화를 즐겨보자며 다 같이 알싸한 술 한 모금을 마신 후에 평양냉면을 한 젓가락 들어 먹어보았다. 속이 더부룩하지 않고 쓴 소주가 담백하게 목구멍을 넘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