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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의 창

민족의 자존심, <겨레말큰사전>

_ 홍종선 / 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장, 고려대 국문과 교수

  작년에 이어 올해 겨울도 무척이나 춥다. 지구가 온난화해 가고 있다더니, 우리나라도 아열대 권역에 들어가고 있다고 하더니, 그게 그렇게 한마디로 가름이 되는 게 아닌가 보다.
  우리는 우리나라가 점차 남북통일로 가고 있다고 굳게 믿는다. 남북 간의 물꼬가 트이는 조짐을 보이고 때로는 꽤 실질적인 왕래가 이루어지면서, 통일이 생각보다 빨리 올 수도 있다고 기대하기도 하였다. 믿고 싶었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일사천리로 순조롭게만 달리지는 못하는 모양이다.
  지구 온난화는 대부분의 나라에서 원치 않는 현상이고, 우리나라의 아열대화도 얻는 것과 잃는 것 모두 적지 않은 듯하니 함부로 좋다 나쁘다를 말하기 어렵다. 그러나 남북통일은 철없는 무지랭이 말고 우리 민족 그 누구든 간절히 원치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남북통일은 이 민족의 운명이고 미래이니, 우리의 최우선적인 가치와 목표가 되어야 하며 흔들림 없는 굳센 의지의 실천이 늘 함께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최근 수삼 년 동안 우리는 얼마나 우리의 몫을 제대로 실현했는가? 의지가 약했던 것인가, 실천이 서툴렀는가? 대외 종속만을 높인 오늘 얻은 것이 무엇인가? 요즘 추운 겨울바람 이상으로 마음속까지 썰렁한 느낌이다.
  정치적으로 아무리 힘들고 복잡하더라도 가시적인 최소의 통로는 남겨야 한다. 그것은 남과 북 어느 쪽이든 극단화하는 것을 막는 소중한 장치이며, 남북통일이 잠시 스치는 어떤 정세나 위정자에 의하여 미루어질 수 없는 절대적인 것임을 말해주는 강력한 선언이다. 가능한 한 통일을 앞당겨야 한다는 절실한 명제와 그것을 위한 추진 의지는, 우리 민족과 세계의 동시대인들에게 상징적으로라도 내보여야 하고, 실질적으로는 더욱 큰 의미를 갖는 것이다. 얼마나 좋은가? 만월대 공동 발굴이라든가
<겨레말큰사전> 공동 편찬 등과 같이 남과 북이 함께 순수하게 우리 겨레의 역사 자료를 캐고 우리 겨레말을 보듬는 일들이 어떠한 정치 상황에서든지 이어지고 있다면, 우리 민족 그 누군들 마음속 깊이 자긍심을 느끼지 않을 사람이 있겠는가?
  동서독의 통일에는, 주변 국가들의 양해나 몇몇 정치인들의 통합 의지보다도 훨씬 더 크게 작용한 힘이 있었다. 그것은 다름 아닌 독일인들의 높은 문화와 자존심인 것이다. 우리도 독일 못지않은 역사와 문화 그리고 자존심을 가지고 있는 민족이다. 이를 우리의 사회, 문화, 정치 지도자들이 올바로 이끌어 올리고 키워 나가서 우리 민족의 통일, 국토 통일을 이루어야 할 것이다.
  국토나 국가의 통일에는 정치적인 통일 이상으로 더 중요한 것이 있으니, 바로 사회 문화적인 통일이다. 그것은 그 사회를 이루는 구성원들이 사고와 정서에서 공감대를 넓고 깊이 공유함을 뜻한다. 이처럼 사회와 문화면에서 서로 받아주고 동질감을 갖는다면 그 사회가 건강하고 행복하게 되며, 이는 앞으로 커다란 발전을 기약할 수 있는 필수적인 요소이다. 남과 북으로 나뉘어 서로 다른 이념과 체제 속에서 수십 년을 지내오며 벌어진 남북 간의 간극은 결코 적은 것이 아니다. 무조건적으로 급하게 국토 통일만을 전제할 때 오히려 남과 북의 국민들 사이에 이질감으로 절망하고 힘들어하는 일들이 얼마나 많을 것인가. 진정한 통일은 국토나 정치적으로 하나가 되는 것 이상으로 마음과 마음이 서로 통하고 일체감을 함께 느끼는 통일 바로 그것이다. 통일의 그 날 남북 간의 괴리감이나 위화감을 가능한 한 줄이고 서로를 이해하며 위해 주는 사회를 이루기 위해 오늘 우리는 여러 면에서 노력해야 한다. 사회와 문화의 근간을 이루는 언어의 통합 통일은 그 가운데에서도 아주 중요한 기반을 닦는 것이라고 하겠다. 그것은 곧 정치적 국토 통일을 자연스럽게 앞당기는 역할을 할 것이다.
  <겨레말큰사전> 편찬은, 우리말의 통합 통일을 위해 남과 북이 모처럼 힘들게 한 마음으로 결속하여 실행하는 매우 의의 있는 사업이다. 5년 이상 공동 작업을 해 오면서 우리 이 사전의 편찬자들은 우리말에 대한 양측 모두의 순수한 사랑과 자존심 그리고 발전 의지를 확인하고 서로 깊은 믿음을 쌓아 왔다. 올림말의 선정, 뜻풀이, 언어 규범, 집필 방식 등을 논의 결정하고 사전 원고를 집필하는 과정에 이르기까지 따뜻한 이해와 발전적 양보도 주고받으며 그 힘든 사전 공동 편찬 작업을 착실하게 진행해 오고 있었다. 그런데 최근 3년이 넘도록 남북 사전 편찬자들의 만남이 이루어지지 못하여 사전 편찬에 커다란 지장이 생기고 있다. 남북의 정치적인 경색을 핑계로 이 순수한 민족적 사업까지를 막고 있는 것이다. 참으로 답답하고 괴로운 일이다. 민족 발전사의 엄준한 흐름을 거스르는 죄를 짓는 심경이다.
  그러나 봄은 온다. 지난해에 이어 올 겨울도 추위가 혹독했지만 곧 봄은 오고야 말 것이다. 오는 봄을 믿기에 우리는 오늘 이렇게 지낼 수는 있다. 하지만 작년 겨울 긴 혹한으로 봄철의 벌과 나비들이 많이 줄었다. 남북통일의 여정에 더 이상 혹한이 머뭇거려서는 안 된다. 통일의 길에 하루빨리 봄빛이 찾아오기를 고대하고, 우리들의 사전 편찬도 남북이 활발하게 교류하며 남북 공동회의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우리 민족의 자존심으로 만들어지는 우리말의 통합 통일 사전이 진정한 남북통일에 크게 기여할 것을 굳게 믿으며, 다시 본격화할 <겨레말큰사전> 편찬에 온갖 정성을 다하리라, ‘입춘대길’이 나붙은 오늘 다시금 다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