_ 오태호 / 문학평론가
1. ‘혈육’에 대한 동일성과 차이
북한은 ‘사회주의 대가정’을 표방하는 국가라는 점에서 ‘혈연’을 강조한다. 특히 ‘수령-당-인민’이 삼위일체적 관계를 이루며, ‘수령’이 아버지, ‘당’이 어머니, ‘인민’은 자식의 역할을 각각 담당하는 위계화된 ‘유사 가족 사회’에 해당한다. 따라서 ‘수령의 말씀’과 ‘당의 지침’을 따르는 ‘북한 문학’에서는 인민들에게 어버이의 책무를 이어받는 계승의 임무가 강조되는 것이 일반적이다. 구세대의 모범을 미숙한 신세대가 따라배워야 한다는 관점이 우세한 것이다.
남한에서도 일상 현실 속에서는 가부장적 전통 속에 혈연의식이 강조되는 것은 북한과 마찬가지다. 하지만 문학 텍스트 속에서만큼은 ‘혈연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적 문제의식을 강조하기 위한 서사적 전략이 동원된다. 그리하여 ‘살부(殺父) 충동’으로 대표되는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극복하지 못한 ‘광인들의 이야기’를 통해 혈연적 금기를 넘어서는 문제제기가 다양한 형태로 감행된다.
홍남수의 「세대의 임무」와 정용준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2015년에 남북에서 발표되어,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를 다룬 주요 작품에 해당한다. 둘 다 부자지간의 내적 갈등이 소재이지만, 그 해결 양상은 사뭇 다르게 표출된다. 그것은 체제 내적 이데올로기로 이야기가 수렴되는 북한식 서사와 자유로운 상상력을 기반으로 금기를 넘어서는 충동을 보여주는 남한식 서사의 차이에서 비롯된다. 결국 북한에서는 핏줄에 대한 강박이 서사를 장악하는 중핵에 해당한다면, 남한에서는 핏줄에 대한 거부감이 서사적 갈등을 예각화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분명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부자 관계의 끊을 수 없는 혈연의 유대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남북한 문학의 동류성을 넘어, 문학의 보편성을 확인하게 한다.
2. 집단의 공익을 위한 계승적 자세 - 홍남수의 「세대의 임무」(『조선문학』, 2015. 11)
홍남수의 「세대의 임무」는 아버지 세대가 아들 세대에게 사적 즐거움보다 공익적 가치를 우선시해야 하는 입장을 계승적 관점에서 이야기하는 작품이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지 10년이 넘는 어느 날, 화자가 아버지를 회상하면서 작품이 시작된다. 평범한 농민이었던 아버지에게 농사일은 한생의 전부이고 기쁨이자 보람이다. 그런 아버지가 화자에게는 항상 “사회를 위해 유익한 일을 더 많이” 해야 하며 “더 많이 생각하고 노력해야 한다.”면서 “스스로가 자각해야 되는 일”임을 강조한다. 공익을 위한 사색과 노력, 주체적인 자각의 필요성을 강조하는 전형적인 북한식 아버지상인 것이다.
화자가 농업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온 날 집 안은 명절처럼 흥성거린다. 집안에서 상급학교의 문턱을 넘어본 사람은 화자 혼자인데다가, 전문학교를 최우등의 성적으로 졸업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화자가 농산작업반에서 일하겠다고 하자 아버지는 실망한다. 아들이 기계화작업반에 들어가 그동안 배운 지식을 활용하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는 기계화작업반 일이 생활도 따분하고 단조로울 것이라는 생각에 결심을 바꾸지 않는다. 오히려 다종다양할 농산반 생활을 상상하며, 농촌생활이 오로지 ‘기쁨과 즐거움, 환희’를 제공해줄 것을 기대한다. 기대대로 농산작업반에 배치된 화자는 장쾌한 자연과 함께 일하면서 휴식의 한때를 느끼는 등 농촌 생활에 익숙해져간다. 휴식일에는 무조건 쉬어야 한다는 생활 신조 속에 휴식일을 즐기던 화자는 결혼식에 들렀다가 친구들과 기타를 치고 노래를 부르며 놀다가 늦게 귀가한다. 그리고는 다음 휴식날에는 영천강으로 천렵놀이를 나갈 계획을 세운다. 그리하여 ‘생활의 즐거움과 환희’ 속에서 향유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생활의 주인”이 된 ‘권리’임을 강변한다. 하지만 아버지로부터 ‘더 많은 사색’과 ‘사회적 공익 추구’의 필요성에 대한 비판을 듣게 된다. 결국 친구들과 헤어져 집에 오던 화자는 자신의 생활을 반성하면서 “난생처음 느끼는 고독감”을 절감한다. 친구들과의 천렵놀이 이후 더욱 침울해지면서 무력감에 빠진 화자는 ‘즐거운 생활’에 대한 ‘자신의 확신’에 대해 회의를 갖기 시작한다. 자신이 아버지의 걱정처럼 ‘무맥한 존재’가 될까 조바심이 생겨나는 것이다.
기계화작업반장이 관리위원회에서 한 달 동안 시간을 보장해주겠다면서 10년된 구식 탈곡기의 개조를 지시하자, 화자는 아버지에 대한 원망이 되살아난다. “혈육도 아닌 다른 사람들도 이렇게 왼심을 쓰며 믿어주고 도와나서는데 유독 아버지만”은 그렇지 않은 것 같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자가 탈곡기를 개조한 이후, 작업반장으로부터 ‘도면의 부족점’을 듣게 되자 개조의 실패를 절감하게 된다. 결국 ‘슬픔과 창피’ 속에 심리적으로 위축되고 생활이 힘겨워진다. 더구나 아버지는 남들이 해놓은 것을 몇 군데 뜯어고치고 좋은 평가를 바라고자 한다면 애당초 걷어치우라고 비판한다. “생각이 저속”하다면서 화자의 ‘대충주의적 태도’에 아쉬움을 표하고, 화자의 “모든 넋과 마음”이 목표와 목적에 부합하지 못한 채 비껴서 있다는 것이다.
화자는 이후 전국농기계전시회에 내놓을 새로운 형태의 보습을 만드느라 바쁜 시간을 보내면서, 아버지 앞에 새로운 모습으로 나설 결심을 한다. 그러던 어느 날 병원에 입원해 있던 아버지가 새로 나온 『농기계편람』을 가져온다. 화자에게 책을 전달하기 위해 일부러 하루 시간을 받아 병원에서 잠시 외출한 것이다.
《이제는 너희들세대가 이 벌의 주인이 되었다. 세월이 흐르면 또 너희네 다음 세대가 여기서 살며 주인이 될게다. 넌 그들에게 이 들판에 무엇을 새겨야 하는가를 배워줘야 한다. 그래야 그들도 또 다음세대의 인생길을 올바로 잡아줄수 있다.》
《오늘과 래일! 세대의 임무!》
나는 메아리처럼 귀전에 울리는 아버지의 말을 마음속으로 새겨보며 어둠이 내려앉는 들판을 오래도록 바라보았다.(65쪽)
인용문처럼 화자의 아버지는 “세대의 임무”를 계승한 주체가 지금 “이 벌의 주인”인 ‘아들 세대’임을 강조한다. ‘배움’의 계승을 통해 오늘과 내일이 연결되어 구세대의 가치가 지속되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화자는 아버지가 “나에게 생을 준 아버지”임과 동시에, “성장의 법칙”과 “우리 세대들의 임무와 자각이 무엇인가를 깨우쳐준 스승”이자 ‘동지’라고 회상한다. 아버지는 생물학적 아버지이자 멘토로서의 스승, 세대의 임무와 자각을 계도해준 동지 등의 다면적 역할을 감당해낸 존재인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화자가 “자기를 오늘이 아니라 래일에 세우라”는 아버지의 말씀을 좌우명으로 삼게 된다.
홍남수의 「세대의 임무」는 아버지 세대의 헌신성을 본받으면서 후세대가 지식과 기술을 겸비하고 오늘과 내일을 연결하여 더 나은 내일을 선도하는 것이 새로운 세대의 임무임을 강조한다. 일할 때는 일하고 놀 때는 놀면서 생활의 즐거움만을 향유하려던 화자 ‘응일’은 아버지의 공익을 위한 헌신과 배움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태도를 통해 북한 사회에서 공익적 가치가 사적 욕망보다 우선하는 오늘의 과제이자 내일의 전망을 약속한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된다.
3. 어머니를 살해한 무기수 아버지와의 흐릿한 혈연감 - 정용준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 문학동네, 2015)
정용준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24년 전에 어머니를 살해한 아버지가 무기수로 복역하다 가석방이 되어 간호조무사가 된 29세 아들의 병원에 신장투석하러 온 이야기를 통해, 부친에 대한 거부감을 넘어 ‘끊을 수 없는 핏줄의 유대’를 수용하게 되는 ‘혈육의 이율배반성’을 주목한 작품이다.
어느 날 화자인 ‘나’에게 24년 전 어머니를 살해한 무기수 ‘아버지’인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온다. 화자는 낯선 타인처럼 아버지를 조우한 뒤, 몇몇 장면이 트라우마로 남긴 했지만, 이제는 ‘상관없는 일’이라거나 ‘존재하지 않는 기억들’이라고 애써 외면한다. ‘그’에게는 화자가 자신의 “유일한 혈육”일지 몰라도 화자에게는 ‘그’가 “완전한 타인”으로 생각되기 때문이다. ‘혈육’과 ‘타인’ 사이의 인식론적 거리는 24년의 시공간을 거치며 확고부동하게 멀어진 것이다. 하지만 그가 아들이 근무하는 병원에 입원한 뒤 그의 활력적인 에너지가 투석실 분위기 전체를 활발하게 바꾸기 시작하자 화자는 불편해진다. 그를 만난 이후 “모든 일들이 충격의 연속”으로 느껴지는 것이다. 더구나 편두통이 생기고 ‘어둡고 위험한 충동’에 시달리게 되면서, ‘비참함, 억울함’과 함께 “기이한 수치심”까지 느끼게 된다.
특히 그의 식탐을 보면서 화자는 역겨움과 분노를 느낀다. 그리하여 화자는 솔직하게 그에게 ‘불편하다, 기억도 추억도 원망도 미움도 없다’고 말한다. 하지만 그는 “그저…… 네가 한번 보고 싶었다”면서, ‘그게 전부’라고 말한다.
긴 세월을 갇혀 지내다보니 이곳에 아는 사람은 아무도 없더구나. 병원이 무서웠고 바깥의 모든 것들이 두려웠다. 그리고 네가 궁금했다. 단 한 번이라도 네가 보고 싶었다. 너를 찾는 과정중에 네가 병원에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단다. 나는 지금에 와서 너에게 아버지 대접을 바란 것이 아니다. 다만 너는…… 최소한 너는…… 나를 해하거나 나쁘게 대할 것 같진 않았다. 그래도 우린…… 혈육이 아니냐.
아니요. 혈육이 아닙니다. 내 피는 당신의 피와 무관합니다. 당신이 열심히 사는 것이 싫습니다. 당신은…… 그렇게 계속 비참하게 희망없이 외롭게 늙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대답하고 싶었지만 나는 입을 다물었다. 그 앞에서 입 밖으로 꺼낼 수 있는 말이 더는 없었다. 몸을 데우고 있던 열이 일순간 발밑으로 빠져나가는 기분이 들었다. 한참동안 나는 말없이 그와 마주보고 서 있었다.
어쨌든 당신은 내 어머니를 죽였습니다. (59쪽)
24년의 수인 생활 이후 가석방된 ‘그’에게 남은 것은 ‘낯선 병원과 사회’에 대한 무서움과 두려움이다. 그리고 그 무서움과 두려움의 공포와 불안으로부터 최소한의 안전장치(혹은 의지처)가 되어줄 존재가 바로 ‘유일한 혈육으로서의 아들’이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래도 우린…… 혈육이 아니냐”라는 그의 말에 화자는 혈육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싶지만, 그 말의 함의를 결코 부정하지는 못한다. 그가 아무리 ‘살인범’이라 할지라도 자신에게 육신을 부여한 생물학적 아버지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살인의 대상이 다른 누구도 아닌 ‘어머니’였다는 점은 받아들일 수가 없다. 그래서 결국 “어쨌든 당신은 내 어머니를 죽였습니다.”라는 범행 사실을 환기하면서 아버지와의 거리감을 확인하려 한다.
그러나 화자가 ‘죽은 어머니의 이미지’를 악몽으로 만나면서 상황은 다르게 전개된다. 새로 꾼 꿈속에서는 기존과 다르게 배에서 두 명의 남자가 내려서고, ‘무심한 바다코끼리’를 사냥하는 내용이 구성된다. 이제까지 꿈에서 등장한 남자는 한 명뿐이었지만, 아버지를 만난 뒤에 꾼 이번 꿈에서는 두 명이 등장한 것이다. 이것은 결국 ‘어미 살해(=바다코끼리 사냥)’를 방관한 일종의 공범적 자의식이 화자의 무의식에 새겨져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국 생물학적 아버지인 그는 화자에게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아니”며, “그에게 연연하고 있는 나 자신을 통제할 수 없다는 것, 내 의지와 상관없이 그는 나의 아버지일 수밖에 없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는 강제된 생각들”이 떠오르게 된다. 그러면서 그가 전한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말을 부정할 수 없다고 생각하게 된다. 주체적 의지나 합리적 이성으로는 ‘모친을 살해한 아버지’를 부인하려 하지만 생물학적 본성으로는 부자관계의 혈육지정을 부정할 수 없었던 것이다.
결국 정용준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어머니를 살해하여 무기수가 된 살인범인 아버지가 가석방되어 찾아오자, 그를 거부하고 싶은 마음이 앞섬에도 불구하고 그를 ‘핏줄로서의 아버지’로 인정할 수밖에 없는 아들을 통해 ‘혈연의 무의식적 유대’를 강조한 작품이다. ‘아버지의 어머니 살해’라는 강렬한 소재에도 불구하고 정용준은 아버지와 아들의 끊을 수 없는 핏줄 의식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4. 사회주의 대가정과 해체된 가정
북한 문학과 남한 문학은 동질성보다 차이가 확연해 보인다. 북한 문학이 ‘혈연의 위계화’라는 고정관념을 넘어서지 못한 채 ‘공익과 집단의 가치’를 강조하고 있다면, 남한 문학은 ‘혈연의 절대성’이라는 고정 관념을 탈피한 채 자유로운 개인의 서사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그리하여 고정된 부자관계를 그려내는 북한문학보다, 아들의 생물학적 기원으로서의 아버지에 대해 다양한 문제의식을 강화하는 텍스트가 남한 문학에서는 다채롭게 전개된다.
북한 문학 속에서 아버지는 아들이 본받아야 할 표상으로 등장한다. 때로 구시대적 존재로서 ‘산 화석’ 같은 인물로 그려지거나 새로운 과학기술의 수혜를 제대로 활용하지 못하는 구태의연한 존재로 그려지기도 하지만, ‘사회주의 대가정’을 표방하는 북한식 모토는 여전히 가장의 권위와 권한을 용인하는 표정을 보여준다. 홍남수의 「세대의 임무」는 전형적인 북한 소설의 가부장적 이미지를 산출하고 있는 작품이다. 농민의 전형인 아버지의 유지를 10년이 지난 뒤에도 계승하려는 아들을 통해 ‘삶의 전범인 아버지’와 ‘계승의 책무를 지닌 아들’의 부자 관계가 고정되어 드러나기 때문이다.
남한 문학 속에서 아버지와 아들은 서로를 배제하고자 함에도 불구하고, 서로에게 연결되어 있는 관계를 유지한다. 단절적 연계성이 핏줄의식의 내면에 새겨져 있는 것이다. 정용준의 「우리는 혈육이 아니냐」는 통상적인 작가의 서사에서 ‘폭력과 살인의 대명사로서의 아버지’와 ‘폭력의 대물림에 의해 방황하는 아들’의 구도로부터 조금 비껴서 있다. 정용준의 다른 작품들에 비하면 이질적인 서사 구조를 드러내지만, 이 작품은 혈연을 외면하기 어려운 부자관계를 통해 핏줄의 재확인 속에서 흐릿하면서도 분명한 혈연감을 보여준다.
문학은 상상력이다. 상상의 세계에서는 사회적 고정관념을 넘어서는 서사적 작업이 필요하다. 그런 점에서 남한 문학은 늘 경계를 지우며 경계를 넘어서기 위해 고투한다. 반면에 북한 문학은 수령을 위시로 체제를 중시하는 당문학적 입장을 되뇌인다. 그러나 당문학적 입장을 강조하는 북한문학의 내면에는 사적 욕망의 꿈틀거림이 드러난다. 북한문학의 생생한 현장은 집단의 공익을 강조하는 의지적 수사 이면에 자리한 거세된 사적 욕망에 있는 것이다. 우리는 그 사적 욕망의 표정에서 역설적이게도 북한 사회의 진면목을 만나게 된다.
| 오태호 |
2001년 조선일보 신춘문예 문학평론 당선. 평론집으로 『오래된 서사』, 『여백의 시학』, 『환상통을 앓다』, 『허공의 지도』 등이 있다. 현재 경희대학교 후마니카스칼리지 객원교수로 재직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