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이길재 / 겨레말큰사전 새어휘부 부장
21세기에 들어 우리 사회의 화두가 된 말 중의 하나는 단연코 ‘갑질’이 아닐까 싶다. 이 말이 우리 사회의 어떤 모습을 그려 내고 있을까 뭐 이런 이야기를 꺼내들 생각은 아니다. ‘갑질’은 ‘두 개 이상의 사물이 있을 때 그중 하나의 이름을 대신하여 이르는 말’ 혹은 ‘차례나 등급을 매길 때 첫째를 이르는 말’인 ‘갑(甲)’과 접사 ‘-질’이 결합되어 만들어진 말로, ‘갑이 우월한 사회적 지위를 이용하여 을에게 반복적으로 행하는 부당 행위’이다.
‘-질’은 본래 ‘가위’나 ‘양치’ 등과 같은 ‘가치 중립적인’ 말과 결합하여 ‘행위의 반복’을 나타내는 말이었다(가위질, 양치질). 그런데 점차 ‘도적’이나 ‘강도’처럼 사회적 통념상 ‘부정적 의미’를 갖는 말과 결합되면서부터 ‘-질’은 그 운신의 폭이 좁아진 것으로 보인다(도적질, 강도질). 다시 말해서 ‘-질’은 ‘농락, 첩’ 등과의 결합은 여전히 자유롭지만(농락질, 첩질), ‘수출, 사랑’ 등과의 결합은 아주 어색하거나 불가능해 보인다(수출질, 사랑질). 그러나 ‘갑질’의 ‘갑’과 같이 ‘가치 중립적인’ 혹은 ‘가치 지향적인 말’이라고 하더라도 오랜 시간 ‘사회적 낙인’에 의하여 부정적 의미를 갖게 되는 경우 ‘선생질’이나 ‘서방질’처럼 ‘-질’과의 결합이 비교적 자유롭다.
발주기관 {갑질} 향한 깥끝 무뎌졌나.《건설경제신문》
아침부터 {문자질} 한다고 원장님의 눈빛이 안 좋았다.《임정연: 질러》
광우병 걸린 소 뻔히 알면서 왜 다른 나라에 {수출질을} 하려고 하는 건가요?(웹)
그런데 요즘 우리 사회에서 ‘-질’과는 달리 그 입지를 한없이 넓혀 가고 있는 말 중의 하나가 접사 ‘개-’이다. ‘개-’는 ‘부정적 의미’를 갖는 명사와 결합하여 정도가 ‘아주 심한’의 뜻을 더하는 말이다.
금희 아줌마는 내가 {개무시라는} 최선의 방법을 가르쳐주기도 전에 분연히 일어섰다.《이명랑: 연이 떴다》
후퇴하면서 공장은 멀쩡히 놔두고 집들만 {개박살을} 내놓다니.《권하은: 꿈꾸는 밤》
작년에는 울 아빠가 사무실 경리 아가씨를 후려서 이혼을 하네 마네 집이 완전 {개작살이} 났었고…《양호문: 악마의 비타민》
‘개무시, 개박살, 개작살’은 2000년 이후에 들어서 쓰인 말로, 이미 사전에 올라 있는 ‘개지랄, 개고생’ 등과 크게 다를 바 없다.
조준구의 표현을 빌자면 {개상놈이요} 불한당이 와서 궁색스럽게 차려놓은 격식은 말할 것도 없이 수백 년 묵어온 족보가 얹혀 있는 조준구의 면상까지 묵사발을 만들고 말았다.《박경리: 토지》
네가 {개쓰레기라는} 걸 알아냈다.《정보라: 죽은자의 꿈》
‘개상놈’은 ‘상놈 중의 상놈’, ‘개쓰레기’는 ‘쓰레기 중의 쓰레기’, 즉 ‘최고 중의 최고’이다. 요즈음 ‘개-’가 ‘부정적 의미의 사람’을 나타내는 명사와 결합될 때는 그 의미가 훨씬 더 강화되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큰 틀에서 보면 이미 사전에 올라 있는 ‘개백정’이나 ‘개잡놈’과 크게 다르지 않다.
이 보잘것없는 아버지, 이국거리에 락엽처럼 밀려와 빛없는 삶을 이어가자고 {개족보나} 쓰고있는 아버지를 저애는 그래도 자랑하고싶은 모양이구나.《김종석: 모국어(북측 소설)》
말(末)에 앉아, {개패를} 들고도 화투를 하게 된 이쁜이가 길게 내뱉으며 방석을 당겨 앉았다.《한수산: 모래 위의 집》
무슨 사건이 생기면 어데서 또 {개흥정을} 하는구나 하는 것뿐입니다.《허윤석: 구관조》
그런데 위의 ‘개족보, 개패, 개흥정’의 ‘개-’는 ‘부정적 의미를 갖지 않는 말’과 결합하고 있다는 점에서 ‘개무시, 개상놈’의 ‘개-’와는 다르다. 접사 ‘개-’가 ‘부정적 의미를 갖는 말’에만 결합할 수 있다는 의미 제약을 넘어 ‘화투의 패가 좋다, 나쁘다’와 같이 ‘화자의 주관적 가치 판단’을 나타내는 말과도 결합이 가능해진 것이다. 이때 ‘개-’는 ‘좋지 않은’의 의미이다.
인터넷 티비 결합 상품 {개좋아요}.(웹)
야 너 {개싫어}. 그런 식으로 살면 왕따 당해.(웹)
우와 미쳤다. {개이뻐했었는데} 성장해 나가는 모습이 뭔가 대견하고 멋있어요.(웹)
최근 들어 ‘개-’는 ‘족보’나 ‘패’와 같은 명사뿐만 아니라, ‘좋다, 싫다, 못하다, 잘하다, 이쁘다’ 등과 같이 ‘화자의 주관적 가치 판단’이 필요한 동사나 형용사와 결합하여 ‘아주’의 의미를 더한다. 이때 ‘개-’는 전혀 부정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개좋다, 개싫다’ 등과 같은 신조어들은 아직 문학의 영역에까지 그 영향력을 미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이러한 부류의 신조어들은 사용자 층위에 일정한 제약이 있긴 하지만, 웹상이나 TV 오락 프로그램 등에서 미치는 영향력은 대단한 것으로 보인다.
‘개족보, 개좋다’ 등은 지금까지 알려진 국어의 일반적인 조어방식에서 벗어나 있는 말들이다. 그렇다고 해서 이러한 말들을 사전의 올림말로서 일고의 가치가 없는 것으로 치부되어야 하는지는 좀 더 고민해 보아야 할 일이다. 사전은 언중의 언어생활을 이끌어야 하는 ‘계도성’도 가져야 하지만, 동시에 언중의 언어 현실을 충실히 반영하여 올림말의 외연을 넓혀가야 한다.
사전 편찬자들은 이러한 점에서 양날의 칼을 쥐고 있는 셈이다. 우리 언어 사회에서 ‘개패’나 ‘개족보’ 등은 어느 정도 정착의 단계에 들어선 것으로 보이지만, ‘개좋다, 개싫다’ 등은 아직은 실험 단계에 있는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개좋다, 개싫다’ 부류를 사전의 올림말로 싣는 것은 아직은 시기상조인 듯하다.
| 이길재 |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새어휘부 부장. 전북대학교 대학원 국어학 박사. 전북대 인문과학연구소 책임연구원, 호남문화정보시스템 책임연구원 등을 지냈으며 논문으로는 <전이지대의 언어 변이 연구>, <전라방언의 중방언권 설정을 위한 인문지리학적 접근> 등이 있고, 저서로는
『언어와 대중매체
』,
『지명으로 보는 전주 백년
』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