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레말 우체통
나는 몇 년 전부터 학급 아이들과는 돌림일기를, 학교 교사들과는 교단일기를 쓰고 있다. 바쁘게 돌아가는 일상 속에서 아이들의 삶을 들여다보고, 동료 교사들의 마음을 읽고 서로 어루만지기에는 이보다 더 좋은 것은 없다는 게 지금까지의 내 생각이다.
학급 일기는 우리반 급훈(‘바람개비는 바람을 기다리지 않는다.’)을 따서 ‘팔랑팔랑 바람개비’라고 정하고 하루에 한 명씩 일기형식으로 자신의 일상을 기록하고 다음 번호 학생에게 넘긴다. 중간 중간에 돌려 읽고 댓글도 단다. 그리고 나도 아이들 일기를 읽고 같이 댓글도 달고 틈틈이 내 일기도 쓴다. 이 일기는 우리반 아이들끼리만 돌려 읽을 수 있다. 다른 선생님들도 이 일기는 읽을 수는 없다.
교단 일기는 아이들 문제, 교사로서 갖는 고민, 동료 교사나 관리자와 부딪치는 이야기들을 주로 쓴다. 이 일기 역시 선생님들끼리 일주일에 한 번씩 돌려 읽고 댓글도 단다. 간혹 일기를 워드로 쳐서 노트에 풀로 붙이시는 선생님들도 계신다. 그런데 쓸 때도 읽을 때도 내용은 달라진 게 없는데 왠지 손 일기가 진짜 일기 같다.
아래의 글은 우리반 일기 중 일부이다. 아이들이 쓴 생생한 손맛과 내가 흘려 쓴 손맛을 그리고 색색의 펜으로 단 댓글의 손맛들을 보여주지 못함이 너무나 아쉽다.
<2010년 4월 7일 23번 이종민 일기>
날씨는 대머리 가발잡고 여자 애들 치마 잡게 바람 부는 날씨 ㅋㅋ
오늘은 일찍 자서일까? 무거운 아침을 가볍게 차버리고 일어났다. 요즘 아침에는 칫솔에 폼클렌징을 짤 정도로 정신없이 피곤했는데 한방에 다 날아갔다. 그래서인지 지각할까봐 숨차게 뛰어 등교를 해도 기분이 좋았다. 내가 잠한테 시간을 주면 잠은 나에게 활기를 준다. 활기를 가진 나는 반을 박차고 들어갔다. 하루를 준비하려고 사물함으로 가는데 지훈이가 보였다. 어제 머리를 자르고 왔나보다. 여러 생각이 스쳤지만 그냥 말을 아꼈다.
- -돈 주고 한 머리인가? ㅋㅋ
- -당당해 말해. ㅋㅋ
- -일명 귀두컷 ㅋㅋ
점심시간 운동장에 나갔는데 원래 축구하던 자리를 딴 것들이 쓰고 있었다. 그래서 들어와서 공부를 했다. 안 되는 공부를 하려고 멍하니 책을 보고 있었는데 갑자기 유나가 가위바위보 하자고 말을 걸어서 한번 웃었다. 역시 점심시간은 웃는 시간으로 써야 한다.
장우석이는 컴퓨터 시간에 하라는 건 안 하고 맨날 진영이 키 작다고 놀리면서 웃는다. 작을 수도 있지 웃기는 놈이다. 근데 웃기는 게 남일 같지 않다. 오늘 오후 집에 가는 길에 우리 반 여자 애들이 내 앞길을 막고 종민이 바보라고 노래를 불렀다. 내가 그렇게 만만하니?
- -너 내 동생 보다 작다.
- -lady sound u-kiss
- -이거 아니라 brave sound
- -아닌데 좋아서 그래 ㅠㅠ
- -미안해 종민아 ㅠㅠ
- -헐...종민아 나랑 사귀자 ㅋㅋ 제발
오늘은 주엽역에 있는 한의원에 가려고 민수랑 같이 버스를 탔다. 가는 동안 민수가 우리반에 때려주고 싶은 애들에 대해서 얘기했다. 근데 민수는 우리반 애들을 다 때려줄 셈인가? 무서운 놈이다.
- -민수는 얼짱
- -니가 맞아 볼래?
- -맞아야 할 사람 누구?
- -너다 ㅋㅋ
- -참고 인내해라.
- -다행이다 나는 애가 아니질 않은가 담탱이
한의원에 비염치료를 받으러 갔다. 치료 받으러 온 꼬마들과 ‘짱구는 못 말려’를 봤다. 내용은 짱구네 이웃집 누나가 이사를 가서 이별하는 내용이었다. 슬펐다. 그걸 보면서 일요일에 이사를 가신 할머니 생각이 들었다. 만화 속에서처럼 동네 이웃들은 할머니가 이사 가시는 것을 배웅했고 할머니는 그렇게 이사를 가셨다. 하지만 현실에서의 이별은 만화 속에서의 이별보다 더 슬펐다. 텅 빈 집과 텅 빈 공간과 함께 사라진 존재. 그런 허전함을 만화는 담지 못할 것이다. 이사 가시기 전 날, 할머니와 엄마 두 분은 함께 밤을 보냈다. 그 긴 밤이 얼마나 짧았을지 나는 모른다. 하이킥의 세경이처럼 시간이 멈췄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엄마와 할머니는 내가 태어나기 전부터 다른 집에 살더라도 같은 동네에 살며 서로 의지하셨다. 그런데 이렇게 떨어진 것은 뜻밖의 일이었다. 할머니는 마지막으로 함께한 저녁 식사에서 눈물을 보이셨다. 엄마는 할머니가 이사 가신 저녁 조용히 우시며 잠드셨다. 떠나는 것과 보내는 것은 이렇게 슬픈가 보다.
오늘 한의원을 다녀 온 후에 엄마와 저녁밥을 먹었다. 우리는 할머니가 해 주신 잡채를 먹었다. 그 잡채는 이사 가시기 전에 해 주신 잡채인데 유난히 면이 뚝뚝 끊어져 있었다. 엄마는 이제 잡채 먹고 싶을 때 엄마가 해야 한다고 하셨다. 그리고 나갈 때도 가스 불 켜고 나가지 않게 더 조심해야겠다고 하시며 계속 할머니 얘기를 하셨다. 내 생각보다 엄마가 할머니를 많이 의지하고 살아오셨나 보다. 문득 내가 이 집, 이 동네를 그리고 이 품을 떠날 때를 생각해 본다. 마지막으로 죽음으로 가족과 친구와 이별한 사람들의 마음도 조금 느껴진다. 처음에 학급 일기를 쓴다고 했을 때 쓰기 싫고 저걸 얼마나 오래 쓰겠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내 차례가 오니까 뭘 쓸지 막막했다. 근데 막상 펴니까 괜찮은데ㅋㅋ 좋다.
- -이종민은 진짜 글 솜씨가 뛰어나다.
- -순수 종민 이종민 우유 빛깔 이종민
- -슬픈 일기다.
- -야, 이종민 다시 봤당!
- -읽으면서 종민이를 다시 발견한 느낌이다. 아, 이 일기 너-무 좋다.
- -감동적인 일기당!
나는 워드로 깔끔하게 정돈된 글보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일기, 삐뚤삐뚤 쓴 반성문 속에서 여전히 아이들을 읽고 있다.
요즈음은 자율학습시간 직접 손으로 책장을 넘기며 연습장에 단어를 써가며 공부하는 녀석들을 찾기가 참 어렵다. 무슨 약자인지도 모른 체 사용하고 있는 DMB, PMP, MP3로 인터넷 영상 강의를 듣거나, 전자사전, 핸드폰의 버튼을 눌러 단어를 찾으며 공부한다. 아예 더 나아가 깜00 기계를 노려보며 눈으로 깜빡깜빡 단어를 왼다. 아이들은 이미 빠르고 편한 속도감에 익숙해져, 책장을 넘기는 즐거움은 헌납한 지 오래다. 빠르고 편하니 그렇겠지 생각하지만 사전에 손때 묻히며 침 묻히며 공부하던 때와 뭐 그리 좋아졌나 하는 생각을 해 본다. 세월이 흘러 자기 앞에 하나씩 더 빠르고 더 다양한 기계를 두고 아이들이 그 기계 속 문학 작품을 읽을 생각을 하면 나는 벌써부터 가슴이 답답하다.
워드로 깔끔하게 정돈된 글보다 손으로 꾹꾹 눌러 쓴 일기, 삐뚤삐뚤 쓴 반성문 속에서 나는 아이들을 읽고 싶다. 그리고 나 역시 내가 흘려 쓴 글씨 속에서 아이들이 내 마음을 읽게 되기를 희망한다. 우리가 정작 잃지 않아야 할 그 무엇...... 나는 그것을 아이들과 미련스럽게 지켜 나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