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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 속에서의 대화들이 말의 거리를 지운다”

  2005년 작가대회 참석차 평양으로 가던 날의 일이다. 작가대회라는 것이 워낙 어렵게 성사되어 낼 모레 떠난다며 방북교육을 받기는 이미 1년도 훨씬 전이지만, 막상 떠나기는  1년하고도 몇 개월이 더 지나 2005년 7월이었다. 대회가 연기되면서 처음 한 두달 동안은 언제 가나 궁금하고 초조하던 것이 시간이 한정 없이 흐르자 나중에는 긴장도 사라지고 흥미도 엷어지고, 종내에는 북으로 가는 일이 뭐 그리 대단한 일인가 여겨지게까지 되었다. 낼 모레 떠난다며 방북교육을 받을 당시만 하더라도, 북은 세계에서 가장 먼 나라인 듯 했고, 곧 떠나게 되는 기분은 발바닥이 짜릿짜릿할 정도로 긴장된 것이 사실이었다. 그러나 막상 떠나는 날, 발바닥은 뜨겁지 않고, 비행기 탑승시간을 기다리는 마음도 자못 태연했다. 그것은 내 가족들도 마찬가지여서 1년 전에는 ‘갔다가 돌아올 수는 있는 거냐’며 울먹이던 어머니는 공항에서 다녀오겠다 인사차 건 전화에는 그저 ‘잘 갔다 와라’한마디 뿐이셨다. 나도 그러하거니와 내 어머니 배짱도 늘었다 싶은 기분이 자못 유쾌하기까지 했으나, 그런 기분은 막상 고려민항에 탑승하는 순간 씻은 듯이 사라져, 나도 모르는 사이에 어느새 발바닥이 다시 뜨거워져 있었다.
  안녕하십니까, 어서 오십시오. 인사를 건네는 고려민항 승무원 아가씨들은,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 처음으로 만나본 진짜 북쪽 사람들인 셈이다. 여행지에서 간혹 북측에서 직접 경영하는 북쪽 식당엘 갔던 적이 있고, 그곳에서 일하는 의례원 아가씨들과 농담을 주고받은 적이 있기는 하지만, 외지라는 특성 때문인지 나는 그들을 ‘여행지의 사람들’로 여겼지 ‘북쪽 사람들’로 여기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고려민항 승무원들은 그야말로 진짜 북쪽 사람들이다. 고려민항은 진짜 북쪽 비행기이고, 좌석에는 진짜 북쪽 간행물- 사적으로 소지하고 있다면 국가보안법에 저촉될 것이 뻔한- 들이 비치되어 있었다. 비행기를 탄 100여 명이 넘는 탑승자들의 목소리가 한결같이 낮다. 모두들 귀엣말을 건네듯이 소곤소곤하는데, 혹시 무슨 실수하는 말을 할까 그 낮은 말마저도 조심스럽다.
  비행기가 이륙을 하고 승무원들의 기내 안내가 시작되었다. 보통의 다른 비행기에서 하듯 반갑다는 인사와 비상시 대처행동 요령 등에 대한 안내였는데, 그 간단한 말 몇 마디에 뜨겁던 발바닥의 긴장이 나도 모르는 사이에 슬몃 풀어져버린 것은, 그들의 말 때문이었다. 말의 내용이 아니라 그야말로 ‘말’.
  ‘어, 북쪽 사람들이 우리말을 쓰네.’
  문학적 과장이 아니다. 티브이에서 때때로 보게 되는 북쪽 관련 보도에는 북쪽 방송 장면이 나오기도 한다. 단조로운 푸른색 붉은색 배경 앞에 한복을 입고 앉은 북쪽 여자 아나운서는 거칠고 센 억양으로 정치적인 발언을 선동적으로 한다. 금방 구호라도 외칠 듯, 혹시 주먹을 쥐고 있지는 않나, 궁금해지는 ‘말’들이 티브이에서 튀어나온다. 결국 같은 말이니 그들이 하는 말의 내용을 못 알아들을 것은 없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들의 말은 우리말이 아니라 완전히 다른 나라의 말, 세상에서 가장 먼 나라의 말로 들리는 게 사실이다. ‘그들’의 말은 거칠고 거북하다. 북쪽에서 아이스크림을 ‘얼음보숭이’라고 한다는 말을 들으면, 그것은 말의 차이가 아니라 남과 북의 거리의 바로미터처럼 여겨진다. (실제로 북에 가서 확인한 바에 의하면, ‘얼음보숭이’는 사전에나 나오는 단어일 뿐이고 그들 역시 실제로는 아이스크림이라는 말을 일상적으로 사용한다고 한다!)
  그러나 고려민항 승무원 아가씨들, 그러니까 내가 태어나 처음 만나본 진짜 북쪽 사람들의 말은 거칠지도, 거북하지도 않다. 좌석마다 음료와 간식을 돌리며 다정하게 건네는 말들은 ‘일상의 언어’들이다. 물론 남쪽과는 다른 단어들이 쓰이고, 억양도 분명히 다르지만, 경상도 아가씨나 전라도 아가씨처럼, 그들도 그저 북쪽 아가씨들일 뿐이다. 일상의 언어는 사근사근하고 다정하게만 들린다.
  그 후 4박5일간 북쪽에 머물면서 다시 느끼는 바이지만, ‘차이’와 ‘거리’를 지우는 것은 말의 다른 뜻과 다른 함의를 지워나가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는 것이 아닌가 싶다. 밥을 먹고 술을 마시면서, 함께 거닐면서, 혹은 버스 안에서 같이 꾸벅꾸벅 졸다 깨어나면서, 그런 일상 속에서의 대화들이 말의 거리를 지운다. 술 한 잔 끝에‘심장에 남는 사람’을 배우다가 음정이 틀리다고 구박받으면서 ‘인숙동무는 노래 수련을 좀 더 해야겠시요’라는 말을 들었다고 한들, 동무라는 단어가 거북하지도 거칠지도 않게 여겨질뿐더러, 심지어는 다정하게 여겨지는 것은 그런 이유에서가 아니겠는지.

 
  김인숙 |
소설가, 해외문헌 자료조사 연구부장
1963년 서울 출생.
소설집으로함께 걷는 길』,『칼날과 사랑』,『유리 구두』,『브라스밴드를 기다리며』,『그 여자의 자서전 등이 있다. 장편소설로는핏줄」,「불꽃」,「'79~'80 겨울에서 봄 사이」,「긴 밤, 짧게 다가온 아침」,「그래서 너를 안는다」,「시드니 그 푸른 바다에 서다」,「먼길」,「그늘, 깊은 곳」,「꽃의 기억」,「우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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