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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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김주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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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4.10.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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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610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나니라
글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
올해는 한힌샘 주시경 선생이 서거하신 지 110년이 되는 해이다. 선생을 추모하면서 선생의 발자취를 쫓아다녀 보기로 하였다. 한글학회와 세종국어문화원이 공동으로 주최하여 답사를 다닐 시민을 모았는데 전세버스 한 대에 탈 수 있는 인원인 25명이 당일에 마감되었다. 그날은 7월 27일로 선생이 서거하신 날이었다.
주시경 선생에 대해서는 워낙 책과 글과 논문들이 많아서 우리가 매우 잘 알고 있는 분으로 생각하지만 나 자신도 모르고 있는 것이 아직도 많다는 생각이 들어서 버스의 한 자리를 신청하였다. 해설은 김슬옹 한글학회 이사가 맡았으며 재치 있는 설명으로 답사에 재미를 더해 주었다. 장마의 한가운데 있었지만 마침 그날은 우산 없이도 다닐 수가 있었다.
한힌샘
배재학당
선생은 1894년에 배재학당에 입학하였으나 중간에 다른 곳으로 전학하였다가 1896년 3월에 배재학당에 재입학하였다. 당시의 배재학당에는 학생들이 학비를 벌면서 학업을 이어나갈 수 있도록 하는 제도가 있었다. 본인만 부지런하면 학자금이 없이도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선생은 1896년 4월부터 배재학당에 있던 삼문출판사에서 임시직으로 일을 하게 되었다. 당시 독립협회를 운영하던 서재필은 그 해 4월에 독립신문을 창간하면서 선생에게 회계 겸 교보원(교정보는 이) 일을 맡김과 동시에 독립신문(세 쪽은 한글, 한 쪽은 영문) 한글 부분의 책임을 맡겼다. 4월 7일에 나온 독립신문 창간호는 천지개벽이라고 할 만큼 새로운 면모를 지니고 있었다. 한자로부터의 독립을 소리 높여 외친 것이다. 기존의 한자 위주로 조판된 검은빛의 신문에 비한다면 하얀빛의 한글 신문이었다. 한글 전용에 띄어쓰기까지 갖춘 체재로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는 한글 세상의 모습을 예고하 는 듯했다. 청년 주시경은 확고하게 우리 민족은 한글만으로 글자살이를 해야 한다고 실물을 보여 주면서 주장한 것이다. 이후 제국신문에서도 근무하였는데 이 신문은 민중 및 부녀자를 위한 신문이었으며 독립신문의 영향으로 역시 한글 전용에 띄어쓰기를 하였다. 독립신문에서의 ‘국문론’에 이어 제국신문에서도 일관성 있게 “국문이 발달되는 날에야 우리 대한이 세계에 독립 부강국이 될 줄로 짐작하노라.”라는 논설을 발표하였다.

상동교회
상동교회는 남대문 밖에 있다. 성 밖에 사는 일반 서민들도 교회를 다닐 수 있게 하려고 그 위치에 지은 것이다. 전덕기 목사는 그곳에 상동청년학원을 개설하고 젊은이들에게 민족 교육을 시행하였다. 주시경 선생은 여기에 하기국어강습소를 세우고 국어와 국문을 가르쳤다. 1907년에 제1회 졸업생을 25명 배출하였다. 제2회 졸업식은 1908년에 안산 봉원사에서 행하였다. 제3회를 거쳐 제4회(1910년)는 주시경 선생이 근무하던 보성중학으로 옮겨 실시하였다. 이후 일시 중단되었다가 ‘하기조선어강습소’로 명칭을 바꾸어 제5회(1912년), 제6회(1913년)를 지방에서 개설하였다. ‘국어’라는 말을 못 쓰게 되니 ‘조선어’로 바꾼 것이다.

봉원사
『한글모 죽보기』(한글연구모임 일람)에는 1908년 8월 31일에 봉원사에서 ‘국어연구학회’를 창립하고 회장으로 김정진을 뽑았다고 적혀 있다. 이 학회가 우리 나라 최초의 민간학회이며 오늘날까지 116년을 이어 오고 있는 ‘한글학회’이다. 봉원사는 당시에 새절이라고도 불렸는데, 여름 끝자락에 주시경 선생이 제자들과 함께 시원한 안산 계곡으로 가서 제2회 졸업식을 하면서 동시에 학회를 창립하고 국어 국문 연구의 의지를 다진 것으로 보인다. 제1대 회장인 독립지사 김정진(김호, 찰스) 선생은 1914년에 미국으로 가서 사업에 성공하여 상하이 임시정부에 독립운동 자금을 보내는 등 많은 경제적 지원을 하였으며 외교적 지원도 아끼지 않았다. 미주에서 독립운동의 위대한 지도자로 통한다. 현재 미국 로스앤젤레스시에는 그의 이름을 딴 ‘찰스 H. 김 초등학교’가 있다.
국어가 조선어로
1910년 국권을 강탈한 일본제국주의는 일본어가 ‘국어’이며 지금까지의 국어였던 우리말은 ‘조선어’로 부르도록 강요하였다. 당장에 2년 남짓 써오던 ‘국어연구학회’의 이름을 바꾸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리하여 배달말글몯음(조선언문회, 1911년), 한글모(1913년) 등으로 이름이 바뀌어 갔다.
주시경 마당
주시경 마당에는 1910년 전후에 고뇌에 찬 표정으로 책 보따리를 들고 한말글을 강습하기 위하여 다른 학교로 바삐 발걸음을 옮기는 선생의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다른 모퉁이에는 선생께 큰 영향을 끼친 헐버트 박사가 최초의 한글로 된 교과서인 『ᄉᆞ민필지』(1891년)를 들고 있는 모습이 조각되어 있다. 주시경 선생의 별명은 주보따리였으며 서울 시내 10여 교육기관을 돌아다니며 강의를 하였다. 주시경 마당 기둥에 다음과 같은 글귀가 있다.
"말이 오르면 나라도 오르고
말이 내리면 나라도 내리나니라."
선생은 을사늑약을 겪으면서 국운이 곧 쇠할 것으로 예상하였으며 나라가 망하더라도 말과 글이 살아 있으면 광복을 이룰 수 있을 것으로 판단하였다. 제자들에게도 이 사상을 깊이 각인시켜 주었다. 이른바 어문민족주의 사상인데, 국권을 잃은 지식인이 자신의 학문에 대해서 취할 수 있는 최상의 태도였다. 지식인이 현실을 떠나서 학문의 세계에만 몰입해 있을 수 없는 시대였기 때문이다.

세상을 뜨시다
선생은 1914년 7월 27일에 세상을 떠났다. 선생의 사회 활동 기간은 18년에 불과했다. 그 짧은 기간 동안 선생은 애국 계몽 활동을 하고, 연구를 통하여 많은 저서를 남기고, 교육을 통하여 많은 제자를 길러 내었다. 실로 불꽃같이 치열한 삶을 살다 간 것이다. 많은 제자가 넋을 놓고 울었다. 그들은 한결같이 학문적으로 스승의 발치에도 못 따라갔는데 앞으로 이 나라의 국어국문 연구와 실천 활동을 어떻게 이끌어 가겠느냐 하는 절망감에서 운 것이다. 다행히 제자들은 스승의 이른 죽음을 헛되이 하지 않기 위해서 힘을 합쳐서 스승이 남긴 일을 목숨을 바쳐가며 성취해 내게 된다.
조선어학회 터
조선어학회 터는 화동 사무실이 있던 곳인데 ‘서울의 건축왕’이라고 불린 정세권 사장이, 여러 학자들이 한마음으로 스승이 완성하지 못한 《말모이》를 만든다는 소식을 듣고 감명을 받아서, 1935년에 학회에 기증한 2층 양옥이 있던 집터이다. 정 사장은 오늘날의 북촌에 한국인을 위하여 많은 집을 지어서 분양함으로써 그곳을 일본인으로부터 지킨 분이다. 이 사무실이 있었던 덕분에 비로소 회원들이 한자리에 모여서 토론을 하며 사전 집필 작업을 할 수 있게 되었다. 주시경 선생의 이론을 기반으로 하여 〈한글 마춤법 통일안〉(1933년)이 마련되었으며 뒤이어 〈표준말 사정〉(1936년), 〈외래어 표기법〉(1941년) 등 어문 규범을 정하였다. 이제 사전을 만들 모든 준비가 다 된 것이다.
한글학회
한글학회가 있는 한글회관에 도착하였다. 조선어학회는 1949년에 한글학회로 이름을 바꾸었으며, 6·25 전쟁의 상처를 딛고 우리 민족 최초의 우리말 대사전인 《큰사전》(전 6권, 1947-1957)을 발간하였다. 한글회관은 ‘조선어학회 수난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33인 중의 한 분인 초대 법무부장관 이인 선생이 전 재산을 기부하고 여기에 국민 성금과 국가의 지원 등을 보태서 지은 5층 건물이다. 입구에는 주시경 선생의 흉상이 놓여 있다. 한글학회 사무실에는 《우리말 큰사전》(전 4권, 1991-1992)을 집필할 때 쓴 46만여 장의 카드가 벽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한글학회는 주시경 선생의 국어 사랑, 민족 사랑, 나라 사랑 정신을 이어받아서 민족문화를 지키기 위하여 맨 앞 자리에서 잠들지 않고 활동하고 있는 민족의 으뜸별 역할을 맡고 있다.
겨레말모이
주시경 선생의 발자취를 따라가려면 조선광문회 집 터도 방문했어야 하지만 이번에는 가지 못했다. 오늘날 세계인의 관심을 끄는 청계천의 광교사거리 부근이다. 선생은 평소의 지론에 따라서 우리말 사전을 만들기로 결심하고 1911년부터 제자들과 함께 편찬 작업을 시작하였으나 선생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작업은 중단되고 말았다. 다행히 《말모이》 원고본 1책이 남아 있어서 그 면모를 엿볼 수가 있다. 그 후 그의 제자들은 온갖 고통과 박해를 물리치며 《큰사전》을 완성함으로써 스승의 염원을 이루었다. 그러나 세상이 바뀌면서 늘 시대의 새로운 요청에 맞닥뜨린다. 이제 분단된 지 80년이 가까워 오고 남북의 말과 글은 동일한 바탕에서 출발하였지만 꽤 달라졌다. 새로운 말모이가 필요해졌고 그 일을 《겨레말큰사전》이 감당하고 있다. 앞으로 이 사전은 우리 민족이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했을 때 한 선각자가 불꽃 같은 삶을 살며 외친 국어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 정신이 실현되는 또 하나의 기념물이 되기를 기대해 본다. 
김주원
한글학회 회장. 서울대학교 언어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았다. 역사비교언어학과 알타이어학을 연구했으며 훈민정음학회 초대 회장과 한국알타이학회 회장을 역임했다. 주요 논문으로 「세계 여러 문자의 모음 표기 양상」, 「만주어 구어의 재활성화를 위한 기초연구–최후의 화자가 말한 자신의 삶과 언어」 등이 있으며 저서로는 『모음조화의 연구』, 『훈민정음』 등이 있다. 현재 서울대학교 언어학과 명예교수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