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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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최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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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3.08.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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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755
백로지
글 최성규 겨레말큰사전 선임편찬원
‘백로지’는 종이의 한 종류이다. ‘백로’라는 이름이 자못 운치 있게 들려서 전통 있는 고급 종이가 아닐까 짐작하기 쉽지만, 옛 문물을 아는 사람이라면 다른 느낌이 들지도 모르겠다. 남녘의 《표준국어대사전》과 북녘의 《조선말대사전》 에서 ‘백로지’를 찾아보면 아래와 같이 나온다.
사전 | 뜻풀이 및 예문 |
《표준국어대사전》 | 백로-지2(白露紙)[뱅노지] 「명사」 「1」 ‘갱지’를 속되게 이르는 말. | 오재철은 미리 준비하였던 백로지를 갖다가 칠판 위에 펼쳐서 압정으로 네 귀를 붙여 놓는다.(이기영, 《봄》) 「2」 종이의 하나. 평안북도 영변에서 난다. |
《조선말대사전》 | 백로지[뱅―](白露紙)[명] 품질이 좋은 흰종이의 한가지. ∥ ∼로 공책을 매다. 얇은 ∼. ∼와 연필. | 청년들이 출판물보따리, 백로지퉁구리따위를 메고 모두 안개속으로 잔교를 밟아나아가 배에 올랐다.(총서 《불멸의 력사》 중 장편소설 《은하수》) |
남녘 뜻풀이는 두 갈래로 나뉘는데, 첫 번째는 ‘갱지(更紙)’를 가리킨다. ‘갱지’의 뜻풀이를 《표준국어대사전》에서 다시 찾으면 ‘지면이 좀 거칠고 품질이 낮은 종이. 주로 신문지나 시험지로 쓴다’라고 되어 있다. 결국 ‘백로지’는 품질이 ‘낮은’ 종이를 ‘속되게’ 이르는 말이므로 품위가 퍽 낮은 셈이다. 그리고 두 번째 뜻은 평안북도 영변에서 나는 종이라고 되어 있는데, 종이 자체의 특성은 보이지 않고 생산지만 적혀 있어서 눈에 띈다. 그것도 북녘 지역이라니. 북녘의 특산품을 남녘 사전에서 잊지 않고 챙겨 넣은 것인가 싶어 뜻밖의 일이라는 생각도 스친다.
그러고 나서 북녘 뜻풀이를 보니 조금 당황하게 된다. 북녘 사전에서는 백로지를 품질이 ‘좋은’ 종이라고 풀이했기 때문이다. 똑같은 말을 두고 남북의 가치 평가가 정반대로 나타난 셈이다. 게다가 ‘갱지’와 관련된 정보는 전혀 없다.1) 그러면 백로지는 도대체 어떤 종이일까? 그리고 그 품질은 좋은 것인가, 나쁜 것인가?
궁금증은 여기에서 그치지 않는다. 북녘의 《조선말대사전》에는 평안북도 영변 (북녘 표기로는 ‘녕변’)에서 난다는 설명이 보이지 않는다. 남녘의 사전에서는 원산지가 북녘이라는데, 정작 북녘의 사전에서는 아무런 말이 없는 것이다. 북녘 사전이 그저 빠뜨렸다고만 하기에는 무언가 개운하지 않다.
일단 사업회의 말뭉치 자료에서 ‘백로지’가 쓰인 용례들을 훑어보면, 이 종이가 어떤 종이인지를 파악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몇몇을 찾아 보이면 아래와 같다.
⊙ 남녘 용례 ㉠ 그의 일기장은 {백로지를} 접어 맨 공책이었다.《최수철: 뿌리에 고인 눈물》 ㉡ 쌍현이는 시험 때면, 산더미 같은 {백로지를} 등사실에 쌓아 놓고 하루 온종일, 밤늦게까지도, 등사판 앞에 앉아 … 시험지를 찍었다.《최명희: 혼불》 ㉢ 우린 기본 스케치를 그렇게 하고 싶어도 못할 형편이잖아. 모조지나 {백로지는} 바라지도 않고 싸구려 시험지만 쓴다 해도 그 종잇값이 얼마니 그래.《조정래: 한강》 ㉣ {백로지} 깐 술상 젓가락 장단에 자진모리《고은: 만인보 13》 |
⊙ 북녘 용례 ⓐ 그는 자기 돈으로 {백로지를} 사서 공책을 매주면서까지 글을 배워주었고 타자기술을 익혀주었다.《날개》(북) ⓑ 다음달에는 교실들의 간막이를 하고 칠판이랑, {백로지랑}, 반지랑, 등사용지며 잉크랑 교재비품들과 사무용구들을 구입할수 있었다.《봄비》(북) ⓒ 그리다가는 지우고 그우에 다시 그린 자리가 뚜렷한 {백로지}우에는 억센 손아귀에 틀어쥔 낫 한가락이 그려져있었다.《낫》(북) ⓓ 류영립은 그에 만족한듯 … 손바닥을 가볍게 다독이며 {백로지를} 씌워놓은 음식다담상우에 눈길을 주었다.《관북의병장》(북) |
용례들을 바탕으로 백로지의 쓰임새를 정리해 보면, 공책 용지로 쓰거나(㉠, ⓐ), 인쇄-등사 용지로 쓰거나(㉡, ⓑ), 그림 그리는 종이로 쓰거나(㉢, ⓒ), 음식상 위에 깔아 놓는(㉣, ⓓ) 것이 남북 공통으로 나타난다. 그 밖에 남녘 용례에서 벽지로 바르는 데에 쓰거나, 북녘 용례에서 돈을 감싸는 데에 쓴다는 내용이 더 보이기는 하나, 남녘의 백로지와 북녘의 백로지를 아예 다른 물품으로 판단할 만큼은 아닌 듯하다.
그렇다면 품질이 낮다는 설명과 높다는 설명은 어떻게 보아야 할까. 위의 ㉢을 보면, ‘싸구려 시험지’에 견주어 ‘모조지’와 ‘백로지’는 그래도 조금 더 비싼 종이로 보인다. 그러나 남녘의 다른 용례를 보면 “까짓 권리증은 서푼 가치도 없는 {백로지} 조각이다.”《유현종: 섬진강》처럼 얕잡아 말하는 일도 있다. 결국 용례 몇몇으로는 판단을 내리기가 어렵다. 사실, 품질이 높은지 낮은지는 똑같은 물건을 두고도 비교 대상에 따라 다르게 말할 수 있다. 이처럼 판단이 어려운 경우에는 품질의 높낮이 문제를 사전의 뜻풀이에 아예 넣지 않는 것도 생각해 볼 만하다.
‘속되게’ 이른다는 뜻풀이도 다시 짚을 여지가 있다. 남녘에서도 다른 사전의 뜻풀이에는 ‘속되게’라는 말이 빠져 있기도 하다. 한글학회 《우리말큰사전》과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의 풀이는 아래와 같다.
사전 | 뜻풀이 및 예문 |
《우리말큰사전》 | 백로-지2=갱지. 〔白鷺紙〕 |
《고려대한국어대사전》 | 백로지1 [白露紙] [뱅노-] [명사] 품질이 낮은 서양식 종이의 하나. 표면이 조금 거칠며 신문 용지 따위로 쓴다. ∥ 황량한 거리의 담벼락에는 각종 구호가 적힌 백로지가 바람에 날리고 있었다. [유의어] 갱지1(更紙) |
‘백로지’의 한자가 ‘白鷺紙’와 ‘白露紙’로 조금 다르기는 하나 뜻풀이로 보아서는 같은 물건을 가리킨다. 《우리말큰사전》과 《고려대한국어대사전》은 ‘갱지’와 ‘백로지’를 같은 말(또는 비슷한 말)로 처리하였고, ‘속되게’라는 설명은 넣지 않았다. ‘백로지’가 어떠한 느낌을 지닌 채 쓰이는지 여러 용례를 두루 살펴보면 좋을 것이다. 글쓴이가 사업회의 말뭉치 자료에 나타난 용례들을 보기로는, ‘속되게’ 볼 만큼 품위가 낮은 문맥에 놓인 경우가 많지는 않았다.
이제 남은 문제는 ‘평안북도 영변’에서 난다는 백로지가 무엇인지 확인하는 일이다. 먼저, 《표준국어대사전》의 ‘편집 이력’을 살펴보면 뜻갈래 「2」가 나중에(2019년 6월) 추가되었음을 알 수 있다. 아마도 어떤 관련 정보가 있었기에 그리했을 것이다. 그러나 남녘에서 잘 알려진 백과사전인 《두산백과》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에는 ‘백로지’라는 항목이 없다. 또한 북녘의 《조선대백과사전》에도 ‘백로지’라는 항목은 없으며, 다만 〈세선리원호물자보관장소〉라는 항목의 설명 가운데 “이들은 광목, 신발, 내의류, 소금, 성냥, {백로지}, 의약품과 의료 기구 등 수많은 원호물자들을 마련하여 이 보관장소에 두었다.”라는 문장이 보일 뿐이다. 세선리(世仙里)는 함경북도 온성에 있는 지명이며, 평안북도 영변과 관련될 만한 정보는 보이지 않는다.
인터넷 몇몇 곳에서는 전통 한지의 생산지별 분류로 평북 영변의 백로지를 언급한 경우가 보였다. 그러나 조선왕조실록(https://sillok.history.go.kr)에는 ‘白鷺紙’ 또는 ‘白露紙’가 아예 보이지 않는다. 한국학자료포털(https//kostma.aks.ac.kr)에서는 몇 군데 보이지만, 영변의 특산이라고 쓴 기록은 찾지 못했다. 오히려 조선 정조 때 김정중이 쓴 《연행록(燕行錄)》 중 〈기유록(奇遊錄)〉에는 “燕京土産白露紙”라는 기록도 보인다. 백로지가 중국 연경(오늘날의 베이징)의 토산품이라는 뜻이다. 석사논문인 장연이(2012) 〈조선시대 초상화 제작에 사용된 종이 연구〉의 66~71쪽을 따르면 백로지의 원산지로 평북 영변, 강원 영월 등이 거론된 바 있으나, 실제로는 중국의 종이로 추측된다고 하였다.
국어사전은 백과사전에 있는 낱말이라도 다 싣지는 않으며, 싣더라도 그 뜻풀이가 백과사전보다 짧은 것이 보통이다. 물론 백과사전에 없는 내용을 더 자세히 밝히는 일도 있지만, 그것은 대개 언어 현상과 직접 관련되는 내용일 때 그러하다. 백로지의 원산지는 사실 확인이 더 필요한 데다가 언어 현상과는 거리가 먼 내용이므로, 국어사전의 뜻풀이에 넣기는 적잖이 부담스러운 것이다. 이제까지 살펴본 바를 바탕으로 글쓴이가 다듬어 본 ‘백로지’의 풀이는 아래와 같다. 뜻풀이를 ‘깁고 더하기’보다는 ‘거르고 빼기’에 가까워졌다는 것이 아쉽기는 하나, 때로는 그런 일도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해 본다.
백로지(白露紙)[명] 종이의 하나. 주로 신문 등을 인쇄하거나 그림을 그리는 데에 쓴다. | 쌍현이는 시험 때면, 산더미 같은 {백로지를} 등사실에 쌓아놓고 하루 온종일, 밤늦게까지도, 등사판 앞에 앉아 성냥개비처럼 마른 팔을 쉭, 쉭, 놀리며시험지를 찍었다.《최명희: 혼불》 / 이 회비덕분으로 전기도 수도도 회복되였고 … 칠판이랑, {백로지랑}, 반지랑, 등사용지며 잉크랑 교재비품들과 사무용구들을 구입할수 있었다.《봄비》(북) [참고] 갱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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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갱지’의 《조선말대사전》 풀이는 ‘주로 신문지나 사무용지로 쓰는 지면이 좀 거칠고 품질이 보통인 종이’라고 되어 있다. ‘갱지’ 쪽에도 ‘백로지’와 어떤 관계인지 아무런 정보가 없다.

최성규
서울대학교 국어국문학과를 졸업했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 박사 학위를 받았다. 2022년 사업회에 입사해 현재 편찬2부 선임편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