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조남호 / 명지대 국문학과 교수
우리 사회는 ‘압축 성장’이라고 표현될 정도로 빠르게 변화해 왔다. 불과 수십 년 전만 해도 농업 중심의 사회였는데 이제는 농업이 산업에서 차지하는 비중이 크게 줄어들었다. 사회가 빠르게 변화하면서 익숙하던 풍경들이 사라졌고 새로운 풍경이 일상의 풍경이 되었다. 사회의 변화는 언어, 특히 어휘에도 그대로 반영된다. 변하기 전의 사회에서 사용되던 어휘는 풍경이 사라지면서 같이 사라지고 새로운 풍경을 가리키기 위해 등장한 어휘가 일상의 어휘로 자리를 잡게 된다.
꽤 오래 전에 어떤 책을 읽다가 ‘세물전’이라는 단어를 만난 적이 있다. 책의 설명에 따르면 큰일을 치를 때 필요한 물품을 빌려 주던 가게라고 했다. 처음 보는 단어여서 사전을 찾아보았더니 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단어였다. 물자가 부족하고 혼인이나 장례 같은 중대사를 집에서 치르던 시절에 있던 가게였다. 더 이상 물건을 빌리는 사람이 없게 되자 가게가 사라지고 ‘세물전’이라는 말도 역사의 유물이 되어 버렸다.
사회의 변화가 빠르지 않아도 언어는 계속 변화하는데 사회의 변화가 빠르면 언어, 어휘의 변화도 빠를 수밖에 없다. 언어의 변화를 따라야 하는 사전도 증보 작업에 바쁠 수밖에 없다. 새로 등장한 말은 사전 편찬자들이 주목을 하고 있다가 사전이 정한 기준을 충족할 때 수록하면 된다. 그러면 더 이상 쓰이지 않는 말들은 어떻게 할 것인가? 넣기보다는 빼기가 여러 가지로 어렵다. 그렇다고 빼지 않고 그대로 두면 지금도 쓰는 단어처럼 느껴질 수밖에 없는 문제점이 있다. 이 문제점을 피하기 위해 이미 현실에서 쓰임이 없어졌다고 판단되는 말의 풀이에는 그런 정보를 드러내는 표현을 사용하는 방법을 쓴다. ≪표준국어대사전≫의 ‘세물전’ 풀이가 그런 예이다.
세물전(貰物廛): 예전에, 일정한 삯을 받고 혼인이나 장사 때에 쓰는 물건을 빌려주던 가게.
‘예전에’와 ‘빌려주는’이 아닌 ‘빌려주던’이라는 말을 사용함으로써 이제는 없어진 것임을 드러낸다. 그런데 이런 단어들이 시간을 정해 놓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니 사전에서 지금도 쓰이는 말로 보는 시간대를 어디까지로 정할까에 따라 이런 식의 풀이를 적용하는 범위가 달라진다. 사전 편찬자가 방침으로 정하기는 하겠지만 지금도 쓰이는 것이 아닌 이상 기준을 적용하기는 쉽지 않다. 편찬자들이 ‘는’과 ‘던’ 사이에서 많이 고민할 수밖에 없고 정확한 판단을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를 확인하는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세월의 풍상을 겪은 단어는 많은데 관심을 끄는 것 중의 하나로 은어가 있다. 은어는 상대적으로 사회 변화에 민감할 듯하다. 편찬자들이 은어 사용자가 아니다 보니 은어에서 나타나는 변화를 파악하기도 쉽지 않다. 그런데 은어에 대한 수집은 일찍부터 이뤄져 이미 일제 강점기 때 사용되던 은어도 수집되어 있다.
은어가 주목을 받으면서 더 많은 집단의 말들이 조사되었다. 산삼 채취인, 즉 심마니의 은어부터 시작하여 그 이후 걸인, 백정, 기생, 무당, 남사당패, 소장수, 시장 상인, 학생 등등의 집단의 은어가 조사되었다. 그 결과가 사전에 반영되었는데 최근에 나온 ≪고려대 한국어대사전≫에도 은어가 올라 있다.
이처럼 최근에 나온 사전에도 은어들이 올라 있지만 이것들이 지금도 쓰이는 은어일지는 다소 의심스럽다. 필자가 과문해서인지 모르지만 사전에 오른 은어들이 최근에는 조사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보통의 말이라면 세대가 흘러도 필요성이 존재하는 한 계속 쓰였겠지만 은어는 은어라는 속성상 상대적으로 지속될 가능성보다는 새로운 단어로 대체될 가능성이 높아 보인다. 과거에 은어 조사 대상이 된 집단 중에는 사회 변화와 함께 이제는 완전히 사라진 집단도 있다. 걸인과 백정, 기생 집단이 그렇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집단이 없어지면서 은어도 함께 사라질 수밖에 없다. 아직까지 남아 있지만 집단으로서의 폐쇄성이 약해져 쉽게 사람이 유입될 수 있는 심마니, 상인 집단과 같은 경우에도 예전에 조사되었던 말들이 여전히 전승되어 쓰이고 있을지 극히 의심스럽다.
개장마니: 심마니들의 은어로, ‘계집’을 이르는 말.
곰소: 심마니들의 은어로, ‘소금’을 이르는 말.
골자래: 심마니들의 은어로, ‘머리01’를 이르는 말.
노갱이: 심마니들의 은어로, ‘까마귀’를 이르는 말.
《표준국어대사전》에 수록되어 있는 심마니 은어의 몇 예이다. 《고려대 한국어대사전》과 북한에서 나온 《조선말대사전》에도 올라 있으며 풀이가 대동소이하다. 직접 조사했기보다는 조사 성과를 참조해서 풀이를 했을 듯하다. 그런데 풀이에 ‘이르는’이라는 표현을 사용하고 있어 앞서 든 ‘세물전’의 풀이와 비교해 보면 지금도 쓰이는 말로 보아야 할 것이나 과연 지금의 산삼 채취인들에게 물었을 때 이 말들을 사용할까? 이들이 전승이 되어 쓰인다면 사전의 풀이는 그대로 유지되어야겠지만 아니라면 어느 시점에는 과거의 흔적을 보여주는 단어로 사전의 풀이가 조정되어야 할 것이다.
어느 정도 조사가 이루어지고 특수 집단이 사라지면서 은어에 대한 관심은 학계에서 비교적 일찍 줄어들었다. 그래서 최근에는 새로운 은어 연구 성과를 보기가 어렵다. 그렇다고 사전 편찬자들이 직접 나서서 과거에 조사된 은어를 다시 확인하는 작업을 하기도 쉽지는 않다. 연구자들이 나서지 않는 한 은어에 대한 사전 풀이는 답보 상태가 될 가능성이 많다. 아주 오래 전에 조사되었던 어휘 자료들이 지금도 쓰이고 있을지, 변화가 있다면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조사해 보는 것도 흥미로운 연구 주제가 된다. 필자도 과연 이 말들이 지금도 쓰일까 의문을 품으면서도 다른 일들에 쫓기다 보니 아직 확인하는 일을 하지는 못하고 있다. 은어가 현재 어떤 상태에 있는지 연구한 새로운 성과가 나와야 사전에 수록된 은어의 뜻풀이도 개선될 수 있을 것이다.
| 조남호 |
서울대 문학박사. 국립국어원 어문연구실장을 지냈으며, 현재 겨레말큰사전 남측편찬위원회 편찬위원과 명지대학교 국어국문학과 조교수로 재직하고 있다. 저서로는 속담 활용 글쓰기, 두시언해 한자어 연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