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레말누리판
2006/09_10
 
 
여는 글
지역어와 영화의 만남
영화 속의 지역어
비름빡에 지대 영화를 봤다카이
사전 이야기
사전이란 어떤 책인가?
통일 이야기
'말’로 열어가는 남과 북,
  공동의 미래
함께하는 겨레말
나를 홀린 글
남북의 언어
함께 읽고 싶은 글
겨레말 소식
제1회 국내학술회의
제7차 남북공동정기편찬회의
 
겨레말 누리판 신청, 추천하기
 
 
 
함께하는 겨레말
 
  나를 홀린 글 - 최재봉(한겨레신문 문학전문기자
 
  위대한 수줍음의 실종

  엘리베이터를 탄다. 동행이 있다. 좁고 폐쇄된 공간을 점유하고 있는 것은 그와 나 단 둘뿐. 그런데, 그가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본다. 아는 사람인가? 아니다. 처음 보는 얼굴. 분명 모르는 사람이다. 그런데 왜? 내 얼굴에 뭐가 묻었나? 거울을 보니 그것도 아닌데. 도대체 왜? 최초의 쑥스러움과 불편함을 넘어 차츰 화가 나기 시작한다. 이 자는 어쩌면 이토록 무례한 거지? 예의를 가져다가 엿 바꿔 먹었나?

  이번에는 지하철이다. 옆자리에 앉은 젊은 친구가 휴대용 멀티미디어 플레이어(PMP, portable multimedia player)로 영화를 보고 있다. 가상의 첨단 무기가 동원되는 에스에프 액션물이다. 어떻게 아느냐고? 글쎄, 이 친구는 PMP만 알고 헤드폰이나 이어폰이란 걸 모르는지, 소리를 바깥으로 틀어 놓고 한껏 즐기고 있는 게 아닌가! 흡사 제가 가진 기계의 성능을 자랑하려는 것 같다. 니들은 이런 거 없지? 어이없고 믿고 싶지 않지만, 엄연한 현실이다. 몇 번 싫은 눈치를 줘도 막무가내다. 싫으면 니가 딴 데로 가세요, 식이다. 하긴 차량 안에 난데없는 텔레비전을 설치해 잠시라도 눈과 귀를 자유롭게 놓아 두지 않겠다는 ‘친절한 지하철씨’를 이용하는 처지에, 옆자리 승객의 휴대용 텔레비전이란 차라리 업그레이드된 친절로 감사하게 생각해야 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귀갓길의 좌석버스. 두 사람이 사이좋게 나란히 앉아 가도록 되어 있는 구조다. 그런데 옆자리의 동승자, 자리에 앉자마자 휴대폰을 꺼내더니 통화를 멈출 줄을 모른다. 목소리를 줄이는 법도 없다. 도무지 거리낌이 없다. 엿듣자고 해서가 아니라 일방적으로 귀를 뚫고 들려오는 말을 들어 보니 긴급하거나 심각한 얘기도 아니다. 다만 수다를 떠는 것이다. 그의 사생활이 시시콜콜히 내 귀를 파고든다. 알고 싶지 않고, 듣고 싶지 않지만 막을 도리가 없다(귀는 왜 눈처럼 감을 수가 없게 되어 있는 걸까!). 왜 내가 네 남친의 생일선물이며 엄마와의 말다툼이며 드라마 주인공에 대한 품평을 들어야 하는 거지? 집 앞에 도착하기까지 무려 30분 동안 내 귀는 꼼짝없이 그 놈의 수다에 붙잡혀 있어야 한다. 고통스럽다. 과장하자면, 같은 시간 동안 지하 고문실에서 고춧가루 물고문을 당한 듯한 느낌이다.

  사람들이 뻔뻔해졌다. 삼갈 줄을 모른다. 부끄러움과는 담을 쌓고 사는 듯하다. 남에 대한 배려가 없다. 그저 각자, 제 멋대로 살겠다는 투다. 여긴 이런 세상이니, 부끄러움과 예의를 챙기려는 자들은 어디 딴 데 가서 알아보라, 는 심사인지도 모르겠다. 뻔뻔함과 무례함의 공화국!

  내가 그릇된 걸까? 말로는 민중이니 인류애니 하면서 실제로는 극도로 인간혐오주의자여서일까? 혼란스러워지려는 찰나, 시인의 말씀에서 커다란 위안을 얻는다. ‘위대한 수줍음’을 예찬하며 그 실종을 안타까워하는 말씀이다.

  “물끄러미 철쭉꽃을 보고 있는데/뚱뚱한 노파가 오더니/철쭉꽃을 뚝, 뚝, 꺾어간다/그러고는 고개를 돌리며 내뱉는 가래침//가래침이 보도블록과 지하철역 계단/심지어 육교 위에도 붙어 있을 때/나는 불행한 보행자가 된다/어떻게 이 가래침들을 피해 길을 가고/어떻게 이 분실된 가래침들을 주인에게 돌려줄 것인가//어제는 눈앞에서 똥 누는 고양이가/나를 똑바로 쳐다보며 끝까지 똥 누는 걸 보고/이제는 고양이까지 나를 무시한다고 생각했다/위대한 수줍음은 사라졌다 뻔뻔스러움이/비닐과 가래침과 광고들과 더불어/도처에서 번들거린다//그러나 장엄한 모순덩어리 우주를 이루어놓고/수줍음으로 숨어 있는 이가 있느니/그 분마저 뻔뻔스러워지면/온 우주가 한 덩어리 가래침이다”(최승호 시「시치미떼기」전문)

  시인이 겪은 것과 거의 동일한 일을 나 역시 겪었다. 어느 해 여름이었던가, 세종대왕이 묻힌 여주 영릉엘 식구들과 같이 갔다. 능 안을 한 바퀴 돌아보고 길가 잔디밭에 앉아 지친 다리를 쉬고 있던 참이었다. 지나가던 노파(!) 하나가 하필 우리 앞에 딱 멈춰 서더니 ‘캬아악~’ 하고는 있는 힘껏 가래침을 돋워 올려 여지없이 바닥에 내팽개치는 것이 아닌가. 그 때의 끔찍함이라니.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그 이가 앉아 있던 우리에게 딱히 불만이 있었던 것이라고는 믿지 않는다. 그럴 이유가 없었으니까. 그 이로서는 무심하게, 거의 무아지경에서 연출한 퍼포먼스였을 것이다. 나는 그게 더 무섭다는 말이다. 무심함의 폭력. ‘남의 감정이나 기분, 안위 따위야 내 알 바 아니고, 나는 내 편한 대로 하고 살겠다. 여긴 자유민주공화국 아닌가.’ 이런 것이 민주주의라면, 민주주의 노 생큐다. 자신이 조금 불편하더라도 남들의 안위와 행복을 위해 참고 삼갈 줄 아는 것. 수줍음이 나쁜 의미의 소극성이나 성격 결함으로 치부되지 않고 그 가치를 온전히 대접 받는 세상. 그런 세상은 이제 영영 사라져 버린 것일까.

 
  최재봉|
한겨레신문 문학전문기자
지은 책으로『역사와 만나는 문학기행』,『간이역에서 사이버스페이스까지 - 한국문학의 공간탐사』,『최재봉 기자의 글마을통신』, 옮긴 책으로『러시아 하우스』,『에드거 스노 자서전』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