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 톺아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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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이
- 도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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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성일
- 2025.04.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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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회수
- 515
우리는 한배를 탔다
글 도종환 시인
봄이 온다, 가을이 왔다
“우리 노래 많이 준비해 오셨죠?” 2018년 3월 31일 평양 순안 공항에 내렸을 때 현송월 단장은 웃으며 내게 이렇게 물었다.
갑작스런 질문에 북쪽 노래를 준비해 오지 않은 나는 “같이 상의 합시다.” 이렇게 말하며 속으로는 걱정을 했다. 평창 동계올림픽을 앞두고 현송월 단장이 이끄는 삼지연관현악단이 강릉과 서울에 와서 공연을 할 때 계몽기 가요를 포함해 우리 노래 이십여 곡을 노래했다.
조용필, 최진희, 이선희, 윤도현, 강산에, 백지영, 레드벨벳…. 우리 쪽 가수 모두 자기 노래를 부르기로 되어 있었고 북쪽 노래를 준비한 가수는 없었다. 함께 아는 동요를 부를까 하는 생각도 했지만 북에서 는 탐탁하게 생각지 않았다. 급하게 북에서 부르는 노래 중에 <푸른 버드나무>라는 노래를 골라 소녀시대 서현에게 준비를 요청했다. 멜로디도 복잡하지 않았고 노랫말도 좋았다. 많은 나무들이 고개를 들고 위를 쳐다보며 올라가는데 버드나무만은 고개를 아래로 숙이고 자란다는 노래였다. 첫 번째 공연에서 전주가 나오면서 남쪽 가수 서현이 등장해 이 노래를 부르자 박수가 쏟아졌다. 다행이라 생각하면서 한편으로는 미안했다. 남북 교류가 십 년 이상 끊어지면서 전에 알던 노래는 옛날 노래가 되었고 최근에 널리 부르는 북쪽 노래 중에 아는 노래가 없었다. 다행스러운 건 남쪽 가수들 공연에 김정은 위원장이 와서 직접 관람하는 것이었다. 김정은 위원장은 남쪽 노래에 많은 관심을 보였다. 백지영이 <총 맞은 것처럼>을 노래할 때 특히 많은 질문을 했다.
구멍 난 가슴에 우리 추억이 흘러넘쳐 /
잡아 보려 해도 가슴 을 막아도 /
손가락 사이로 빠져나가 /
어떻게 좀 해 줘 날 좀 치료해 줘 /
이러다 내 가슴 다 망가져 /
총 맞은 것처럼
이런 노랫말을 자막으로 무대에 크게 띄웠다. 고음으로 거침없이 부르는 창법도 북에서는 낯설거니와 사회주의 리얼리즘으로는 이해가 안 되는 가사가 문화적 충격으로 다가오는 것 같았다. 2층 관람석에서 공연을 보던 김 위원장은 저 가수가 남쪽에서는 어떤 가수냐, 어느 정도 급이냐, 이런 걸 물었다. 그러면서 “상당한 영향이 있겠는데요.”라는 말을 했다. 남북이 교류를 확대하고 공연이 늘어나고 그러면 북쪽에 문화적으로 상당한 영향을 주지 않을까 하는 심 정을 표현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을 했다.
공연 중에 남북의 여가수들이 <얼굴>이라는 노래를 함께 불렀다.
‘동그라미 그리려다 무심코 그린 얼굴~’ 이렇게 시작하는 노래를 남북이 같이 부를 때 뭉클했다. 북쪽 가수들이 알고 있는 노래라서 같이 부를 수 있었다. 남북 음악 교류를 하면서 우리 쪽 준비가 부족했다는 생각이 들어 미안했다. 공연이 끝나고 나서 김정은 위원장은 “이번 공연 제목이 ‘봄이 온다’니 가을에는 서울에서 ‘가을이 왔다’라는 공연을 합시다.”라고 제안했다. 북쪽 공연단이 내려와서 하는 공연을 다시 제안한 것이다. 우리는 아주 좋은 제안이라고 생각했고 꼭 그렇게 하자고 했다.
평화와 번영을 향하여
그해 8월에는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에서 아시안게임이 있었다. 이때도 평창 동계올림픽 때처럼 여자농구, 카누 등의 종목에서 남북 단일팀을 만들어 참여했다. 카누는 급하게 단일팀을 구성해 충주 조정경기장에서 7월부터 연습을 했다. 북쪽 선수 들이 진천 선수촌으로 내려와 합숙하며 충주에 가서 연습을 했다. 그해 여름은 지독히 더웠다.
훈련을 시작하는 첫날, 남북 단일팀 선수들 앞에서 나는 “우리는 한배를 탔습니다. 이제 함께 노 저어 갑시다, 평화를 향하여!” 이렇게 인사를 했다. 그랬더니 갑자기 북쪽 단장이 “잠깐”하고 외치더니 “번영을 향하여!”라고 덧붙이는 것이었다. 우리는 큰소리로 웃었다. 우리는 평화가 북쪽은 번영이 필요하다는 게 인사말에서 바로 묻어났다. 기분 좋게 출발하 는 훈련이었다.
무더위 속에서 지독한 훈련이 끝나갈 때쯤 카누협회장에게 전화가 왔다. 잘하면 메달권 안에 들지도 모르겠다는 보고였다. 원래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메달권 밖에 있었기 때문에 메달은 기대하지 않았던지라 나는 “괜찮다, 메달 따지 않아도 된다, 이렇게 함께 훈련하고 한 팀이 되어 아시안게임에 나가는 것 자체가 의미가 큰 거니까 부담 갖지 말라.”라고 했다. 그랬는데 자카르타에 도착해서 현지 적응 훈련을 하다가 다시 연락이 왔다. 금메달도 바라볼 수 있다는 것이었다. 나는 웃으며 괜찮다고 했다. 그런데 카누 용선 경기에서 진짜로 금메달을 딴 것이다. 정말 놀랐다. 국제 대회는 나라마다 성적이 나와 있고, 경기 때마다 팀별 성적이 나오고, 세계 랭킹이 공개되어 있기 때문에 경기에 나가면서 대개 몇 위 정도 할 건지 예상을 한다. 그런데 메달권 밖에 있던 우리가 금메달을 딴 것이다. 남북이 합치면 이런 시너지가 나온다는 걸 멋지게 보여준 것이다. 우리는 환호했고 남북은 얼싸안았다. 폭염 속에서 어려움을 참고 맹렬하게 연습해 준 선수들이 고마웠다. 특히 낯선 남쪽에 내려와 혹독한 훈련을 참아내고 금메달을 따 준 북쪽 선수들이 고마웠다. 저녁에 북쪽 김일국 체육상 일행과 기분 좋게 술 한잔했다.
올림픽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올림픽이
평창 동계올림픽이라는 게 IOC의 평가다.
전쟁 직전까지 갔던 남북의 위기 상황을 올림픽으로 막아냈고,
남북이 문화 교류, 체육 교류를 하면서 3차례의 남북 정상 회담,
9.19 군사합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게 했으니,
올림픽이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남북이 합치면 시너지가 난다
그해 칠월에는 대전 충무체육관에서 국제탁구연맹 주최 코리아오픈 국제탁구대회가 열렸다. 그 대회에서 남북 단일팀인 장우진·차효심 조가 혼합 복식 결승에서 중국을 3대 1로 이기고 우승한 일이 있었다. 그때도 이미 세계 랭킹이 공개되어 있어 메달을 따기는 힘들 것으로 생각했는데 중국을 꺾었다. 16강전이나 8강전에서도 중국팀, 홍콩팀을 꺾고 올라왔고, 결승에서 남쪽 장우진 선수가, 받을 수 없는 공도 펄펄 날아다니면서 받는 걸 보고 얼마나 놀랐는지 모른다. 남북이 합치면 이런 시너지가 난다는 걸 두 선수는 전 세계에 보여주었다. 남북은 합치면 강하다는 걸 생생하게 보여준 경기였다. 우승이 확정되자 장우진, 차효심 두 선수가 뜨겁게 포옹했는데 보는 우리도 가슴이 뜨거웠다. 1991년 지바 세계선수권대회 여자 단체전에서 남북이 단일팀을 이루어 우승한 적이 있었다. 남쪽 현정화와 북쪽 리분희가 출전한 단일팀이 중국을 누르고 우승한 뒤 27년 만의 국제 대회 우승이었다. 유승민 IOC 위원(현 대한체육 회장)이 주축이 되어 탁구인들 주도로 남북 단일팀을 만들었고 감동을 선물했다.
남북이 다시 만나게 될 때
평창 동계올림픽 여자아이스하키 단일팀과 인도네시아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단일팀을 만들어 경기에 참여한 뒤에 남북은 2032년 서울·평양 공동 올림픽을 개최하자는 논의를 했다. 북쪽 IOC 위원이기도 한 김일국 체육상과 함께 논의했고 토마스 바흐 IOC 위원장과도 상의했다. 스위스 로잔에 있는 국제 올림픽위원회에 남북이 함께 찾아가서 의향서를 제출하였고 파워포인트 자료를 만들어 내가 제안 설명도 했다. 국제올림픽 위원회에서는 좋아했다. 올림픽의 목적은 평화를 구현하는 데 있다. 아테네 올림픽이 열리면 모든 폴리스는 전쟁을 멈추었다. 사람을 죽이던 창을 누가 멀리 던지나 겨루면서 경기를 했다. 백병전을 멈춘 대신 레슬링을 했다. 그게 올림픽의 시작이었다. 이긴 자에게 월계관을 씌워주고 진 자는 박수를 보냈다. 올림픽 정신이 가장 잘 구현된 올림픽이 평창 동계올림픽이라는 게 IOC의 평가다. 전쟁 직전까지 갔던 남북의 위기 상황을 올림픽으로 막아냈고, 남북이 문화 교류, 체육 교류를 하면서 3차례의 남북 정상회담, 9.19 군사합의, 북미 정상회담으로 이어지게 했으니, 올림픽이 이보다 더 훌륭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하노이 북미회담이 결렬되면서 모든 것이 거기서 멈추었지만 트럼프 대통령이 다시 등장했으니 북미 협상은 재개될 것이다. 남북 관계는 다시 꿈틀거릴 것이다. 멈추었다 다시 이어졌다를 반복하면서 80년이 흘렀다. 그러나 남북이 다시 만나게 될 때 우리는 의미 있는 역사의 진전을 이루어 냈고, 그것이 모여 결국 요동치는 역사의 소용돌이를 만들어 낼 것이다. 2018년 9월 19일 평양 5.1경기장에서 문재인 대통령이 “우리는 5천 년 함께 살고 70년을 헤어져 살았다.”라고 연설했듯 결국은 같이 살게 되는 날이 올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