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DF인쇄 지난호보기
겨레말은 겨레얼 입니다 겨레말큰사전 누리판 2016.03

새로 찾은 겨레말

‘꺼꿉다’와 ‘꺼꿉서다’

_ 이길재 / 겨레말큰사전 새어휘부 부장

   어릴 적 기억 속에 아직도 선하게 떠오르는 마당 한편의 우물가. 1970년대 초등학교(당시는 국민학교)를 다닌 이들에게는 그리 낯설지 않은 풍경이다. 우물굽1) 주위에 놓여 있는 두레박과 숫돌, 빨랫돌. 그리고 넓적한 돌 위에 놓인 세숫대야. 한겨울 날 물을 길어 가득 채운 세숫대야엔 김이 모락모락 서리고, 어머니의 성화에 못 이겨 잠이 덜 깬 아이는 엉덩이를 추켜들고 연신 푸푸거리며 마지못해 세수를 한다.
   ‘꼿꼿이 선 채 윗몸을 허리 아래로 구부려’ 세수를 하는 모습. 김남천 소설 ‘대하’에서도 그와 비슷한 모습을 찾아볼 수 있다.
그러나 웃통을 벗어붙이고2) {꺼꿉서서} 세수를 하는 걸 보니, 팔과 어깨와 가슴이 어른 부럽지 않게 두드럭두드럭하다.3)《김남천: 대하》
   어디 그뿐이겠는가? ‘꺼꿉서서’ 가랑이 사이로 거꾸로 보이는 세상이 그저 재밌었고, ‘꺼꿉서서’ 밭일도 하고, ‘꺼꿉서서’ 물끄러미 물밑을 바라보기도 한다. ‘꺼꿉서면’ 보일 듯 말 듯 부끄러운 듯 엿보이는 부인네의 흰 가슴, 술이 비어 가는 주전자는 ‘꺼꿉서기’를 기다린다.

서너 간이 될까 말까 하는 물 아래켠에서 궁둥이를 이쪽에다 대고 기역자로 {꺼꿉서서} 열심히 물바닥4)을 들여다보는 아이가 있다.《허준: 잔등》

웃옷을 벗고 속적삼만 입으니, 가슴이 구릉처럼 부풀어서 앞이 잘 여미어지지 않는다. 꼭 집어 허리띠에 꽂아 놓으나, {꺼꿉서면} 흰 가슴이 팡파짐하니 엿보여서 부인네들끼리지만 부끄러웠다.《김남천: 대하》

잠자코 부어서는 곰배님배 마시는 사이 주전자는 점점 가벼워지며 {꺼꿉서기를} 요하더니 주룩 하고 방울만이 뚝뚝 잔 안에 든다.《계용묵: 심원》

제방 아래에서 {꺼꿉서서} 무엇인가 밭에서 거두고 있는 농군을 불러 물으니, 끝난 제방을 내려서서 가던 길을 곧장 가라고 한다.《허준: 잔등》

   ‘꼿꼿이 선 채 상체를 허리 아래로 굽혀 서는’ 동작을 나타내는 말 ‘꺼꿉서다’는 ‘꺼굽’과 동사 ‘서다’가 결합된 것으로 분석할 수 있는데, ‘꺼꿉’이 어디에서 온 말인지 분명하지 않다. ‘꺼꿉서는’ 동작을 머릿속에 그려보면 ‘꺼꾸로’와 관련지어 볼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꺼꿉’이 ‘꺼꾸로’ 혹은 ‘거꾸로’에서 온 것이라면 ‘꺼꿉서다’는 ‘꺼꾸로 서다’인데, 이는 ‘윗몸을 허리 아래로 숙이는’ 동작이라기보다는 오히려 ‘물구나무서다’와 더 가깝다.

그 사람이 물을 받아먹고 돌아설 때에 웬일인지 띠에 달렸던 이 옥고리가 땅에 떨어지겠지. 그러니깐 그 사람이 깜짝 놀라서, {꺼꿉어서} 이것을 줍더니, 잠깐 무엇을 생각하더니, 아따 물값이다 하고 나를 주어요.《이광수: 꿈》

그 동작을 얼마나 오래 했는지 좌우간 허리가 아프도록 {꺼굽어} 서서 구두끈 장난만 하고 있네.《김동인: 어떤 날 밤》

   김동인과 이광수의 소설에서 볼 수 있는 것처럼 ‘꺼꿉서다’의 ‘꺼꿉’은 동사 ‘꺼꿉다’ 혹은 ‘꺼굽다’에서 온 것으로 보인다. ‘꺼꿉다’ 혹은 ‘꺼굽다’ 또한 ‘꺼꿉서다’와 마찬가지로 아직 사전에 실리지 않은 말로 ‘몸의 한 부분을 구부리거나 굽히는’ 동작이다. 따라서 ‘꺼꿉다, 꺼굽다’는 ‘다’에서 온 것으로 추정되며, 이러한 사실은 ‘꺼굽서다’의 또 다른 형태 ‘거꿉서다’를 고려해 보면 더욱 분명해진다. ‘거꿉서다’는 북측에서 조사한 새어휘이다.
비누칠한 머리를 박고 {거꿉서서} 푸푸 소리를 질렀다.《생의 흐름》
   ‘꺼꿉다, 꺼굽다’는 작가 김동인과 이광수의 출신 지역으로 미루어 볼 때 ‘꺾다③(몸의 한 부분을 구부리거나 굽히다.)’의 평안 지역어인 것으로 보인다. ‘꺼꿉서다’도 마찬가지이다. 계용묵, 김남천, 허준 모두 평안도 출신의 작가들이다. ‘꺼꿉서다’의 ‘꺼꿉’이 ‘꺼꿉다’의 ‘꺼꿉-’과 같은 것으로 보면, ‘꺼꿉서다’는 ‘윗몸을 허리 아래로 굽혀 서는’ 동작이다.
   ‘꺼꿉다’와 ‘꺼꿉서다’를 규범어로 풀이해야 할지, 아니면 작가의 출신 지역에 따라 지역어로 풀이해야 할지는 《겨레말큰사전》의 특성상 북측과 합의가 필요하다.
1) 우물의 가장자리.
2) 벗어부치다.
3) 불룩불룩하다.
4) 물밑.

| 이길재 |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새어휘부 부장.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학 박사. 전북대 인문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호남문화정보시스템 책임연구원 등을 지냈으며 논문으로는 <전이지대의 언어 변이 연구>, <전라방언의 중방언권 설정을 위한 인문지리학적 접근> 등이 있고, 저서로는 언어와 대중매체,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