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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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장경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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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4.05.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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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442
《겨레말큰사전》은
미래의 사전이다
글 장경식 백과사전연구소 대표
《겨레말큰사전》, 그 고유한 위상
《브리태니커 백과사전》 한국어판을 편찬하던 시절, 한국브리태니커회사의 편집개발실에 북한에서 발행한 백과사전의 영인본이 있었다. 북한 정보 확인용 참고 자료였다. 북한 전문가들이 집필한 원고 내용을 교차 대조할 때마다 그 백과사전을 펼쳐 보았는데, 적응이 가장 어려웠던 부분은 항목의 배열 순서였다. 한국과 달리 북한의 백과사전에서는 겹자음인 ‘ㄲ, ㄸ, ㅃ, ㅆ, ㅉ’으로 시작하는 항목이 ‘ㅎ’의 다음에 오고, ‘ㅇ’은 가장 뒤에 배열되어 있었기 때문에, 그동안 익숙했던 자모순에 따라 항목을 찾다 보면 길을 잃고 헤맬 때가 많았다. 같은 언어이지만, 언어가 사용되는 사회에 따라 내용뿐 아니라 언어 규범에도 이렇게 큰 차이가 나타날 수 있으며, 그것이 어느 한쪽의 사용자에게는 매우 불편한 일이라는 것을 실감했다.
십여 년이 지나 남북이 합의하여 《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기로 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처음 들었던 생각은 남북이 함께 사전을 편찬할 때 ‘이런 언어 규범의 차이를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였다. 이후 여러 차례의 공동회의에서 논의를 거쳐 남북 공동편찬위원회는 《겨레말큰사전》에 남과 북의 규범을 절충한 자모순을 적용하기로 합의했다. ‘ㅇ’은 남과 같이 ‘ㅅ’과 ‘ㅈ’ 사이에 오게 하되, 겹자음인 ‘ㄲ, ㄸ, ㅃ, ㅆ, ㅉ’ 은 북과 같이 ‘ㅎ’의 다음에 넣는 순서였다. 이 새로운 자모순의 채택은 아마도 《겨레말큰사전》의 가장 특징적인 부분이 될 것이며, 이 특별한 사전이 이 땅에서 차지하고 있는 고유한 위상을 잘 보여주는 어떤 ‘사건’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 뒤로 또 많은 시간이 지났다. 2014년으로 예정했던 이 사업의 종료는 남북 관계가 경색 국면에 이르면서 계속 미루어졌고, 다시 10년이 지난 지금에도 두음 법칙, 사이시옷 표기와 같은 규범의 합의를 남겨둔 채 미완성의 단계에 머물러 있다. 그 사이에 정보사회에는 많은 변화가 있었다. 2016년, 구글 딥마인드에서 개발한 바둑 인공지능 프로그램인 알파고가 한국의 프로기사 이세돌에게 4승 1패의 전적으로 승리를 기록했다. 이 사건은 그동안 미래학의 영역이었던 인공지능이 현실적으로 적용 가능하다는 것을 모든 사람에게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2022년 말, 오픈에이아이(OpenAI)에서 개발한 대화형 인공지능 챗지피티(ChatGPT)가 공개되자 사람들은 인간과 자연어로 대화가 가능한 인공지능에 열광했다. 2023년에는 이미지 생성이 가능한 인공지능이, 2024년에는 동영상마저도 명령어에 따라 만들어 주는 인공지능이 공개되었다. 명령어만 주어지면 대화뿐 아니라 문학 작품이나 논문도 집필하고 이미지와 동영상까지 만들어 내는 이 놀라운 생성형 인공지능 발달의 추세에 편승하여, 어떤 미래학자들은 의사와 법률가, 기자와 소설가, 광고 카피라이터나 영상 제작자와 같은 특정 직업군의 소멸까지 예측했 다. 시나브로 검색이 사전을 삼키고 인공지능이 인간의 지적 활동을 대신하는 지금, 《겨레말큰사전》의 의미와 가치를 어떻게 생각하여야 할까.
《겨레말큰사전》과 종이사전의 의미
《겨레말큰사전》은 대단히 독특한 위상을 갖고 있는 사전이다. 반만년의 역사라는 공통점과 분단된 이후 팔십 년 가까이 이어진 현대사의 단절이 이 사전의 바탕에 깔려 있다. 남북은 이 사전의 편찬에 합의하며 “민족의 언어 유산을 집대성하고 남북의 언어 통일을 준비하기 위해 남과 북이 공동으로 편찬하는 최초의 우리말 사전”이라는 지상의 명제를 실현하기 위하여 겨레말을 남한과 북한 공동으로 채집·연구하고, 서로 다른 언어 규범에서 나오는 차이를 극복한 공동 편찬 요강을 적용하기로 했다. 이는 이 사전의 가치가 남북통일이라는 미래를 견인하는 데에 있음을 보여주는 동시에 지금, 현재 이 사전의 물성이 가져야 할 고유의 영역을 잘 드러낸다.
수록 올림말이 30만여 개에 이르는 《겨레말큰사전》에 적용되는 규범은 남북의 현행 어문 규범을 토대로 하여 남북이 학술적 논의를 거쳐 보완 작성한 통일 지향적인 단일 언어 규범이다. 이 규범은 《겨레말큰사전》 편찬을 목적으로 작성되는 단일 규범이지만, 단계적인 수정, 보충, 완성의 과정을 거쳐 민족어 통일 규범으로 발전시키는 것을 전제로 하는 만큼 잠정적인 ‘통일 규범’ 초안의 성격을 지닌다. 다만, 이 규범은 남북에서 사용하고 있는 현행 어문 규범에 대하여 어떠한 구속력도 가지지 않는다. 이는 《겨레말큰사전》이 현실적으로 당대의 언중이 일상적인 언어생활에서 참고할 실용적인 사전이 아니라, 남북통일이라는 담론을 전제로 한 미래의 규범이 적용된 사전임을 의미한다.
모든 사전은 담론의 구성체이다. 인쇄본 시대의 사전은 모두 특정 분야에 대한 편찬 주체의 관점과 견해가 반영된 담론의 구성체였으며, ‘종이책’이라는 물성을 통해 그 담론의 총체와 정체성을 보여주었다. 편찬 주체의 담론은 올림말의 선정과 배열순서 같은 거시 구조뿐 아니라, 개별 항목의 뜻풀이말과 같은 미시 구조를 통해서도 발현된다. 유재원의 《우리말 역순사전》은 올림말의 배열순서라는 거시 구조의 가치를 극단적으로 보여준 훌륭한 예일 것이다. 한편 일본의 대표적인 국어사전 《신메이카이 국어사전》은 편찬자의 담론에 따른 뜻풀이말의 새로운 경지를 보여주는 사례로 널리 알려져 있다. 이 사전의 편집 주간이었던 야마다 타다오는 ‘사전은 문명 비판’이라는 신념을 바탕으로 “[동물원] 생태를 대중에게 보여주는 한편 보호하기 위해서라고 하지만, 잡아온 많은 날짐승과 길짐승, 곤충과 물고기 등에게 좁은 공간에서 생활할 것을 강요하며 죽을 때까지 기르는 인간 중심의 시설”과 같은 뜻풀이말을 넣었던 것이다.
요컨대, 통일 담론을 전제로 이중언어 사전과 단일 언어 사전의 과도적 성격을 띠고 편찬되는 《겨레말큰사전》은 거시 구조와 미시 구조에서 가상의 언어 규범이 구현되었을 때의 실체를 보여주는 사전으로서의 의미가 가장 크다. 이런 종류의 사전은 그 자체가 물성을 가진 독립적인 실체일 필요가 있다. 그래야 남북의 같은 올림말의 의미 차이(‘낙지’와 ‘오징어’), 또는 같은 의미를 가진 다른 올림말(‘한복’과 ‘조선옷’) 사례의 제시에 더하여, 미래의 언어 규범 가운데 하나인 낯선 배열 순서까지를 실감하게 함으로써, 서로 다른 두 언중이 서로의 언어생활을 이해하고 차이를 극복하는 도구로서 이 사전이 지향하는 담론 구조 전체를 제대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겨레말큰사전》 종이사전은 사용자에게 통일을 전제로 한 ‘겨레말’ 담론의 구성체가 실제로 어떻게 구현될 것인가를 총체적으로, 그 물성을 통해 보여주는 가장 바람직한 방법일 것이다.
디지털 시대의 《겨레말큰사전》
《겨레말큰사전》이 종이사전으로 편찬되어야 이 사전이 지향하는 담론을 온전히 보여줄 수 있음에도, 이미 디지털 시대로 접어들었다는 현실 역시 부인할 수 없다. 2000년 초 인터넷 시대를 맞아, 사전은 일반적인 도서보다 이르게 직접적인 영향을 받았다. 사전의 많은 정보를 쉽게 담을 수 있는 매체로 당시 과도적 매체였던 시디롬이 채택되었고, 인터넷 발달에 따라 종이사전의 물성은 일반 도서와는 달리 대중적 효용을 급격하게 잃었다.
하드웨어는 그 속에 담기는 소프트웨어뿐 아니라 휴먼웨어1)까지 상상 이상으로 변화시킨다. 지식과 정보를 전달하는 매체가 다중적으로 존재하는 오늘날을 흔히 ‘다중매체 시대’라고 한다. 다중매체 시대의 가장 큰 특징은 콘텐츠 전달 방식의 다변화, 중층화에 따라 사용자 환경이 대단히 다양해졌다는 점이다. 사용자는 이제 더 이상 개별적인 종이사전에 집착하지 않고, 인터넷 검색으로 궁금증을 해결한다. 종이사전이 물성을 잃고 디지털로 전환되어 하나의 검색창 속에 융해되는 순간, 개별적인 편찬 주체에 의해 독자적인 정체성과 가치를 인정받고 다양한 미시·거시 구조로 완결되었던 지식의 세계, 즉 담론의 완성된 구성체를 제공했던 사전들은 ‘검색’이 제공하는 결과 속에서 구조를 잃고 분자 단위로 해체되어 ‘데이터’로 통합되었다.
디지털 시대는 인쇄본 사전들이 갖고 있던 각각의 정체성을 휘발시켰다. 물론 ‘검색’에서도 항목의 앞이나 끝에 출전을 밝히는 경우가 없지 않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용자들은 검색 결과들에 붙은 출전의 개별성을 유의미하게 인식하지 않는다. 이는 전자사전 형태에서 앞에서 말한 《겨레말큰사전》의 담론이 전혀 드러나지 않게 됨을 의미한다. 오히려, 일반적인 언중들이 표준으로 삼는 《표준국어대사전》과 다른 올림말이나 뜻풀이말이 사용자들에게는 혼란을 줄 수도 있다. 《겨레말큰사전》은 ‘미래의 사전’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전자사전을 기획할 때에는 《겨레말큰사전》의 거시 구조와 미시 구조를 총체적으로 구현하되, 독립적인 사이트에서 이 사전의 담론과 지향을 충분히 이해하는 사용자에게 제공하는 것이 바람직할 것이다. 종이사전에서 볼 수 있는, 현행 남북의 언어 규범에서는 적용하지 않고 이 사전에만 적용하고 있는 자모 배열순서 등도 이 전자사전에서는 보여줄 수 있도록 기획되어야 할 것이다.
《겨레말큰사전》과 인공지능
많은 사람들이 열광하고 있는 인공지능이 사전을 대신할 수 있을까? 사실 디지털 시대의 사전에 대한 논의는 무수히 이루어져 왔다. ‘사전’의 정의조차 “어떤 범위 안에서 쓰이는 낱말을 모아서 일정한 순서로 배열하여 싣고 그 각각의 발음, 의미, 어원, 용법 따위를 해설한 책”(《표준국어대사전》)이라는 고전적인 개념 대신 “특정한 맥락에서 사용자가 최적의 언어적 선택을 내릴 수 있도록 도와주는 도구의 하나”(테오 호펜버그2))라는 사용자 관점의 개념까지 새롭게 제시되는 상황이다.
인공지능은 이러한 디지털 시대의 궁극적인 상징이자, 실존하는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그 개념적 가능성과 미래를 미리 예단하기는 쉽지 않으나, 현재 예측할 수 있는 범주 내에서의 인공지능은 사실, 단순하게 말해 ‘자의식’을 갖지 않은 인간과 같다고 볼 수 있다. 이제까지 공개된 생성형 인공지능은 학습한 데이터에서 질문의 의도에 부합한 정보만을 수집해 이를 마치 사람이 만든 것 같은 문장이나 이미지, 동영상으로 가공하여 응답한다. 이런 점에서 인공 지능은 제공된 모든 데이터를 학습한 인간과 유사하다. 차이가 있다면, 인공지능은 자기 성찰에 대한 인식이 없으며, 수집한 데이터 자체의 오류에 대해서도 판단할 만한 능력을 갖추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테오 호펜버그의 정의에 따른다면, 이론적으로 보아 인공지능은 충분히 사전의 대체물로 기능할 수 있을 것이다. 인공지능은 흔히 사전학에서 말하는 ‘말뭉치’에 해당하는 다량의 데이터를 학습할 것이며, 그 데이터 가운데 계량적으로 가장 많이 사용되는 용례를 풀이말로 제시할 가능성이 높다. 더 오류가 적은 인공지능을 개발하기 위해서는 인공지능이 학습할 데이터에 더 풍부하고 더 잘 편찬된 사전들이 포함될 필요가 있고, 《겨레말큰사전》의 올림말 30만여 개는 분명 인공지능의 능력을 키우는 데 큰 도움이 될 것이다.
하지만, 인공지능이 《겨레말큰사전》의 독특한 위상 을 넘볼 수는 없을 것이다. 앞에서 논의한 바와 같이, 《겨레말큰사전》은 당대 언중의 사전이 아니라 미래의 사용자를 위한 사전이요, 편찬 주체의 담론이 편찬자에 의해 거시 구조에서 미시 구조까지 미세하고 철저하게 구조적으로 반영된 사전이다. 우리가 꿈꾸는 남북통일을 겨냥한 미래의 언어 규범이 적용된 언어사전인 《겨레말큰사전》의 편찬 개념과 의의를 당대의 데이터로 학습되어 있을 뿐인 인공지능은 끝까지 정확하게는 이해하지 못할 것이며, 사용자에게 현행 말뭉치나 국어사전 데이터와 다른 올림말이나 뜻풀이말의 관계, 그 거시 구조와 미시 구조의 미묘한 차이까지는 끝내 설명해 줄 수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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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사용자 능력, 권한 및 사용자 인터페이스 설계를 강조한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2) 프랑스의 인공지능 기반 사전 및 번역 회사인 레베르소(Reverso) 대표.
장경식
한국백과사전연구소 대표. 한국브리태니커회사에서 편집책임자와 대표를 지냈으며, 한국사전학회 창립 회원으로 출판이사를 맡고 있다. 브리태니커백과사 전에 대한 개설서 『브리태니커 백과사전』을 썼으며, 「백과사전의 독자」, 「지식 포털과 온라인 사전」, 「한국 현대 백과사전의 담론적 성격에 대한 시론」, 「디지털 인문학 시대 백과사전의 역할」 등의 논문을 썼다. 1995년 중앙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으며 「삶은 달걀」, 「바퀴」, 「너의 기억에 담긴 나를」 등을 발표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