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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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주영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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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2.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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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975
플레이 볼
주영훈 겨레말큰사전 선임편찬원
아이가 아내의 배 안에 있을 때 저녁이면 박민규의 소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읽어 주었다. 임신 중 야구 관련 소설을 읽어서인지 아이가 태어날 때 누군가 내 귀에 외치는 소리를 들은 것도 같다. “플레이 볼!” 태교 용도로 이 소설을 고른 이유는 아이가 세상에 나왔을 때 이 책의 이야기를 기억하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침대 위에서 책을 읽을 때 아내는 가끔 잠이 들었지만 아이는 엄마의 배 어딘가에 귀를 붙이고 열심히 듣고 있었다. 책을 읽는 나의 목소리를 아이가 열심히 들었음을 확신하는 이유는 아이의 걸음마 때문이다.

아이는 개월 수가 14개월에서 15개월로 넘어가기 4일 전에 혼자 몇 발짝을 걸었다. 그 시기 비슷한 또래의 아이들이 잘 걷고 심지어 뛰기도 한다는 이야기를 듣고 있던 터라 걸음마가 늦어지는 것이 조금 걱정되던 때였다. 이제 와 생각하면 아침에는 네 발, 점심에는 두 발, 저녁에는 세 발이라는데 아침을 남들보다 조금 길게 가지는 게 무슨 문제가 될까 싶다. 우리의 점심은 너무 기니까.
아침이든 점심이든, 나의 걱정과 무관하게 아이는 자기만의 속도로 진화하고 있었다. 이족 보행을 시작하는 호모 사피엔스의 옆에서 “걸음마! 걸음마!” 말하다 보니 걸음마의 ‘마’는 뭘까 하는 의문이 들었다. 아기가 처음으로 발음할 수 있는 자음과 모음이 [m]과 [a]라 자연스럽게 걸음에 ‘마’가 붙은 것은 아닐까? 걸음마의 어원을 검색해 보았지만 ‘마’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다는 답변만 찾을 수 있었다. 걸음마의 어원은 분명하지 않았지만 아이는 분명히 한 걸음씩 발을 내딛고 있었다. 걸음을 ‘내딛는’ 아이의 발을 보면 부끄러운 기억이 떠오른다.


수정한 청첩장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이니 스티커가 없다면 모를 것을 굳이 스티커를 붙여서 잘못이 티가 나는 것 같다는 의견이 많았다. 기사회생에 성공한 내딛으려들은 그대로 청첩장에 남게 되었고 내디디려들은 청첩장으로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고 서랍에 들어가게 되었다. 청첩장에서는 ‘내딛으려’가 살아남았지만 ‘내딛다’는 ‘내디디다’의 준말로, 활용할 때 주의해야 한다. 자음으로 시작하는 어미와는 자유롭게 결합하나 모음으로 시작하는 어미는 결합하지 않는다. ‘머무르다/머물다’ ‘서두르다/서둘다’도 마찬가지이다.
청첩장에 오자가 있어도 결혼식은 잘 치렀고 걸음마가 조금 늦었어도 아이는 잘 자라고 있다. 『삼미 슈퍼스타즈의 마지막 팬클럽』을 아이에게 읽어준 이유는 아이가 세상에 나와서 어떤 일을 열심히 하지 않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였다. 조금 말을 더하자면 굳이 남을 이기려고 너무 열심히 살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걸음마의 ‘마’가 무엇이든, 내딛은 발이든 내디딘 발이든, 지금처럼 자기만의 속도로 걷길, 치기 힘든 공은 치지 않고 잡기 힘든 공은 잡지 않길. 자, 플레이 볼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