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없습네다?!”
김영주(남북평화재단 상임이사)
내가 처음으로 북을 방문했던 것이 1996년이었으니 꽤 세월이 지난 것 같다. 조선기독교도연맹의 초청을 받아서 방문한 것이다. 우리가 모두 그러했듯이 어릴 적부터 철저한 반공교육을 받아 왔기 때문에 북의 사람들을 이해하고자 하기보다는 적으로 생각하는 것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지는 시절에 북녘을 방문하기는 그리 쉬운 일은 아니었다.
지금이야 남북 간의 교류와 협력이 활발해져 많은 사람이 북을 방문하고 있지만, 당시에는 북 당국으로부터 초청장을 받아 남한 당국의 허락을 받는 일들부터 시작하여, 지금 생각하면 반공교육이라고 여길 수밖에 없는 방북교육을 받는 등 까다로운 절차를 거쳐 북경을 경유하여 평양의 순안 비행장에 도착하기까지는 긴장의 연속이었다. 사실 나는 북을 방문하기 전에도 NCC 통일위원회 국장의 직임으로 북의 교계 지도자들을 제 삼국에서 자주 만나 남북의 평화 통일에 대한 여러 견해를 나눈 경험이 있었기 때문에 어느 정도 북측 사람들의 생각이나 언어에 대한 상식들이 꽤 있었던 편이었다.
그러나 북의 평양이라는 공간에서 북측 사람들을 만나 실무적인 일부터 시작하여 평화통일의 과제에 대해 의견을 나누는 것은 또 다른 경험이었다. 일주일 동안 의 방문기간 동안 다양한 사람들을 만나 여러 의견을 나누는 과정에서 우리의 언어는 일상생활 용어에서부터 많은 부분 미묘한 차이가 있고, 심지어 다른 뜻으로 쓰이고 있음을 느끼게 했다. 이 글에서 일일이 다 소개하지는 못하지만, 한 두어 개의 토막이야기를 소개하고자 한다.
평양에서의 우리 일정을 논의하는 자리였다. 북측의 대화 상대는 조선기독교도 연맹의 조직부장이었던 이춘구였다. 나는 될 수 있는 대로 북에서 많은 경험을 하고 싶어 북측이 작성해 놓은 우리 일정에 추가하여 이런저런 제안을 그에게 했다. 그런데 그는 나의 진지한 제안에 대해서 “일없어요” 라는 말로 묵살하는 게 아니가! 당시 그와는 제 삼국에서 자주 만나 서로 농담도 주고받을 정도를 서로 잘 아는 사이라고 생각한 나는 그의 반응에 약간 실망하였지만 다시 한 번 더 나의 제안 의미와 필요성에 대해 설명하였다. 역시 그의 반응은 “아 일없다니까요!”였다. 대화를 마친 후 한동안 ‘일이 어렵다면 이런저런 이유로 어렵다고 설명할 것이지, 네 마음대로 하겠으면 해보라는 듯이 어떻게 저런 투로 무책임하게 말하나?’라는 서운한 생각이 떠나지 않았다. 숙소에서 ‘할 수 없지 뭐’ 혼자 말을 하면서 마음을 고쳐먹고 있는 나에게 이춘구 부장이 찾아 와서 같이 나갈 채비를 독촉하였다. 의아하게 생각하는 나를 보고는 그는 잠시 당황하는 모습을 보이더니 “당신이 제안한 일을 우리가 합의하지 않았던가.”라고 말하는 게 아닌가. 그를 따라 일정을 소화하는 동안 그가 그의 동료들과 “일없어”라는 말을 곧잘 쓰는 것을 보았다. 북의 ‘일없어’ 라는 말은 ‘괜찮다, 좋다’라는 긍정의 뜻을 담고 있는 언어라는 것이었다.
그 후 저녁 시간에 다음 날의 일정 논의를 비롯하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는 자리였다. 아침 산책을 하는 동안 보게 된 초대소의 정중앙에 자리 잡은 건물이 사우나 등 여러 시설을 갖춘 종합 시설이라는 것을 안 우리는 그 시설에서 사우나를 하게 해 달라고 요청하였다. 그는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사업을 조직해야 하고 사업을 조직하기 위해서는 공작을 해야 합니다.”라고 대답하였다. ‘공작’이라, 무엇을 공작한다는 말인가. 일찍이 우리가 받아 온 교육에서는 ‘공작’이라는 말은 간첩들이나 질이 나쁜 사람들이 잘못된 목적을 위하여 무슨 음모를 꾸밀 때 쓰는 나쁜 의미를 가진 단어가 아닌가. 우리들의 사우나를 위해서 무시무시한(?) ‘공작’이라는 단어까지 등장하는 것을 보고 우리는 북쪽에서의 사우나에 대한 호기심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나중에 안 것이지만, 국어사전에는 공작을 ‘어떤 목적을 위하여 미리 일을 꾸며 계획하거나 준비함’으로 정의하고 있다.
평양의 일정을 소화한 후 묘향산 근처의 향산 호텔에서 일박하면서 묘향산을 등반하는 일정에서의 일이었다. 정장을 하라는 안내원의 요청에 따라 산에 오를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던 우리에게 양복 차림으로 산을 오르는 것은 조금 벅찬 일이었다. 그러나 북녘의 산을 오르는 일이 어디 쉬운 것인가 라는 생각으로 헉헉 가쁜 숨을 내쉬면서 열심히 산을 오르고 있었다. 그때 “선생님, 배 좀 까서야 되겠습니다.”라는 말이 들리는 게 아닌가. 그 말의 주인을 찾아 고개를 들어 보니 동행 하던 여성 안내원이었다. 빙그레 웃고 있었지만, 젊은 여성의 입에서 배를 까라는 말을 듣고는 한편으로는 당황스러웠고, 한편으로는 불쾌했다. ‘배를 깐다.’라는 말은 처음 듣는 말이었다. 대응할 말을 미처 찾지 못해서 잠시 혼돈에 빠져 있는 우리를 향해 “우리 북에서는 뱃살을 줄이라는 말을 그렇게 쓰지요”라고 다른 안내원이 설명해주었다. 그때서야 우리는 모두들 크게 웃을 수 있었다. ‘깐다.’라는 단어는 껍질을 깐다. 알을 깐다. 라고 사용하거나, 사용해서는 안 될 말이지만, ‘이마를 깐다.’라고 까지 사용하지만, ‘배를 깐다.’라고 하다니…, 우리는 그 이후 조금만 배가 나온 북측 사람들을 만나면, “동무, 배 좀 까시라우요” 라고 농을 걸었고, 그들도 곧잘 우리들의 장난스런 말에 웃음으로 응대해 주었다.
일주일의 일정을 마무리하기 위해 그동안의 논의를 정리하는 자리였다. 남북 교회를 대표하여 그동안의 성과와 앞으로의 사업에 대한 합의서를 쓰기 위해 문건을 모두 정리한 후 강영섭 위원장이 교회협 총무에게 “자, 이제는 수표 하는 일만 남았습니다. 수표하시죠.”라고 권하였다. 익숙하지 않았던 용어에 잠시 어리둥절하던 우리는 곧 ‘수표’가 서명이라는 뜻인 것을 알아챘다. 짧은 일주일 동안의 경험이지만, 그래도 언어의 차이에 약간은 익숙할 수 있었던 우리는 얼른 펜을 받아 들고 서명하여 일 주간의 평양 방문을 마무리할 수 있었다. 북녘 동포들이 사용하는 언어를 남한 사람들인 우리가 잘 못 알아듣기도 했지만, 북녘 동포 역시 우리들의 용어에 익숙하지 않아 당황하는 모습을 보인 적이 있었다. 묘향산 입구에서 젊은 여성들을 만나 환담할 수 있는 기회가 있어 우리는 남한 교회에서 온 목사라고 하니 “통일 운동하는 사람 말입니까?”라고 되물었다. 단지 문익한 목사를 알고 있었던 그들은 목사를 정확히 모르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들의 반응으로 미루어 보아 교회라는 용어도 처음 듣는 것 같았다. 그동안 우리말에 살며시 끼어들어 일상 언어를 오염시키고 있는, 그리고 그것을 아무렇지도 않은 일로 여기고 있는 남한 사회를 생각해 본다. 아니 ‘오렌지’가 아니라 ‘오륀지’라고 하든가… 미국말 못하는 것을 수치로 여기는 정도가 되었으니, 만약 오늘 북녘의 형제, 자매들이 서울을 방문하여 시민들을 만나 자유롭게 대화하게 한다면 북녘의 그들은 남한의 언어를 얼마나 알아들을 수 있을까? ‘하기야 50여 년의 세월동안 적대적 관계를 유지하면서 서로 다른 체제, 다른 이념으로 교육 ․ 훈련을 받아왔던 사람들이 만나는데 이 정도의 차이도 없었을까?’ 라고 생각해 본다. 언어가 같은 의미를 가지고 사용된다면 얼마나 좋겠는가마는 그 의미가 꼭 같아야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의 말뜻을 이해할 수 없으면 그것은 큰일이다. 더 늦기 전에 우리들의 언어를 가꾸어야 할 것이다.
김영주 / 목사, 1989년부터 한국기독교교회협의회(NCC) 인권위원회 사무국장과 통일위원회 국장을 역임하고, 감리회 교육국 총무를 거쳐, 현재 남북평화재단 상임이사를 맡고 있다.