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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6/09_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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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전 이야기

 
사전이야기 조재수(겨레말큰사전 편찬실장) 모든 저술이 그렇듯이 사전도 늘 깁고 보태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미 나온 사전의 잘못과 모자라는 점을 정확히 살피어, 그잘못을 바로잡고, 모자라는 어휘와 풀이를 더하는 일이 이어져야 한다. 바로 사전 편찬의 기본 과제다.
 

 

 사전이란 어떤 책인가?

  '이야기'는 재미있어야 한다. 그런데 '사전 이야기'가 재미있을까? '사전'이란 한 마디로 말하자면, 말로써 말을 풀이한 책이다. 그러니 사전에는 말만 가득하다.

  세상에는 온갖 사물이 있고, 또 그 사물을 밝히는 온갖 지식이 있다. 모든 사물과 지식은 말(언어)의 옷을 입고 나타난다. 사물을 알고 지식을 쌓는 일은, 그 사물의 말을 알고 그 지식의 말을 쌓는 일이다. 온갖 사물과 지식을 어휘(말) 단위로 모아 풀이한 책이 바로 사전이다. 낱낱의 말은 보통 '단어'를 가리키는데, 사전에 다루는 말에는 단어를 이루는 그래서 단어보다 작은 말조각(형태소)도 있고, 또 단어보다 긴 숙어(관용구) 들도 있다.

  흔히, 사전 만드는 일을 '사전 편찬'이라 한다. 수많은 말을 말로써 풀이하여 엮는 일이다. 어려운 말도 풀이하고, 쉬운 말도 풀이한다. '엮음'에는 일정한 짜임새가 있다. 사전의 짜임새는 동서양 모두 간단한 어휘집에서부터 시작하여 종합적인 뜻풀이(주석) 사전으로 발전해 왔다. 한국에서도 우리말 사전 편찬에 앞서 '한자:우리말', '외국어:우리말' 또는 '우리말:외국어' 자전류가 먼저 나왔다. 이에 관해서는 다음에 따로 살펴보기로 하겠다.

  서양에서도 지식 탐구를 위한 보조 수단인 사전은 모국어를 배우기 위한 수단으로서가 아니라 외국어를 배우기 위해 먼저 편찬되었다. 최초로 편찬된 사전들은 외국어 낱말을 모국어로 알기 쉽게 풀어놓은 '대역어(번역어) 사전'이었다. 다른 나라 사람, 다른 민족 문화와의 접촉에서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문제가 그 언어를 이해해야 하는 일이기 때문이었다.

 대역어(번역어) 사전 곧 사전의 처음이라 할 수 있는 기록은 기원전 2000년에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기원전 2000년 말기에 셈족인 아카드인들이 점진적으로 수메르를 정복한 결과로 수메르인 교수들에 의한, 인류에게 알려진 가장 오래된 '사전'이 편찬되었다. 셈족 정복자들은 수메르 문자를 받아들였을 뿐만 아니라, 수메르의 문학 작품들도 아주 소중히 여겼다. 그래서 수메르어가 구두 언어로서 사멸한 지 오랜 뒤에도 그들은 그것을 공부하고 모방했다. 따라서 수메르의 단어와 어구를 아카드어로 번역한 '사전'에 대한 교육적인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새뮤얼 노아 크레이머: 역사는 수메르에서 시작되었다>(박성식 옮김. 2000년. 28쪽) |주| '수메르'는 가장 오래된 인류 문명의 발상지. 지금의 이라크 남부 지역인,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 사이에 놓인 메소포타미아의 가장 남쪽인 지역. / '아카드'는 지금의 이라크 중부 지역에 있었던 고대 지방.

 우리 선각자들의 사전에 대한 인식은 어떠했을까?

  우리가 일컬어 오는 '사전'이라는 말은 한자말 '辭典'을 빌어 쓴 것이다. 이 밖에 '事典'이라 이름 붙인 것도 있다. '辭典'은 직역 하면 '말책'이니 언어를 풀이한 책이고, '事典'은 사항이나 사실을 풀이한 책이라는 뜻의 이름이다. 그런데 사항이나 사실에 대한 것이라 하더라도 그 표상은 언어 단위이다. 다만 그 풀이 체계나 범위에서 언어 중심의 사전과 성격을 달리할 뿐이다. 이런 점에서, 국어사전이나 전문 용어사전에는 '辭典', 백과사전 등에는 '事典'이라고 꼭 갈라 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백과사전'을 '~辭典'으로 쓴 예도 없지 않다.

  이 밖에 '사전'을 나타내는 말에 '사림(辭林)', '사서(辭書)', '사원(辭苑)', '사해(辭海)', '사휘(辭彙)', '어전(語典)', '어해(語海)' 등이 있다. 이 가운데 '사림(辭林)'은 우리말로 옮기면 '말숲'이요, '사해(辭海)'나 '어해(語海)'는 '말바다'이다. 또 주로 한자나 그 어휘집 이름으로 '옥편(玉篇)', '자전(字典)', '자해(字海)', '자서(字書)', '자원(字源)', '자휘(字彙)' 등의 말도 있는데, 이 이름들은 오늘날의 사전 개념과는 달리 주로 한자의 철자법, 음, 새김(뜻)을 밝혀 엮은 책의 이름이다. '자전'이라는 말은 한자 이외에도 '한불자전', '한영자전', '법한자전' 들에서처럼 널리 그 어휘집의 이름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이상의 '사전'을 나타내는 낱말들은 모두 한자말이다. 우리말로는 '사전'을 일컫는 말이 없었을까? 우선, 근대 국어 연구의 개척자 주시경(1876~1914) 선생은 최초의 우리말 사전을 조선광문회에서 편찬하면서 그 이름을 '말모이'라 하였다(1911년께). '말을 모은 것(책)'이라는 말이다. 주 선생의 제자로 보이는 어떤 이는 한글 풀어쓰기로 'ㅜㄹㅣ ㄱㅡㄹ'  소개에서 '씨 ㅏ리(자디ㅓㄴ)'라는 말을 썼다(월간 <대한인졍교보> 10호, 25쪽. 아라사 치ㅅ다. 1914. 5. 1.). '씨알이'는 '말의 씨 곧 낱말을 알게 하는 것'이라는 말이다. 이 또한 '사전'에 해당하는 우리말이다. 역시 주 선생의 제자였던 김두봉(1890~?)은 그의 문법책 <깁더 조선말본>(1922년) 붙임글에서 '말거울(사뎐)' 또는 '말모이(사뎐)'라 하였다. '말거울'이란 '말의 모습(실상)을 반영하는 것'이라는 뜻으로 일컬은 것 같다. 우리 말본의 대가 최현배(1894~1970) 는 '말광(辭典)'(<한글> 1932. 6.)이라는 말을 썼다. '말을 간직하는 광(곳간)'이라는 뜻이다. 또 어린이말 가꾸기에 힘쓰는 최종규는 '사전'을 '낱말책'이라 한다.

  이처럼 '사전'을 일컫는 우리말 이름들이 있었지만 우리는 이 가운데 하나도 본받아 써 오지 못하였다. 이러한 우리말 이름들을 두고 생각해 보면, '사전'이란 '말을 모아놓은 책(말모이·말광)'이며, 또한 '말의 제 모습을 알게 하거나 찾아 볼 수 있게 하는 책(씨알이·말거울)'임을 알 수 있다.

  이 두 가지 면은 바로 사전의 중요한 구실을 일러 주는 것이기도 하다. 말을 찾아 모아 두는(간직하는) 것과 말의 바른 실상을 보여(가르쳐) 주는 거울의 구실이 그것이다. 말을 간직하는 수단으로서 사전은 언어의 역사성과 현실성을 아울러 반영한다. 지금은 쓰이지 않는 옛말이나 묵은 말 또는 어원들을 다루는 것은 말의 역사성을 반영하는 것이며 표준말, 표준발음, 방언, 속어, 새 어휘 등을 다루는 것은 말의 현실성을 반영하는 것이다. 말의 바른 실상을 보여 주는 기능으로서의 사전은 표준말, 맞춤법, 표준발음, 정확한 뜻, 바른 쓰임새 같은 말의 규범을 가르쳐 준다. 이 점을 특히 강조하여 지난날 우리 선배 학자의 한 분이었던 이극로 선생(1893~1978)은 이렇게 밝힌 적이 있다.

 

  표준 사전은 다른 책과 달라 일부인의 일시적 독물(讀物)이 아니고, 사람마다 늘 두고두고 보는 책이니, 우리의 쓰는 말과 글이 옳고 그른 것을 질정하는(풀이: 갈피 잡아 확정하는) 최고 재판관이다. <조선어 사전 편찬에 대하야>(한글, 창간호.1932. 5.)

  꼭 '표준 사전'이 아니고 그냥 '사전'이라 하여도 위의 내용은 통하는 말이다. 말과 글의 옳고 그른 것을 질정하는 재판관이 사전의 본분이라면, 사전 편찬인 또한 말과 글에 대한 현명한 재판관이어야 한다.

  모든 저술이 그렇듯이 사전도 늘 깁고 보태는 작업이 필요하다. 이미 나온 사전의 잘못과 모자라는 점을 정확히 살피어, 그 잘못을 바로잡고, 모자라는 어휘와 풀이를 더하는 일이 이어져야 한다. 바로 사전 편찬의 기본 과제다. 그러나 우리 국어 사전 편찬은 그러하지 못하였다. 사전에 다룰 말에 대한 면밀한 검토가 없이 말수 늘리기에만 급급하지 않았나 싶다. 한 예로, 국어 대사전들에는 '국제'와 어울린 말이 4백여 개, '편지'를 나타내는 한자말이 2백여 개나 실려 있다. 사전은 되도록 말수가 많아야 하고, 그 많은 말을 갈피 짓는 분석과 체계가 뚜렷해야 한다. 말수가 많되 민족어의 본바탕 말이 많아야 하고, 분석과 풀이가 정확하되 쉽고 간결함을 본으로 삼아야 한다. 이런 점에서 아직 우리말 사전이 안고 있는 과제는 적지 않다. 여기에다 우리는 분단 60년의 남과 북의 말을 아우르지 못하고 있다.

  이러한 과제를 풀어 보기 위해, 지난 2005년 2월 남과 북의 사전 편찬학자들이 공동으로《겨레말큰사전》을 편찬하기로 하였다. 늦었지만 분단의 겨레 문화를 이어 보는 첫 걸음을 뗀 것이다. 이를 계기로 지난날(1930년대) 선배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일구었던 우리말의 정리와 큰사전 편찬의 위업을 되새겨보게 된다.

--- (다음에 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