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문가의 강평 | |인쇄 |
≪겨레말큰사전≫과 남북의 언어 관리
남기심 / 전 국립국어원장
1. 남북한 사이의 교류가 완전히 단절되어 있던 시절에 남북의 언어가 서로 많이 달라져 있으리라는 걱정과 함께, 교류 두절이 장기화하면 남과 북의 언어 차이가 돌이킬 수 없는 지경에 이르지나 않을까 우려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러나 남과 북 사이에 어느 정도의 내왕이 있게 되면서 양쪽의 언어가 그렇게 심각할 정도로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을 알게 되어 한시름 놓게 되기는 했으나, 어느 만큼의 차이가 있는 것은 부정할 수 없었는데 ≪겨레말큰사전≫의 편집을 계기로 그 자세한 현황을 확인하고 그 차이를 줄이기 위한 통일작업을 진행하고 있는 것은 크게 경하할 일이다.
2. 남북 언어의 통일을 위한 작업은 언어규범에서부터 시작하지 않을 수 없다. 아직 언어규범과 관련된 모든 문제에 다 합의가 이루어진 것은 아니지만 의견의 일치를 보기가 어려울 것으로 예상되었던 몇 가지 큰 문제들에 합의가 도출되어 온전한 단일 규범 마련에 가깝게 다가간 것은 그 동안의 노력이 컸음을 말해준다. 통일된 규범안이 마련된 것으로 보고된 문제들은 대부분 양측 규범의 약점을 깁고 때운 것으로도 해석될 수 있는 것들이어서 크게 무리가 없어 보인다. 자모음자 명칭의 통일, 자모음자 배열순서의 단일화 등이 다 그러하다.
지금 난항을 겪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 사이시옷 문제, 두음법칙 문제도 절충 방안이 없지 않을 것이다. 북쪽에서는 지금 사이시옷의 표기를 아주 없앴고, 남쪽에서는 아직 사이시옷 표기 규정이 있기는 하지만 예전에 비해 상당히 제한적이다. 다시 말하면 남과 북이 우리의 초기 맞춤법에 비해 사이시옷의 표기를 차차로 제한하는 쪽으로 규정을 바꾸어 왔다는 점에 있어서 서로 일치하고 있다. 남쪽의 경우에 한자어로 이루어진 합성어에는 사이시옷 표기를 아예 없앴고, 양쪽이 다 순우리말일 경우라도 앞의 말에 받침이 있을 때에 한해서 사이시옷을 쓰기로 규정을 고쳐 온 것이 그러한 추세를 보여주는 것이다. 추세가 이러하다는 것은 사이시옷 규정에 무언가 무리가 있다는 것이 된다. 사이시옷 표기 규정이 있는 남쪽에서 '만둣국'을 모든 식당에서 다 ‘만두국’이라 적고, 심지어 ‘나뭇잎’도 많은 사람들이 ‘나무잎’으로 적는 경향이 있는 것이 그러한 사실을 뒷받침한다. 한편 ‘샛길’, ‘바닷가’ 같은 말들까지도 사이시옷을 적지 않는 북쪽의 경우에도 문제가 없지 않다. 따라서 이 경우에도 절충 방안이 없지 않을 것이며, 두음법칙의 경우 역시 고유명사나 상표의 표기에 예외를 두어 절충하는 방안이 있을 수 있다. 그 동안 단일규범 마련에 큰 진전이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이들 문제도 잘 풀려나갈 것으로 기대한다.
3. ≪겨레말큰사전≫의 뜻풀이도 합리적으로 되어가고 있는 것 같다. 그러나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에 다 올라 있는 말들의 뜻풀이가 서로 차이가 있는 경우에 양측이 협의하여 다듬는 것은 자칫 양쪽의 언어현실 모두를 왜곡할 수도 있을 것 같다. 다시 말해서 양쪽이 조금씩 양보하다 보면 결과적으로 두 사회의 언어 현실의 반영이 조금씩 덜어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겨레말큰사전≫은 남북 두 사회의 말의 쓰임을 인위적으로 또는 규범적으로 통일하자는 것이 아니라 각 낱말의 쓰임새 그대로를 반영해 보임으로써 그 같고 다름의 차이를 기술해 놓자는 것이 우선적 목표일 듯한데 그 목표가 어긋나지 않을까 걱정이 없지 않다. 같은 낱말에 어느 한 쪽에서만 쓰이는 의미가 있을 때는 기술상의 문제가 없지마는 거의 같은 뜻으로 쓰이면서 뉘앙스가 조금씩 다를 때 이러한 문제가 있을 수 있다.
4. ≪겨레말큰사전≫의 편찬을 계기로 남북 언어 규범의 단일화와 표기의 통일을 할 수 있는 토대를 마련한 것은 지극히 고무적이고 다행한 일이지만 뜻풀이의 통일은 인위적으로 이룰 수가 없는 것인데 이 부분과 관련하여 ≪겨레말큰사전≫의 뜻풀이가 기여하는 바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표준국어대사전>과 <조선말대사전>의 표기만 통일하여 두 사전을 다 볼 수 있게 했을 경우와 비교하여 어떤 점이 더 나아지는 것일까?
5. 이번 ≪겨레말큰사전≫에 현장어, 지역어 등의 새로운 어휘를 10여만 개 찾아 수록한다고 하는 바 이 일이 순조롭게만 이루어진다면 이것은 ≪겨레말큰사전≫이 거두는 가장 소중한 보람의 하나가 될 것이다. 자칫하면 사라질 수도 어휘들의 보존 차원에서도 그렇고, 모르고 있던 말들을 발굴해 낸다는 측면에서도 그러하다. 우리 말 어느 하나인들 소중하지 않은 것이 있는가?
6. 문제는 이렇게 애써 만든 ≪겨레말큰사전≫의 보급 계획은 무엇인가 하는 것이다. 모든 제품은 수요가 있어야 하는데 그 수요를 어떻게 생성해 낼 것인가? 이 사전의 편찬이 완료되기까지 아직 많은 세월이 남았지마는 이 문제를 미리 생각해 두어 손해될 것이 없다. ≪겨레말큰사전≫ 보급의 문제는 아마 남북이 각기 따로 계획을 세워야 할 것이고 또 그럴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리고 양측의 그러한 계획에 서로 만족할 수 있어야 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