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겨레말큰사전 편찬 현장
남북 공동회의에 가기 전 북측 선생님들의 말을 잘 알아들을 수 없는 경우가 많으니, 집중해서 잘 들으라고 해서 내심 걱정을 많이 했다. 억양도 다르고 어떤 경우 어휘도 다르니 당연한 일일 것이다. 대체적으로 내가 속해 있는 새어휘팀 북측 선생님들의 얘기는 큰 어려움 없이 잘 알아들을 수 있었는데, ‘어, 이게 무슨 뜻이지’ 싶었던 게 두 가지 있었다.
회의 첫날, 지역어 조사 얘기를 하는 과정에서 북측의 한 선생님이 ‘연유’라는 말씀을 하셨다. 아, 드디어 올 것이 왔다는 생각이 들었다. <연유>라니! 이게 무슨 뜻일까? 《조선말대사전》을 얼른 찾아보았다.
연유1 「명」 연료로 쓰는 기름.
∥ ~를 야껴쓰다. § [燃油]
아, 이런 뜻이었구나. 그런데 놀라운 것은 남측의 《표준국어대사전》에도 이 단어가 있다는 사실이다. 사전만 놓고 본다면 남북 공히 쓰는 말로 보이나 실상 남측에서는 거의 쓰이지 않는 어휘이다. 사전만으로는 알 수 없는 실생활 어휘의 차이를 발견한 셈이다.
그들은 령을 오르기 전에 물과 {연유를} 보충하려고 려관 앞에서 차를 세웠다. 《한웅빈: 운전사들》
저녁 으스름이 골짜기에 스며들 무렵 {연유를} 만재한 유조 자동차 37호는 전선을 향해 떠났다.
《석윤기: 특수차 37호》
{연유} 공장에서는 부산물로 생산되는 것도 여러 가지가 있으나, 그중에서 아스팔트 같은 것은 이미 우리나라에 일만톤 수출하였다니 오늘날 서울 거리에서 우리가 날마다 밟고 다니는 아스팔트도 실은 대만에서 수입해 온 것이었다.《정비석: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
《겨레말큰사전》에서 이용하는 말뭉치에서 찾은 용례이다. 위의 두 용례는 북측의 용례이고 마지막 용례는 남측의 용례이다. 정비석의 <비석과 금강산의 대화>가 1963년도에 출판된 것이니 예전에는 쓰였던 어휘인 것이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이 단어를 잘 사용하지 않게 된 것 같다.
또 하나 기억에 남는 것은 마지막 회의가 끝나고 함께 저녁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북측의 한 선생님이 하신 말씀이다. “세대주는 무슨 일을 하십네까?” 남편을 말하는 것 같은데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확인을 했다. 나의 예상은 맞았다. 북에서는 흔히 <세대주>라고 한다는 것이다. “한 세대를 대표하며 책임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사전적 의미는 남북이 큰 차이가 없는 것 같은데 실제 쓰임은 차이가 좀 있는 것 같다. 남측에서는 주로 서류에 적을 때나 쓰고 일상 대화에서는 사용할 일이 별로 없지 않을까 싶다.
글쎄 그 집의 웬만한 빨래는 {세대주가} 다 하군 한다오.《리라순: 행복의 무게》
록음이 잠간 낮아진 순간에야 채송순은 다급히 울리는 전화종소리를 가려들을 수 있었다. 그는 혹시 요즘 퇴근이 늦어지는 {세대주한테서} 오는 전화겠거니 하고 범상하게 생각하며 원탁 우에 놓여있는 전화기 곁으로 다가갔다.《량남익: 기적소리는 계속 울린다》
북측 작품에서 찾은 예들이다. 남측에서는 저런 경우에 <세대주>라고 말하지 않는다. 어휘의 뜻은 비슷한데 그 쓰임이 다르니 말이란 참 신기한 존재 같다. 뜻만 가지고는 그 용법을 정확히 알기 어려우니 사전에서 용례가 차지하는 비중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된 순간이었다. 또한 앞으로 《겨레말큰사전》을 만드는 데 정말 많은 주의와 노력을 기울여야겠다고 새삼 다짐을 한 순간이기도 했다.
비록 한두 어휘의 쓰임을 알았으나 이런 식으로 서로가 쓰는 말을 조금씩 알아간다면 어느 순간 언어의 통일이 저절로 이루어지지 않을까 하는 마음을 품으며 나의 첫 번째 회의 참석은 이렇게 끝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