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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레말은 겨레얼 입니다 겨레말큰사전 누리판 2016.03

뜻풀이 깁고 더하기

갑과 을

_ 민지원 / 겨레말큰사전 연구원

   언어는 살아있는 유기체이기 때문에 언어의 의미도 생성, 성장, 소멸의 과정을 거친다. 의미 변화의 원인과 양상은 여러가지가 있다. 그 중 하나로 일상생활에서 사용되던 단어가 특정 분야에서 사용되거나 그 반대의 경우로 의미 변화가 일어나는 경우가 있다.
경제민주화의 뼈대는 그동안 소상공인과 하도급업자 등 이른바 ''의 횡포에 무력한 ''을 보호하는 것이었다.<“부추겨도 좋을 경쟁은 있다”, 한겨레21, 2015.02.07.>
언젠가부터 우리 영화계엔 ‘사회적 분노 장르’란 게 생겼다. 의 횡포와 의 울분, 응징이 대체적인 스토리라인이다.<“분노가 흥행이 되는 사회”, 중앙일보, 2015.12.04.>
   몇 년 전부터 뉴스와 신문기사에 ‘갑의 횡포’, ‘갑질’이라는 말이 자주 등장하기 시작했다. ‘갑’의 상대어로 짝을 이루며 함께 다니는 말은 ‘을’이며 두 단어를 아울러서 ‘갑을(관계)’라고도 부른다.

‘갑’과 ‘을’의 의미를 이해하기 위해 ≪표준국어대사전≫을 먼저 살펴보자.
≪표준국어대사전≫
갑02(甲) [명]
「1」 두 개 이상의 사물이 있을 때 그중 하나의 이름을 대신하여 이르는 말.
    예) 갑이라고 하는 사람과 을이라고 하는 사람이 있다고 하자.
  ...
「4」 『민속』 천간(天干)의 첫째.

을01(乙) [명]
「1」 둘 이상의 사물이 있을 때 그중 하나를 가리키는 말.
    예1) 예를 들어 갑과 을 두 사람이 있다고 가정하자.
    예2) 갑의 성공은 을의 실패를 조건으로 한다는 것이 적자생존의 논리일 것이다.
  ...
「3」『민속』 천간(天干)의 둘째.
   본래 갑, 을은 천간의 하나를 지칭하는 말이다. 불특정한 인물을 흔히 ‘홍길동’이라는 이름으로 지칭하듯이 불특정한 주체를 순서대로 나열할 때 천간(갑, 을, 병, 정...)을 사용하는 일이 많아 이런 쓰임이 ≪표준국어대사전≫의 첫 번째 뜻갈래로 오르게 된 듯하다.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를 보면 본래 ‘갑’과 ‘을’은 상하나 우열 관계를 의미하지는 않으며 대명사적인 성격을 지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갑과 을 두 사람이 있다>라는 문장은 <A와 B 두 사람이 있다>나 <가와 나 두 사람이 있다>로 바꾸어도 의미가 달라지지 않는다.

   ‘갑’과 ‘을’이 다른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은 이 단어를 계약서상에서 계약 당사자를 지칭하는 법률 용어로 사용한 데서 비롯된 것 같다.
<계약직 고용계약서 예시>
(주) ○○(이하 ‘’이라 한다)와 ○○○(이하 ‘’이라 한다)은 다음과 같이 계약을 체결한다.
...

제5조 [업무 범위]
’은 ‘’이 지정한 업무 내용을 성실히 준수하여 계약 기간 내에 완료하여야 하며 부득이하게 기간이 연장될 경우에는 상호 협의 하에 진행하기로 한다,

각 당사자는 위 계약을 증명하기 위하여 본 계약서 2통을 작성하여, 각각 서명(또는 기명) 날인 후 ‘’과 ‘’이 각각 1통씩 보관한다.
...
   애초에 ‘갑’과 ‘을’은 주종(主從)이나 상하(上下), 우열(優劣) 등을 구분하는 개념이 아니라 수평적 관점에서 계약서상의 당사자 쌍방을 지칭하는 용어였다. 회사나 개인의 이름으로 밝혀 써도 상관없지만 서로 다른 사람과 계약을 할 때마다 새로 형식을 작성하는 일이 번거로워 계약서 전체는 ‘갑’과 ‘을’로 작성해놓고, 상단에 ‘갑이 누구인지’, ‘을이 누구인지’만 밝히도록 한 것이다.1)
   아래는 법률 사전에서 발췌한 것인데 여기서 쓰인 ‘갑’, ‘을’에도 상하 개념이 없어 비슷한 다른 예에서 ‘A’, ‘B’라는 단어로 바꾸어 설명하는 경우도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2)
   교차청약 ...예를 들어 이 어떤 시계를 2만원에 ‘팔겠다’고 청약을 한 경우에 이 청약을 받기 전에 그 시계를 2만원 주고 ‘사겠다’고 하는 청약을 한 경우를 말한다.

   청약 예컨대 A가 토지를 팔겠다고 의사표시를 하고 B가 그것을 사겠다고 의사표시를 하여 두 개의 의사표시가 합치하는 경우(계약의 성립)에 A의 의사표시를 말한다.
   그런데 현실적으로 대부분의 계약에서 계약 당사자 간에 협상력에 있어 우열이 없는 경우는 찾아보기가 힘들다. 일반적으로 계약의 상대를 선택하거나 선발할 수 있고 계약의 조건과 내용을 결정할 수 있는 권한을 지닌 쪽이 계약서를 작성하여 제시하게 된다. 이 때 계약을 주도하는 측에서 계약서 문구에 자신을 지칭하는 용어로 ‘갑’을, 상대방을 지칭하는 용어로 ‘을’을 기재하는 관행이 생김으로써 수평적 의미가 사라지고 힘의 상하 관계를 의미하게 되었다. 즉 ‘갑’은 일을 시키고 돈을 지불하는 고용인(雇用人), ‘을’은 일을 하고 돈을 받는 피고용인(被雇用人)이라는 의미가 덧붙게 된 것이다.
   이른바 땅콩회항 사건 등을 통해서 이 말은 점점 계약관계를 벗어나 자본주의 사회에서 권력을 가진 쪽과 그렇지 못한 쪽의 상하 관계를 가리키는 의미로 일반화되고 있다. 직접적인 계약관계를 맺지는 않았지만 서비스업에 종사하는 사람을 ‘을’, 손님을 ‘갑’이라고 하는 것 등이 그 예이다. ‘갑질’이나 ‘갑의 횡포’는 갑을관계에서 상대적으로 ‘갑’인 이들이 그 우위를 악용하는 경우를 말한다. 거래처인 대기업이 납품업체인 중소기업에 불공정한 거래를 요구한다든지, 회사 내에서 상사가 지위를 이용하여 부하 직원에게 부당한 대우를 한다든지 하는 것이다.
   본래의 의미나 법률 분야에서 처음 사용하기 시작했을 때는 수평적 관계를 의미했다 하더라도 이제 ‘갑을관계’라는 말을 들으면 수직적 관계를 전제하고 이해하게 된다. 위에서 본 표준국어대사전의 뜻풀이에는 이러한 쓰임에 대한 언급이 없어 연관 지어 생각하기가 어렵다. 사전 뜻풀이에도 이런 쓰임을 반영해주는 것이 좋지 않을까 한다. ‘갑질’이나 ‘갑의 횡포’라는 말에서 부정적 어감은 ‘-질’이나 ‘횡포’에 실려있으므로 ‘갑’과 ‘을’은 다음과 같이 풀이해보았다.3)4)
2 (甲) [명]
  ① 둘 이상의 대상이 있을 때 그중 하나를 가리켜 이르는 말.
  ② 계약이나 고용 관계 등에서, 둘 이상의 계약 당사자 중 계약을 주도하는 측을 관행적으로 이르는 말.
      계약서를 작성할 때 주로 쓴다.

  [참고] 을1(乙).

1 (乙) [명]
  ① 둘 이상의 대상 중 하나를 가리킬 때 갑 다음의 대상을 이르는 말.
  ② 계약이나 고용 관계 등에서, 둘 이상의 계약 당사자 중 계약에 참여하는 측을 관행적으로 이르는 말.
      계약서를 작성할 때 주로 쓴다.

  [참고] 갑1(甲).
1) 우리나라와 함께 한자 문화권에 속하는 중국, 일본에서도 계약서를 작성할 때 ‘甲(方)’, ‘乙(方)’이라는 용어를
    사용한다고 한다.
2) 『법률용어사전』, 현암사, 2010
3) 아래 풀이는 글쓴이의 견해이며,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의 공식 입장이 아님을 밝혀둔다.
4) <갑2>, <을1>이 다의어로서 가지는 다른 뜻갈래와의 순서는 고려하지 않았다. 일단 ①에서 갈라낸 새로운 뜻갈래
    라는 의미에서 ②로 보였다.

| 민지원 |

현재 겨레말큰사전남북공동편찬사업회 연구원으로 재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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