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정희창 / 동덕여대 국문과 교수, 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
학생들이 여름과 겨울 방학에 직장 생활을 체험하도록 하는 ‘청년 직장 체험 프로그램’이라는 게 있다. 국어국문학과 학생들이 체험할 수 있는 곳을 물색하다가 ‘겨레말큰사전 편찬위원회’를 추천하게 되었다. 여기에는 물론 이유가 있었다.
얼마 전, 수업 시간에 남북의 언어 차이를 다루다가 학생들에게 <겨레말큰사전>을 소개했더니 놀랍다는 반응이 많았다. 남북이 함께 무엇을 한다고 하면 개성 공단에서 물건을 생산하거나 금강산 관광 정도만 알고 있었는데 사전을 함께 만드는지는 몰랐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그중 한 학생의 반응이 재미있었다. 남북이 사전을 같이 만들다니, 너무나 낭만적이라는 대답이었다. 낭만적이라는 말이 의외여서 무슨 뜻이냐고 다시 물었더니 멋있다는 말이라고 설명을 덧붙였다. 그러자 다른 학생들이 공감한다는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멋있다는 것은 무엇일까? 이런 말들을 칠판에 적어 내려갔다. 좀스럽지 않다는 것, 고상하고 우아하다는 것, 남을 배려할 줄 안다는 것, 시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가치를 지녔다는 것……. 마치 사전의 뜻풀이를 적어 가듯 머릿속에 단어들이 쏟아져 내렸다.
몇 년 전, <겨레말큰사전>에 대한 날카로운 평가를 내리는 자리에 간 적이 있었다. 그 자리에 쏟아져 내린 단어들은 무척 당혹스럽고 참담한 것들이었다. <겨레말큰사전>의 경제적 효과가 무엇인지, 사전을 누가, 얼마나 이용하는지, 왜 굳이 정책 효과도 높아 보이지 않는 사전을 만드 데 예산을 지원하는지에 대한 날이 선 질문과 평가가 가득했다. 빛으로 번득이는 날 사이에 낭만이나 멋 따위는 아예 설 자리가 없어 보였다. 사전과 통일의 가치를 연결할 줄 모르는 눈에는 <겨레말큰사전>은 낭만스럽지도 멋있지도 않은 쓸모를 알 수 없는 사전일 뿐이었다.
그 날의 날카로운 기억은 이후에도 잘 잊히질 않았다. 그런데 학생들과의 대화 이후로 나는 그날의 어두운 마음에서 어느 정도 벗어날 수 있게 되었다. 학생들이 내게 알려 주었듯이 사전을 만드는 것은 참으로 멋있고 가치로운 일이기 때문이다. 20대 후반부터 30대 후반까지 젊은 시절에 10년이 넘도록 사전 만드는 일을 하면서도 느끼지 못했던 감정이었다. 나는 내가 했던 것을 허드렛일로 기억할 뿐 그 허드렛일이 원석을 다듬어 보석을 만드는 일이라는 것을 모르고 있던 셈이었다.
가끔 학생들이 이런 질문을 한다. 국어의 가치는 무엇인가요? 국어가 왜 중요한가요? 친구들이 저보고 왜 국문과를 다니냬요? 그럴 때마다 들었던 이야기를 전해 준다. 우리말은 우리가 누구인지 보여 주는 거울이고 우리의 역사는 우리가 걸어갈 길을 밝혀 주는 등불이라는 말이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는 말로 보여 줄 수 있고 내 삶의 방향이 어떠할지는 내가 걸어온 자취인 역사를 보고 예측할 수 있다. 언어와 역사가 삶의 본질에 가까운 것은 자신이 누구인지,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말해 주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경제적인 효과도 이용자의 수도, 요란한 정책적 효과도 따질 필요가 없다.
이런 점에서 사전을 만드는 일은 그 가치를 평가하기가 조심스러운 일이다. 국어를 이해하지 못하고 의미를 찾지 못하는 눈으로 보면 사전은 그래서 별다른 가치가 없는 대상이 되어 버린다. 내가 잘 쓰지 않는, 모르는 말을 잔뜩 모아 놓은 단어장일 뿐이다. 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것들을 너무나 많이 알고 있다. 누구에게는 아무런 감흥도 없는 하찮은 것이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너무나 소중한 것들, 문학 작품을 읽고 감동을 느끼는 일, 영화를 보고 남몰래 눈물을 닦는 일, 미술관에서 그림을 오랫 동안 바라보는 일, 박물관에서 옛날의 도자기를 보고 감탄하는 일…… 이러한 일들은 숫자로는 평가할 수 없는 가치를 지닌 것들이다.
학생들이 방학에 <겨레말큰사전> 체험을 하고 나서 어쩌면 사전 만드는 일이 그리 멋지지 않다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사전을 만드는 일이 이토록 수고로운지 몰랐다며 말할 수도 있다. 하지만 사전이 왜 필요한지, 그 가치가 무엇인지 느끼게 되었다면 그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사전을 만드는 일은 정말 멋진 일이고 <겨레말큰사전>은 그 멋진 일에 남북의 언어 통일이라는 말할 수 없는 가치를 더하고 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