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전영선 / 건국대 통일인문학연구단 연구교수
이즘의 북한 영화에서 가장 많이 다루는 주제는 단연 선군과 경제ㆍ과학이다. 2000년 이후를 선군시대로 자처하는 북한이고 보면 ‘선군정치’는 극히 당연한 주제라 할 수 있다. 경제나 과학이야기도 북한이 국가적 차원에서 늘 중시하였던 주제라는 점에서 새삼스러울 것도 없어 보인다. 그러나 최근 창작된 북한 영화의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양상은 심상치 않다. 창작 현황을 놓고 보아도 북한 영화에서 경제를 주제한 작품이 압도적이다.
제대병사 부부의 노력을 그린 <그들은 제대병사였다>(조선예술영화촬영소, 2002), 군대에 자원하여 6년이나 더 군대생활을 하는 병사와 병사를 걱정하는 병사 어머니를 돌보다 함께 대홍단군 감자협동농장으로 자원한 이야기를 그린 <기다리는 처녀>(조선예술영화촬영소, 2002), 탄광 인수원으로 임명되어 광부들의 먹거리 문제를 자체적으로 해결한 <새로온 처녀 인수원>(조선중앙텔레비죤, 2004), 동해안에 건설된 염전인 광명성제염소 건설 현장을 소재로 한 <부부수첩>(2000), 전력생산을 위해 목숨을 걸고 석탄을 캐는 제대군인 탄광 돌격대의 이야기를 다룬 <민들레 꽃다발>(조선예술영화촬영소, 2004) 등이 2000년 이후에 창작된 경제관련 영화들이다.
북한영화 - 한 여학생의 일기(2007년)
사실 경제문제를 영화로 다룬다는 것은 쉽지 않다. 기실 영화라는 장르는 경제이야기를 풀어가는 데 적절한 장르가 아니기도 하거니와 영화인들이 경제문제를 녹여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것 같다. 잘 만들었다고 해도 본전치기도 어렵다. 영화는 지극히 감성적이고, 드라마틱한 재미를 위주로 하는데, 경제는 냉철한 이성적 판단을 중요시하기 때문이다. 때문에 어쩌다 나오는 경제영화라고 해야 은행털이나 작전세력에 관한 것이다. 이것도 경제와 관련있다고 한다면 말이다.
영화와 경제는 상극과 같은 존재가 아닌가 싶다. 영화인들에게 경제문제는 낯설고 어색한 영역, 극히 공식적인 외투를 입고 극히 편안한 신발을 신은 것과 같다. 북한 영화도 예외는 아니다. 경제의 논리를 강조하다보니 극성(劇性)이 떨어진다.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것이 영 자연스럽지 못하고 생경하기까지 하다. 익숙한 주제인 혁명투쟁이나 인민생활을 다루는 솜씨와는 분명 거리가 있다. 아무리 살펴보아도 영 예전만 못하였다. 북한 영화 자체가 재미로 볼만한 꺼리가 안 된다는 점을 감안하더라도 이전에 비해 형상미도 대중성도 떨어진다. 상대적으로 북한 영화가 지고가야 할 주제만 부각된다.
북한에서 영화를 만드는 이유는 분명하다. 가슴을 울리기 위해서이다. 당 정책은 신문사설이나 강연, 연설, 강연, 논설을 통해 전할 수도 있다. 하지만 머리로 받아들이는 일에는 감동이 없다. 감동이 없으면 자발성도 떨어진다. 시켜서 하는 일은 자발적으로 참여하여 일하는 것보다 효율성이 떨어진다. 영화는 자발적으로 참여할 수 있는 감동을 만들어 내야 한다. 이것이 북한 영화에게 주워진 몫이다.
북한 영화에서 감정의 선은 영화의 성패를 좌우하는 결정적 요소이다. 감동을 만들어내기 위해서 감정의 흐름을 중요시 한다. 사건의 논리적인 전개보다 감정이 흘러가는 흐름을 쫒아 간다. 주인공이 얼마나 냉철하게 판단하고 대처하였는가가 중요한 문제가 아니다. 주인공이 얼마나 진심으로 문제를 받아들이고 진정성을 갖고 행동하였는지가 중요하다. 북한 영화에서 흔히 보이는 이성을 넘어선 ‘감정의 과잉’은 결국 ‘숭고한 희생’이라는 미학을 돋보이기 위한 장치이다.
감성이란 무엇인가? 감성은 마음으로 듣는 것이다. 머리로 이해하는 것이 아니다. 감성은 그래서 직설적인 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사실을 있는 그대로 나타내지 않는다. 때로는 거센 폭풍우처럼, 때로는 봄바람처럼 달래고 어루는 것을 좋아한다. 말하고 싶은 것이 있어도 직접 드러내지 않는다. 이야기의 씨앗을 흙 속에다 숨기고 이야기 싹을 틔우면서 여름날의 소나기와 따가운 햇볕이 지나기를 기다린다. 여름, 가을의 기다림 없이 봄에 뿌린 씨에서 열매를 찾을 수는 없다. 북한 영화가 지루하고 답답한 것은 직접 말해도 될 것을 상대방이 진정으로 이해할 때까지 미욱하게 기다린다는 것이었다. 빠른 장면전환과 속도에 익숙한 어지간한 독자들에게는 지루하기 그지없는 진행이다. 그래도 그렇게 되어야 진정성이 있다고 느끼는 모양이다. 기다림은 북한 영화의 특성 가운데 하나이다.
최근 북한 영화에서는 기다림, 느림이 없어졌다. 말하고자 하는 바가 많아졌고,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강도가 세졌다. 그러다보니 천천히 둘러서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앞에서 드러내놓고 반복적으로 강요한다. 주제가 분명하게 드러난다. 분명하게 드러나는 주제의 상당 부분이 경제 문제이다. 주제가 싹틀 시간을 기다리지 않는다. 영화의 종자로서 경제문제가 들어온 것이 아니라 경제문제를 다루는 외피로서 영화가 차용된다. 그래서 주제도 재미없고, 내용도 재미없다. 매력적인 소재로 선택해야 할 문제가 아니라 절실하게 가르치고 전달해야 할 이야기들이 영화라는 외피를 쓰고 나온 것이다.
많은 부분에서 인위적으로 과거와 현재가 대립되어 있고, 낡은 것과 새로운 것이 대립한다. 새롭게 변해야 할 미래에 대해 기존의 사유가 대립하는 과정에서 북한 영화 특유의 끈끈한 인간관계가 없어지고, 심각한 대립이 부각된다. 실리문제, 과학문제를 두고서 신세대와 구세대 사이에 분명한 선이 그어진다.
영화에는 애써 감추려 해도 드러날 수밖에 없는 북한 당국의 고민이 묻어난다. 경제나 과학에 대한 절실함이 넘쳐나고, 과학으로 매진할 것을 독려하는 목소리가 화급하다. 북한 영화는 지금 국가발전 동력으로 제시한 실리 사회주의의 정착과 과학을 통한 경제 발전을 온 몸으로 보여주고 있다.
한양대학교 국어국문학을 전공하였으며, 동대학원에서 고전문학으로 박사학위를 받았다. 현재 건국대학교 통일인문학연구단 연구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주요 저서로는 『북한의 문학예술 운영체계와 문예이론』(2002), 『고전소설의 역사적 전개와 남북한의 춘향전』(2003), 『북한의 문학과 예술』(2004), 『북한 영화 속의 삶이야기』(2006), 『북한 예술의 창작지형과 21세기 트렌드』(공저, 2009)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