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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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최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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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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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1,096
언어의 분단은
사랑으로 통한다
-'가루비누'와 '하이타이'
글 최 설 북한대학원대학교 심연북한연구소 객원연구원
봄은 꽃의 계절이라 했던가. 휘늘어진 가지마다 만발하게 피어난 개나리꽃, 벚꽃 등이 아름다운 풍경을 이루고 있다. 봄바람에 흩날리는 꽃잎을 바라보며 손 잡고 걷고 있는 젊은이 얼굴마다 웃음이 피어난다. 중년의 삶에도 자연의 봄기운은 어김없이 찾아온다. 겨울에 덮었던 이불도 교체하고 구석구석 집 안을 깨끗이 정리해 새로운 기분을 맞이해야겠다는 생각이 일었다.
어느 주말, 열려 있는 창가로 살랑살랑 봄바람이 내 볼을 스쳤다. 그 기분 그대로 화장실 대청소에 팔을 걷어붙이고 나선 나는 신나는 목소리로 남편에게 말했다.
“자기야, 가루비누 좀 가져다 줘요.”
바께쯔1)에 조금 넣은 락스를 희석하려 수돗물을 받고, 가루비누를 넣으려고 화장실을 둘러보니 가루비누 봉지가 비어 있었다.
“뭐라고?”
“웃방2)에 가루비누 지함 있거든. 거기서 한 봉지 가져다줘요.”
“가루비누가 뭐야?”
남편이 고개를 돌려 되받아 소리쳤다.
“가루비누가 뭐라니? 세탁에 쓰는 거지.”
짜증이 묻어난 억양이 어느새 오르고 있었다. 당연한 것을 왜 모르냐는 말투였다.
“……”
남편의 두 눈이 황소처럼 커졌다. 무슨 말을 하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눈빛이다. 분명 서로가 같은 언어로 대화하고 있는데 한쪽이 알아듣지 못한다. 낯설고 어색한 눈빛들이 허공에서 충돌했다.
“혹시 ‘하이타이’ 말하는 거야?”
눈치 빠른 남편이 먼저 말했다.
“하이타이? 그게 뭐예요?”
“화장실 청소하는 데 쓰려는 거 아니야?”
고개를 끄덕이며 내가 답했다.
“맞아요. 그래서 가루비누 좀 가져다 달라고 한 거죠.”
남편이 돌아서서 웃방으로 가더니 가루비누 봉지를 손에 들고 왔다.
“이거 맞지? 하이타이!”
“이게 가루비누지, 하이타이라고요?”
“남에서는 이런 가루 세제를 하이타이라고 해.”
하이타이, 하이타이……. 속으로 몇 번 곱씹어 보아도 ‘비누’보다 ‘넥타이’가 먼저 떠오르는 그런 단어였다. 남북이 사용하는 생활용 제품명이 이렇게 다르단 말인가. 순간 영토의 분단이 언어의 분단으로, 그리고 그 언어의 분단이 문화의 분단으로, 또는 문화의 분단이 다시 언어의 분단으로 오랫동안 이어지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루비누’는 북에서 ‘분말비누(粉末--)’를 순우리말로 다듬은 말이다. 물론 남에도 ‘가루비누’라는 단어가 없는 것은 아니다.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수록돼 있으며 ‘①가루 상태로 만든 비누 ②‘합성 세제’를 달리 이르는 말’로 풀이돼 있다. 다만 남에서는 북에 비해 그 쓰임이 현저하게 적은 것 같다. 수많은 기업들이 생산한 제품이 시장경쟁에서 우위를 점하려면 소비자의 눈길을 끄는 독특한 제품명이 필수적이므로 외래어로 된 제품명들의 수가 경제 발전에 비례하고 있는 듯하다. 남에서는 영어를 잘하면 ‘있어 보이는’ 사람으로 인식되는 사회 문화 영향도 작용하고 있다고 본다.
북에서도 ‘있어 보이는’ 부와 문명을 동시에 불러온 제품 중의 하나가 가루비누이다. 가루비누 제품이 북에 처음 등장한 시기는 1990년대 중반 이후이다. 국가공급체계가 무너진 틈새 속에 중국에서 수입된 비누 제품 중 북한 사람들이 주목한 것은 가루비누였다. 국가가 생필품을 공급하던 시기에 비누 제품은 ‘덩어리(고체)’ 빨래비누와 세수비누3)가 전부였고 그마저 부족하였으니 포장된 비누는 사치였다. 그런데 중국에서 수입된 가루비누는 파란 봉지에 포장되어 있는 것도 놀라웠지만, 가루비누로 옷을 빨래하면 은은한 향기가 후각으로 느껴져 이색적이었다.
가장 먼저 도시 여성들이 가루비누를 사용했다. 가루비누로 머리를 감으면 머리칼이 하늘하늘 바람에 날려 기분이 무척 상쾌했던 기억이 난다. 그전까지는 빨래비누로 머리를 감고 푸석해진 머리칼을 유연하게 하기 위해 식초를 물에 조금 떨어뜨려 머리칼을 헹구는 게 상식이었다. 그런데 장마당이 생기더니 식초보다 더 좋은 ‘가루비누’ 문명이 다가온 것이다.
2000년대 들어 도시 여성은 물론 농촌 여성들도 현금소득이 일정하게 발생하자 가루비누 소비가 대중화되었다. 세탁물 구석구석 덩어리 비누로 비비고 또 비비며 손빨래를 해야 했던 여성들의 중노동이 가루비누 덕분에 경노동으로 변화했다. 덩어리 비누로 세탁을 하자면 손으로 힘껏 진때 묻은 옷을 비벼야 하므로 손힘이 필요하다. 반면 함지에 가득 부은 따뜻한 물에 가루비누를 적당히 풀어 넣고 세탁물을 담궈 진때가 불어난 후 두발로 꾹꾹 밟기만 하면 세탁의 절반이 해결된다. 하얀 블라우스도 거품이 올라오는 가루비누 물에 살랑살랑 비비면 깨끗이 세탁된다.
300그램 단위로 포장된 중국산 가루비누 한 봉지 가격이 1990년대 말까지만 해도 쌀 1킬로 가격이었다. 그러나 2000년대 무역분권화에 따라 지방마다 자리한 무역회사들의 생필품 수입이 급증하면서 가루비누 가격은 옥수수 1킬로 가격으로 내려갔다. 장마당 장사로 살아가는 사람은 누구나 부담 없이 소비할 수 있는 것이다. 단 직업적인 혁명가로 북이 내세우는 여성 교사들은 장사 활동이 제한되므로 가루비누 구매가 쉽지 않았다. 이 때문에 북에서는 남의 스승의날과 유사한 교육절(9. 5.)이 다가오면 스승에게 선물을 드리는 문화가 있는데, 속이 깊은 학부모는 가루비누 한 봉지를 자녀의 담임선생님께 선물하기도 했다.
김정은시대 이후 북한 시장에는 담배와 식품 등 경공업 제품이 중국산 제품을 밀어내고 있다. 가루비누 역시 국산 비중이 눈에 띄게 높아졌다. 여성들 속에서 인기가 높았던 가루비누 성능보다 더 좋은 편리성을 제공하고 있는 국산 ‘물비누’도 부각되고 있다. 인상적인 변화는 가루비누와 물비누를 생산하는 주체가 증가하며 소비시장을 선점하기 위한 상품광고가 등장한 것이다. 김일성시대에 국가계획으로 생산되던 비누에는 ‘비누’라는 글자가 전부였지만, 최근 북에서 생산되고 있는 가루비누 포장지와 물비누 용기에는 ‘한번만에 진때 제거’, ‘척 담그면 척 세척되는’, ‘묵은때도 말끔히’ 등 세탁 효과를 강조하는 광고 문구가 제품별로 다양하게 새겨져 있다. 한편, 가루비누 포장지에 ‘녀성들의 벗’이라는 광고 문구를 보면 여전히 빨래를 비롯한 가사노동이 여성의 역할로 정해져 있는 문화를 실감하기도 한다.
비누 제품 하나로 남북의 역사가 파도처럼 밀려와 수많은 생각을 불러일으킨다. 어쩌면 남북 관계도 ‘가루비누’와 ‘하이타이’처럼 하나의 방향을 말하고 있음에도 언어의 이면을 이해하지 못해 소통의 분단을 생성한 건 아닐까? 통일에 금을 긋는 불화를 자처하며 서로에게 상처를 주었던 건 아닌지 남에 정착하는 삶의 순간마다 언어의 다름으로 되돌아보곤 한다.
열린 창가로 연분홍 벚꽃 잎이 사뿐 날아들어 중년의 부부 사이로 내려앉았다.
“자기야, 하이타이 좀 가져다줄래?”
북한 출신 아내가 남한말로 말했다.
“아, 가루비누!”
남한 출신 남편도 북한말로 뜨겁게 화답했다. 언어의 다름을 서로가 이해하니 사랑으로 관계는 더욱더 깊어진다. 안타깝게 얼어붙은 남북 관계도 봄날의 언덕에서 화해의 꽃으로 피어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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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북녘의 《조선말대사전》에는 영어 ‘bucket’에서 온 외래어 ‘바께쯔’와 ‘물바께쯔’가 규범어로 수록돼 있으며 ‘바께쯔’는 ‘물이나 그밖의 물건을 담아 들고다니게 된 그릇의 한가지. 둥글게 생겼는데 우는 아래보다 좀 넓고 손잡이가 달려있다. 흔히 늄, 양철, 비닐같은것으로 만든다’라고 풀이돼 있다.
2) ‘윗방’의 북한식 표기.
3) ‘빨랫비누’, ‘세숫비누’의 북한식 표기. 사이시옷을 받쳐 적지 않는다.
최설
북한대학원대학교 심연북한연구소 객원연구원. 북한 평안남도 출신으로 2011년 한국에 입국했다. 북한대학원대학교에서 북한학 박사 학위를 받았으며 현재 기자, 작가로도 활동하고 있다. 2023년 롯데장학재단과 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가 공동주최한 제5회 북한 연구지원사업 박사급 부문에서 「북한의 비공식 신발제조업 활성화 실태 분석」으로 우수 논문 1등상을 수상했으며, 장편소설 『태양을 훔친 여자』로 ‘북한이탈주민 문화예술 유공자’에 선정돼 통일부 장관 표창을 받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