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
- 글쓴이
- 김정대
-
- 작성일
- 2022.12.22
-
- 조회수
- 724
《겨레말큰사전》은 통일의 교두보
글 김정대 경남대학교 명예교수
《겨레말큰사전》은 우리 겨레의 비원(悲願)이 담긴 사전이다. 말부터 ‘통일’되어야 한다는, 분단 겨레의 간절한 소망을 담은 사전이기 때문이다. 남북한을 대표하는 사전에서 선정한 말, 문헌 자료, 남북 및 해외 여러 곳에서 사용하는 지역어 등 총 30만여 어휘를 싣는다 하니 기대되는 바 크다.
2021년 3월, 《겨레말큰사전》 가제본이 발간되었다는 소식을 접하고 맨 먼저 떠오른 것이 북한산 담배 ‘영광’이었다. 가로가 세로보다 커서 더욱 이색적으로 보였던 이 담배 한 갑이 필자의 손에 들어온 것은 2004년 12월, 지금으로부터 18년 전의 일이다. 그때 필자는 남북한 공동으로 진행될 방언 조사 회의에 참여하기 위해 중국 선양(瀋陽)에 있었다. 남측은 국립국어원 언어정책부, 북측은 사회과학원 언어학연구소가 중심이었다. 남측에서 6명, 북측에서 7명이 이 회의에 참석했는데, 그때 필자는 북측의 젊은 학자들을 만나 여러 가지 이야기를 나누는 소중한 시간을 가졌다.
피는 물보다 진한 법
5박 6일의 짧은 일정이었지만, 피가 물보다 진하다는 사실을 절감한 시간이었다. 내일이면 헤어질 마지막 저녁 식사 자리에서 우리는 술 한잔을 나누었다. 필자 곁에 앉았던, 가장 젊은 북측 학자가 선물이라며 건넨 것이 ‘영광’이었다. 그동안 정(情)도 들어 식사 자리에서는 형, 아우 하던 사이였다. 그 아우로부터 뜻하지 않은 선물을 받고 와락 감정이 북받쳤다. 말없이 서로를 끌어안고 굵은 눈물을 쏟았던 일이 어제인 듯 선명하다. 통일이 되면 개봉하리라, 그런 심정으로 아직까지 필자는 그 담배를 고이 간직하고 있다. 그리고 그 일이 원인이 되어 경남대 국문과에 ‘통일 시대의 한국어’라는 교과목을 신설한 것도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의 첫걸음은 1989년 3월로 거슬러 간다. 당시 문익환 목사가 평양을 방문했을 때 ‘통일국어대사전’의 남북 공동 편찬을 제안하고 김일성 주석의 동의를 얻어 낸 것이 계기였다. 그러다가 2004년 4월 남북한 관련 단체가 중국 옌지(延吉)에서 사전편찬의향서를 체결하면서 급물살을 타게 되었 다. 이 무렵 남북한 사이에는 또 다른 언어 관련 국책 사업도 논의되고 있었으니, 그것이 바로 남북한 방언 조사 사업이다. 그러나 북측의 방언 조사 사업은 그쪽의 여러 가지 일로 해서 몇 년 만에 중단되고 말았다. 남측에서는 10년 사업으로 이어져 2013년에 대단원의 막을 내렸지만 말이다. 필자로서는 두 번 밖에 만나지 못했지만, 북측의 젊은 학자들과는 많은 부분에서 의사소통이 잘 되어 우리가 통일의 물꼬를 틀 수도 있겠다는 희망을 가졌기에 그 아쉬움은 참으로 컸다.
지역어(방언)는 우리말 사전 간행의 알파요, 오메가의 위치를 차지한다. 다양한 지역어 자체가 무형의 문화유산이기 때문이다. 대일항쟁기(일제강점기) 표준어 사정은 한글 맞춤법 제정과 함께 우리가 기억해야 할 대단한 사건이었다. 당시 우리말 사전을 간행하는 데는 언어 ‘통일’을 위한 표준어 사정과 그것을 표기할 한글 맞춤법 제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그러나 그렇게 제정된 표준어는 어느새 모든 방언들 위에 ‘군림’하는 존재가 되어 지역어 소멸을 부채질하는 주범이 되었다. 언어가 사라지면 그 사용자들의 문화와 정신, 그리고 전통마저 사라진다. 세계 하나가 완전히 사라지고 마는 셈이다. 그래서 지난 11월 초에 개최되었던 제3회 유네스코·겨레말큰사전 국제학술포럼의 주제도 ‘토착어의 지속가능한 발전: 토착어로 문학하기와 세계 사전에 나타난 지역어’가 아니던가. 유엔이 2019년을 ‘세계 토착어의 해’로 지정한 데 이어 2022년~2032년을 ‘세계 토착어 10년’으로 선언한 것도 같은 이유에서였다.
시련이 클수록 열매는 달콤한 법
경남 방언에 ‘늑삼’이라는 말이 있다. “주위의 관심에 편승한 과장된 행위”를 이르는 말이다. 자신이 없는 싸움을 할 경우, 누군가가 말려 주기를 바라는 마음은 매한가지일 터이다. 실제로 어떤 친구가 그 싸움을 말려 주면 속으로는 고맙기 그지없다. 그러나 정작 나의 언행은 “놔라, 저 죽고 나 죽는다”라는 과장된 호기로 포장되기 일쑤다. 몇 번 말리던 친구도 화가 난다. 그때 하는 말이 “옆에서 말리니까 저 늑삼 부리는 것 좀 봐!”이다. 이런 심리 상태와 관련된 표현이 표준어에는 그 어디에 있는가. 그러나 이 좋은 ‘늑삼’도 표준어가 아니라는 이유로 우리말 어휘 체계에서 사라질 위기에 놓여 있다.
필자는 《겨레말큰사전》의 편찬을 《옥스퍼드 영어사전》(Oxford English Dictionary. OED)과 《큰사전》의 편찬에 비유하곤 한다. 시대나 주어진 여건은 전혀 다르지만, 내외적으로 많은 공통점을 안고 있어서다. 《OED》 발간의 계기가 되었던 것은 1857년이고 10권으로 된 초판이 완성된 해는 1928년이다. 71년의 세월이 한 사전의 편찬에 투자된 셈이다. 《OED》는 12세기 중엽부터 영어권에서 사용된 각 지역어 총목록을 담고 있다. 개정판의 발간과 증보, 인터넷판 발간 및 수정 작업 등을 보면 《OED》는 명실상부 인류 지성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의 결정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러나 발간의 내부를 들여다보면 어려운 국면을 맞았던 게 한두 번이 아니다. 첫 출발에서 무려 22년의 세월이 흐른 뒤인 1879년에 이르러서야 “7,000페이지를 넘지 않는 역사적인 사전을 출판한다”라는 조건으로 옥스퍼드대 출판사와 계약을 맺을 수 있었으니 말이다. 애초 그들은 사전 제작 기간을 10년 정도 예상했다고 한다. 그러나 5년 뒤에 그 첫째 권만이 출판되었을 정도로 사전 편찬 작업은 지지부진했다. 초판이 완성될 때까지 편집장의 자리에 모두 네 사람이 앉았다는 점도 그 어려움을 대변해 준다. 산업 혁명을 일으키고 지구촌 곳곳에 엄청난 식민지를 건설해 놓았던 영국이었지만, 제대로 된 사전 하나를 펴내는 일은 그렇게 힘들었던 것이다.

조선어학회(한글학회)에서 《큰사전》을 펴낸 일은 런던문헌학회에서 《OED》를 편찬하는 것보다 더 힘든 것이었다. 우리의 선각자들은 일본 경찰의 눈을 피해야 하고 재정을 확보해야 한다는 외적인 문제와도 싸워야 했고, 앞서 언급한 새 맞춤법을 만들고 표준어를 사정해야 한다는 내적 문제와도 씨름해야 했다. 1929년 10월에 본격적 활동에 들어가 해방 이후인 1947년 10월에 《조선말큰사전》이라는 이름의 첫 권을 내었다. 모두 여섯 권으로 된 사전이 완간된 것은 1957년 10월이었으니, 사전 발간에 소요된 기간은 자그마치 28년에 이른다. 총 165,059개 항목 가운데 ‘사투리’ 표제어는 13,000개에 이른다. 첫 권을 내고도 완간까지 10년이 더 걸린 데에는 6·25전쟁의 여파도 있었지만, 우리 정권에 의한 방해 공작이 있었음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승만 정권이 느닷없이 한글 간소화 방안을 내놓아 평지풍파를 일으킨 일을 아는 사람은 안다.

그러면 《겨레말큰사전》 간행에는 어떤 어려움이 있는가. 외적 어려움은 당연히 우리 겨레가 둘로 나눠져 있다는 데서 온다. 정치적 바람에 따라 사전 편찬의 속도가 차이가 난다는 것이 가장 우려스러운 일이다. 내적 어려움도 한둘이 아니다. 남북 분단은 남북한의 어문 규범 일부까지 변질시켜 버렸다. 한글 자모순이 다르고 일부 자모는 이름조차 다르다. 두음 법칙, 사이시옷, 띄어쓰기, 문장 부호 등 합의를 이루어야 할 문제는 한둘이 아니었다. 그러나 자모순과 자모의 이름 등은 서로가 한 발씩 양보하여 합의를 이루었으니, 이것은 상당한 진전이라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이런 정신이면 무엇인들 못 할까 싶다.
시련이 크면 클수록 그 열매는 더 달콤한 법이다. 안팎의 어려움을 잘 이겨 내고 남북이 손잡고 《겨레말큰사전》을 온전히 발간하기를 간절히 바란다. 그리하여 이 사전이 명실상부 우리 겨레 통일의 교두보 역할을 하기를 두 손 모아 빈다.![]()
김정대
경남대학교 한국어문학과 명예교수 겸 고운학연구소장이며, 국립국어원 지역어조사위원을 역임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