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리의도 / 춘천교육대학교 명예교수
3월 13일, 귀가 번쩍 띄는 보도를 접했다. 국가기록원에서 ≪조선말 큰사전≫의 일부 원고를 복원했다는 소식이었다. ‘복원’이란 말이 좀 의아해서 화면을 보니, 찢기고 훼손된 부분을 손봐서 깔끔한 모습으로 가다듬은 것을 그렇게 표현한 것이었다. 나머지 원고도 그렇게 해 나가리라 믿으며 참으로 느껍게 여겼다.
우리 겨레가 겨레말사전의 필요성을 깨닫고 사전 편찬에 착수한 것은 20세기 초엽이었다. 그러나 여러 가지가 불비한 탓에 결실을 보지 못하다가 일본의 탄압에 시달리던 1929년에 새로운 계기를 마련하였다. 그해 한글날 축하식 자리에서 교육자ㆍ연구자ㆍ출판인ㆍ언론인ㆍ종교인ㆍ문학가ㆍ대중적 명망가ㆍ자본가 등, 각계 인사 108명이 참여하는 조선어사전편찬회를 발기한 것이다.
그 편찬회를 조직한 취지는 그날 발표한 취지서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민족 갱생의 지름길은 문화의 향상과 보급이고, 문화를 촉성하는 방편은 언어의 정리와 통일인데, 그것을 실현할 최선의 방책은 사전 편찬이다.’ 궁극적 목표는 민족의 갱생이었다. 우리의 선각들은 칠흑 같은 시대 상황에서 오히려 민족의 부활을 꿈꾸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분들이 기대한 것은 ‘민족적으로 권위 있는 사전’이었고, 그런 사전을 만들어 내려면 인물을 거족적으로 망라해야 하며, 시간을 넘나들며 지식을 모아야 한다는 점도 충분히 인식하였다.
목표는 뚜렷하고 열의는 충만했지만 모든 것이 가시밭이었다. 그 중에서도 사업에 필요한 돈을 확보하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이었다. 돈이 조달되지 않아 작업이 중단된 적도 있었으나, 몇몇 독지가의 후원으로, 특히 이우식 선생이 거액을 희사해 준 덕분으로 가까스로 사업을 진행할 수 있었다.
작업은 크게 두 갈래로 진행하였다. 한 갈래가 표기법을 표준화하는 일이었으니, 그 결과물로 <한글맞춤법 통일안(1933)>과 <외래어 표기법 통일안(1940)>을 완성하였다. 나머지 한 갈래는 어휘를 수집하고 심사하고 풀이하는 일인데, 그야말로 방대한 작업이었다. 어휘 수집에는 사전편찬원 외에 각계 전문가와 많은 학생과 지역민들을 참여시켰다. 수집한 어휘들을 심사하여 표준낱말을 정하고, 그 결과를 책으로 내었으니 ≪사정한 조선어 표준말 모음(1936)≫이 그것이다. 물론 낱말 개개마다 최종적인 풀이와 정리는 사전편찬원들이 하였다.
숱한 곡절 속에서도 원고 작성이 거의 마무리되고, 원고의 앞머리 ‘ㄱ’ 부분의 일부가 조판되어 교정지가 나온 1942년 10월, 일제의 광풍이 조선어학회를 휩쓸었다. ‘조선어학회 수난’의 시작이었다. 조선어사전 편찬 사업을 항일 운동으로 보고, 그 사업의 주체인 조선어학회의 임원을 비롯하여 사전편찬원 모두와 일부 회원 등, 28명을 함경남도 홍원경찰서 등으로 붙잡아 갔으며, 40여 명을 증인으로 불러 심문하였다. 그로써 사전 편찬의 일은 풍비박산되었으며, 이윤재, 한징, 두 분은 끝내 함흥 감옥에서 목숨까지 잃고 말았다. 8.15 광복으로 마지막까지 감옥에 계시던 이극로, 최현배, 이희승, 정인승, 네 분이 모두 풀려나면서 수난은 일단 끝이 났다. 하지만 10여 년에 걸쳐 온 민족의 정성으로 이룩한 사전 원고는 사라지고 없었다. 크게 낙망하고 있었는데, 하느님이 도우셨는지 1945년 9월 8일, 경성역(서울역) 화물 창고에서 그 원고가 발견되었다. 앞의 3월 13일치 보도는 그 원고 가운데 일부를 ‘복원’했다는 것이다.
되찾은 원고를 가지고 다시 조판을 시작하여 마침내 1947년 한글날에 1권을 발행하였으니, 그것이 바로 ≪조선말 큰사전≫ 첫째 권이다. 이어서 같은 이름으로 둘째 권과 셋째 권을 발행하였다. 그러나 셋째 권부터는 북쪽에 ‘조선민주주의 공화국’이 수립됨으로 인하여 사전의 이름을 ≪큰사전≫으로 바꾸어야 했고, 급기야 한겨레끼리 서로 총부리를 겨누는 6.15 전쟁까지 치러야 했다. 그 비극적인 전쟁의 포화 속에서도 사전 완성에 대한 노력는 한결같았으며, 1957년 한글날에 마지막 여섯째 권을 끝내 발행하였다. 이로써 30년의 대장정이 마무리되었다.
지금까지 보았듯이, ≪(조선말) 큰사전≫의 역사는 한겨레 현대사의 압축판이다. 그 사전은 거족적인 참여와 성원 속에 이루어진 저작물이다. 무엇보다도 국권을 잃은 상황임에도 민족적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국권 회복을 갈망하며 이룩한 결과물이다. 시작에서부터 완간에 이르기까지 거족적인 참여와 성실한 공론화 과정을 거쳤으며, 그렇게 하여 여러 말글 규범도 갖추게 되었다. 온 겨레의 갈망대로 마침내 우리는 국권을 회복하였으며, 국권 회복과 동시에 거침없이 우리말과 우리글로 교과서를 짓고, 국민교육에 매진할 수 있었다. 사전 편찬 과정에서 갖추고 공유한 여러 말글 규범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으니, 이 또한 ≪조선말 큰사전≫이 한겨레에게 준 크나큰 선물이다.
그런데, 불행히도 광복과 함께 한겨레는 분단되었다. 하지만 한겨레 대다수는 민족 통일을 바란다. 남쪽과 북쪽이 다르지 않다. 온 겨레의 소원인 통일, 언제 이루어질까? 요원하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겠지만, 8.15 광복이 그랬듯이, 내일 아침 우리 앞에 불쑥 다가올 수도 있다.
민족 통일과 관련하여 해야 할 일은 많다. 통일 이후에 해야 할 일이 있고 지금도 해야 할 일이 있을 것이며, 통일 이후에라야 실행 가능한 일이 있고 지금도 가능한 일이 있을 것이다. 그동안 추진해 온 ‘겨레말큰사전’ 편찬과 같은 일은 분단 상태인 지금도 할 수 있으며, 해야 할 일이다. 언젠가 실현될 민족 통일에 대비하는 사업이기도 하고, 민족 통일을 촉진하는 작업이기도 하다. 1930~40년대, 그 칠흑 같던 시대 상황 속에서도 우리의 선각들이 희망을 잃지 않고 조선어사전 편찬에 매진했던 것처럼, 지금 우리는 민족 통일의 염원을 끌어안고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을 흔들림 없이 진행해야 한다.
남북이 공유할 사전도 없는 상황에서 덜컥 통일을 맞이한다면 적지 않은 혼란이 일어날 수 있다. 그러한 혼란에 대비하기 위해서 ‘겨레말큰사전’ 편찬 사업은 진행해야 하며, 남북 사회에 민족 공감대를 유지하고 넓혀 가기 위해서라도 그런 사업은 꾸준히 진행하는 것이 바람직하다. 지금은 국권이 없는 상황도 아니고, 독지가에게 손을 벌려야 할 만큼 궁핍하지도 않다. ‘조선어학회 수난’과 같은 광풍을 우리 스스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겨레말큰사전’, 그 편찬 사업은 민족사를 새롭게 열어젖히는 데에 필요한 소중한 열쇠이다.
| 리의도 |
춘천교육대학교 명예교수, 한글학회 이사, 세종대왕기념사업회 상무이사. 2011~2015년 교육부 교과용도서심의회 위원장. 지은 책으로 『올바른 우리말 사용법』등이 있고, 발표한 논문으로는〈한국어 말소리와 한글 기호의 상관성〉, 〈한국 언론 매체의 말글과 어문 규범〉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