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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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정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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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4.0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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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733
하염없이, 그 기나긴 생을...
글 정지아 소설가
1989년이었다. 그 전해 이태 선생의 『남부군』이 출판 되었고, 빨치산이었던 내 부모는 자신들의 젊은 날 을 세상에 꺼내놓을 수 있다는 사실에 한껏 고무되 었다. 『남부군』이 유약한 자유주의자의 시점이라 비 판하기는 했지만, 이후 모든 빨치산 관련 소설이나 다큐가 『남부군』으로 인해 가능했음을 누구도 부정 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자유주의적 시점도 다 쓸모가 있다.
이태 선생은 빨치산의 존재를 세상에 드러내기만 한 게 아니다. 전직 국회의원의 지위를 이용해 근 사십 년 가까이 소식조차 모르던 남부군들의 소재를 파악 하고 서로 연결해 주기도 했다. 이태 선생은 엄마를 찾아와 물었다(이태 선생은 엄마를 또렷이 기억했 고, 엄마는 잘 기억하지 못했다. 서로의 지위 차이였 을 것이다. 이태 선생의 표현에 의하면 내 엄마는 당 신으로서는 하늘 같은 존재였단다).
김태규, 하종구, 유화열
“제일 보고 싶은 사람 이름 셋만 대 봐요.” 엄마는 망설임 없이 단박에 대답했다.
“김태규. 하종구. 유화열.”
모두 남부군에서 동고동락했던 사람들이었다. 김태규 선생과 하종구 선생의 소재는 이태 선생이 이미 알고 있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두 양반이 한걸음에 구례까지 달려왔다. 두 양반은 그 뒤로도 뜨문뜨문 엄마를 찾아왔다. 하종구 선생은 달변이었지만 김태규 선생은 말수가 적었다. 나도 몇 번 뵈었는데 목소리를 들은 기억이 거의 없다. 김태규 선생은 매번 돈 봉투를 어딘가 숨겨놓았다. 직접 주면 엄마 자존심에 받을 것 같지 않았던 모양이다. 이불 더미 속에서 돈 봉투를 찾은 적도 있고, 신문 밑에서 찾은 적도 있다. 봉투에는 어떤 말도 적혀 있지 않았다. 나중에 엄마가 뭐라고 하면 딱 한 마디만 했다.
“나는 먹고살 만하오.”
그러니 부담 없이 받으라는 모양이었다. 말없이 오 고 가는 깊은 마음을, 나는 아마 김태규 선생으로부터 처음 배웠지 싶다. 그토록 사무치게 그리웠으면서도 그들은 근 사십 년을 만나지 못했다. 고향을 알고 있으니 찾으려 하면 찾지 못했을 리 없다. 아마 연락을 했다가 서로에게 피해가 갈까 두려웠을 것이다. 그래서 시도 때도 없이 솟구치는 그리움을 애써 가라앉힌 게 아니었을까?
유화열 선생을 찾는 데는 이태 선생도 근 일 년 가까이 걸렸다. 우리 식구는 이태 선생의 차를 얻어 타고 한걸음에 남해로 달려갔다. 우리 집과 다를 바 없는 허름한 농가에서 유화열 선생은 살고 있었다. 엄마를 보고 눈만 껌벅껌벅하던 유화열 선생은 눈앞의 늙은이가 젊어 헤어진 그 누이임을 알아보고는 마당에 털썩 주저앉았다.
“누님…”
유화열 선생은 소리 없이 울었다. 이내 소박한 술상이 차려졌고, 모두 방에 둥그렇게 모여 앉았다. 누구도 차마 입을 열지 못했다. 아버지가 눈을 꿈벅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이태 선생이 아버지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남부군 둘이서 오붓하게 회포를 풀라는 의미인 모양이었다. 눈치가 보였지만 나는 일어서지 않았다. 이런 기막힌 자리를 놓쳐서야 되겠는가! 그때부터 나는 천생 소설가였던가 보다.
하염없이 살았소
유화열 선생은 이현상의 부관이었다. 둘이 낙오되었고, 이현상은 유화열 선생에게 고향인 남해에 가 먹을 것을 구해 오라 일렀다. 이현상은 간부에게만 주어지는 비상식량 한 줌을 떠나는 유화열 선생에게 건넸다. 싫다고 했지만 이현상은 기어이 선생의 손에 쌀 한 줌을 쥐여주었다. 선생이 세상을 향해 몇 발 내디뎠을 때 이현상이 나지막이 불렀다.
“유 동지. 살길이 있거든 애써 피하지는 마시오.”
그때 유화열 선생은 고작 십 대 후반이었다. 십 대의 소년에게도 존댓말을 썼던 이현상의 마지막 말이 유화열 선생의 마음에 사무치게 남았다.
고향 집에 들른 선생은 이내 어머니의 전갈을 듣고 달려온 친척들에게 에워싸였다. 친척들은 대부분 경찰이었고, 선생을 경찰로 만들어 목숨을 살렸다. 어머니의 눈물을, 어쩌면 살고 싶은 욕망을, 유화열 선생은 차마 외면하지 못했다.
“누님. 하염없이 살았소.”
선생은 엄마와 함께한 내내 물처럼 소주를 들이켰다. 내게는 그의 눈물이 소주처럼 보였다. 산다는 일은 참으로 어렵구나, 두 사람 곁에서 나는 그런 생각을 했던 것 같다. 살고자 하는 욕망이 뭐가 문제겠는가. 살았으니 됐다, 그냥저냥 살았어도 됐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냥저냥 살지 못했다. 하염없이 살았다. 유화열 선생의 ‘하염없이 살았’다는 말이 그날, 내 마음에 얹혔다. 스물셋, 젊은 마음에 맺혔던 하염없다는 말은 2022년, 그러니까 무려 34년 만에 『아버지의 해방일지』에 등장했다.
속엣말 감추는 법 없는 아버지가 만날 때마다 쏘아붙였더니 어느 날 박 선생이 느닷없이 눈물을 쏟으며 말했다. “상욱아. 너 하염없다는 말이 먼 말인중 아냐?”
아버지는 말문이 막혔고 박 선생은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먹은 소주가 죄 눈물이 되어 나오는 것 같았다고, 생전 처음 취했던 아버지가 비틀비틀, 내 몸에 기대 걸으며 해준 말이다. 고2 겨울이었다. 자기 손으로 형제를 죽였을지도 모른다는 자책감을 안고 사는 이에게 하염없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까. 열일곱 여린 감수성에 새겨 진 무늬는 세월 속에 더욱 또렷해져 나는 간혹 하염없다는 말을 떠올리곤 했다. 아직도 나는 박 선생이 왜 그런 말을 했는지 알지 못한다. 다만 하염없이 남은 인생을 견디고 있을, 만난 적 없는 아버지 친구의 하염없는 인생이 불쑥불쑥 내 삶에 잔잔한 파문을 일으키곤 했다.
- 정지아, 『아버지의 해방일지』, 창비, 2022, 49-50쪽.
이데올로기와 인간, 그 사이에 끼어 엉거주춤,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그러나 무엇 하나 떨쳐버릴 수도 없어 속절없이 견뎌온 삶의 실감을 나는 ‘하염없이’라는 단어로 표현하고자 했던 것 같다. 소설 속 상황과 처음 그 말을 내게 들려준 유화열 선생의 상황은 다르지만 진실이라는 측면에서는 별반 다르지 않다(이래서 내 소설을 소설이 아니라 다큐로 읽는 지도 모르겠다).
‘하염없이’라는 부사어의 사전적 의미는 이러하다.
1. 시름에 싸여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이 없이.
2. 어떤 행동이나 심리 상태 따위가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 없이 계속되는 상태로.
나의 삶이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계속되어 멍하니 이렇다 할 만한 아무 생각도 없이 견뎌온 유화열 선생의 삶에 이보다 더 적절한 어휘가 있을 성싶지 않다. 문학도 어학도 알지 못하는 선생이 어찌 사전의 1과 2의 의미를 다 합쳐 자신의 삶을 ‘하염없이’라는 한 단어로 적확하게 표현했을까. 그래서 나는 삶의 한고비 한고비, 최선을 다해 넘어온 누군가의 삶을 소설보다 더 높이 친다. 유화열 선생 같은 사람들이 있어, 그들이 전 생의 무게를 실어 토해낸 어떤 말들이 있어, 나는 『아버지의 해방일지』를 쓸 수 있었다.
소설가는 위대한 창조자들의 삶을 기웃거린다
나는 13년째 구례에 살고 있다. 구례에는 노인네들이 젊은이들보다 훨씬 많다. 아마 여성 노인의 비중이 더 높을 것이다. 이상도 하지. 시골 할배들의 말보다 할매들의 말이 훨씬 더 감칠맛 나고 풍요롭다(아마 할배들보다 할매들이 더 고난의 세월을 살아서일 거라 짐작한다). 시골을 죽도록 싫어했던 내가 언젠가부터 노인네들만 지나가면 온몸의 안테나를 곤두세운다. 거기, 내 소설의 영감이 될 살아 있는 말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구례 내려와 깨달았다. 소설가는 위대한 창조자가 아니라는 것을. 그저 세상에 떠도는 살아 있는 말, 그러니까 한 생의 무게가 고스란히 담겨 있는 말을 채집하고, 그 말에 이야기를 부여하는 자일 뿐이라는 것을. 진정한 창조자들은 저 거리에, 논과 밭에, 장터에, 사람들로 북적이는 서울의 어딘가에, 있다. 무릇 쓰는 자라면 눈을 크게 뜨고, 귀를 활짝 열고, 위대한 창조자들의 삶을 기웃거릴 일이다.

정지아
소설가. 전남 구례에서 태어나 중앙대학교 문예창작학과를 졸업했다. 1996년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되어 작품 활동을 시작했으며, 소설집 『행복』, 『봄빛』, 『숲의 대화』, 『자본주의의 적』, 장편소설 『아버지의 해방일지』 등을 펴냈다. 이효석문학상, 김유정문학상, 만해문학상, 5·18문학상 등을 수상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